7월 17일 말레이시아 항공 MH17의 사망자 298명 중 네덜란드 국적이 193명, 여기에 영국 독일 벨기에 국적을 합하면 211명으로 전체의 71%가 유럽인이다. 유럽이 슬픔과 분노의 주무대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이제까지 유럽은 미국이 주도하는 러시아 경제 제재에 미온적이었다. 사건 바로 하루 전까지도 양측은 이견을 보였다. 미국은 러시아 정부가 대주주로 있는 석유회사(Rosneft), 천연가스회사(Novatek), 금융회사(Gazprombank) 및 8개 무기 생산회사에 대해 미국 금융시장 접근을 차단하는 강수를 두기로 결정했지만 유럽은 유럽투자은행(EIB)과 유럽건설은행(EBRD)의 러시아 신규투자를 당분간 중단시키기로 한 것이 고작이었다.

유럽 전체적으로 천연가스 수입의 30%를 러시아에 의존할 뿐 아니라 프랑스는 러시아에 군용 헬리콥터를 납품하고 있고 흑해를 경유하는 러시아산 가스파이프라인을 새로 건설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많은 유럽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는 등 유럽과 러시아의 경제관계는 미국과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유럽의 대 러시아 경제제재는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이렇게 미묘한 시점에 이번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는 어떤 존재인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후 러시아의 경제규모는 이태리 수준으로 쭈그러들었다. 1인당 소득은 1만5000달러로 이태리 3만4000달러의 절반도 안된다. 그나마 러시아가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은 옛 소련 국가들로 구성된 독립국가연합(CIS)의 보스라는 자존심이다. 그런데 창설멤버의 하나였던 우크라이나가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가 그토록 반대해왔던 우크라이나와 유럽연합 간의 무역협정이라는 것도 그 내용을 보면 관세인하 협정에 지나지 않는다. 러시아와는 이미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어 있는 터이다.

러시아 제재에 미온적이었던 유럽

우크라이나의 서방 접근을 막기 위해 러시아가 취했던 압박 수단은 무관세 자유무역협정을 파기하고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과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저가 공급계약도 없던 일로 하고 제값을 받겠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수출은 유럽과 러시아가 각각 188억달러 및 176억달러로 비슷하다. 유럽과의 협정으로 잃는 것이 더 많다. 그런데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떠나려 한다. 적어도 러시아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지고 있다. TIME지 모스크바 특파원과 백악관 홍보비서를 역임했던 제이 카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적인 자세는 처음부터 러시아의 쇠퇴, 유럽과 서방에 대한 영향력의 감소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 밖에도 "내 것이 아니면 나의 적의 것"이라는 냉전시대의 이분법적 사고가 아직 여러 강대국들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우크라이나와 같이 지정학적으로 동과 서의 경계선에 놓여 있는 나라들의 경우는 한쪽과 가까이 하기 위해 다른 쪽을 등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냉전적 사고에 함몰된 푸틴에게 이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푸틴은 또한 지난 5월 오바마 대통령이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행한 다음과 같은 연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세계 최강의 미국 군사력은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미국의 무력은 미국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할 때에 사용할 것인데 여기서 주적(主敵)은 테러리즘이다. 세상 도처의 불의(不義)에 대해서는 경제 제재를 포함하여 정치 경제 외교적 수단을 먼저 동원하되 국제기구 및 다른 나라와 공조하는 가운데 움직일 것이다."

냉전시대의 유물, 적과 친구의 이분법

현지 시간으로 어제, 유럽 외무장관회의가 브뤼셀에서 소집되었다. 아직은 사건의 진상확인 및 희생자 시신 송환 등에 있어 러시아의 협조가 필요하므로 당장 러시아에 대한 비난이나 제재의 강도를 급격하게 높이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취했던 조심성, 즉 러시아를 압박하되 유럽의 경제에 해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안이한 생각은 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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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분노가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의 강화로 발전하고 이것이 다시 러시아의 경제보복으로 이어지면 유럽, 나아가 세계의 경기회복은 다시 높은 장벽에 부딪친다. 그런 시나리오가 아니라면, 이번의 비극이 지구적 이성을 찾는 계기가 될까? 냉전은 끝났고 이제 때로는 나의 친구도 아니면서 나의 적도 아닌 그런 나라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 그런 계기 말이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 이 글은 <내일신문> 7월 23일자 '김국주의 글로벌경제' 에 실린 내용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제주의소리>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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