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28) 해방정국서 제주신보 편집국장 역임, 김호진 

“옳소 8개월” 제주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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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제주시가지 모습.

‘【제주도에서 본사특파원 김호진 발】제주도 인민 30만은 지금 역경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모든 공장은 대부분이 움직이지 않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발호하여 이 땅의 민주화를 방해하고 있다. “미군정이 존속하는 한 경찰은 나를 체포치 못할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쌀과 자유를 달라! 이것이 정의의 인민의 부르짖음이 아닐까?

이 땅의 특수한 공장시설을 본다면 작년 6월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일부 파괴당한 무수(無水)알코올공장, 조선에 유일한 통조림을 만드는 관힐(罐詰)공장, 전분(澱粉)공장, 조선의 수요량을 휠씬 초과 생산하는 옥도정기공장, 자개단추공장 등이 있으나 무수알코올공장이 지난 11월 해방 후 처음으로 작업을 시작하였을 뿐이고 나머지 제 공장은 좋은 계획은 있으나 기술 부족, 원료난으로 아직까지도 공장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목축부문을 보더라도 과거 왜놈병대들의 착취로 말미암아 소 3만 5,000, 말 3만, 돼지 4만, 면양 150두가 남아 있을 뿐, 일방 어업을 본다면 근해에 고래군이 출몰하고 있어도 자재 부족으로 방관할 수밖에 없고 제주도의 노동자들은 공장문을 열라고 외치고 있다. 이 땅의 유행되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느 강연회 석상에서 어떤 사람의 강연 중에 “민주건국을 좀 먹는 이승만 김구씨를 타도하자”고 말하자 어떤 청년이 “옳소”하였다 한다.

경찰당국은 이 “옳소”한 청년을 체포하여 그는 8개월의 체형을 받아 방금 복역 중에 있다. “옳소” 한마디에 8개월의 중역은 너무 억울하다고 정의를 사랑하는 이 섬 인민들의 억울하다는 표현이 이 “옳소 8개월”이다. 같은 강연회 석상에서 “매국자 박헌영을 죽이라” 한 데 대하여 역시 “옳소”한 사람은 즉시 경찰계에 등용되어 지금은 간부자리에 앉아있다 한다. 이번 입법의원 선거에 있어서도 이 땅의 인민위원회에서도 제2중추원이라 하여 절대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국의 탄압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삐라 한 장 못 붙였다 한다. 이뿐만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 단체와 애국자들에 대한 탄압을 간과할 수 없다. “쌀과 자유를 달라”, “입법의원을 반대하자” 이런 삐라를 가두도 아니고 인민위원회 사무소 벽에 붙여 놓았다고 여러 사람을 체포하였다는 사실 이외에도 일제시대의 악질면장을 응징하였다 하여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고 또 모리배이고 반역자인 면장이 해방 후 또 다시 등장하여 민중들의 원한을 촉발하여 굶주린 군중들은 그 집을 포위하여 쌀을 달라고 절규하자 경관이 출동하여 군중을 향하여 발포, 1명이 즉사하고 수명의 부상자, 64명이 구속되었던 사실, 기타 학교선생들의 이유 근거 없는 체포, 몰수한 쌀을 경찰관계 직원들이 분배했다는 사건, 이외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탄압과 체포, 행정기관의 비행은 유행되었던 것이다.

입법의원 선거에 있어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모두 당선되었다고 인위에서는 입법의원을 분쇄하고 이를 거부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위가 인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당선된 것은 제주도 인민들의 현명성을 여실히 말하는 것이다. 모리배 하나 단속 못하는 경찰이 왜 살자고 애쓰는 인민의 외침을 억압하는가. 듣건대 미군정 당국은 제주도를 조선의 민주화의 시험장으로 하여 많은 시험을 하고 있다 한다. 만일 정의의 인민의 부르짖음을 무시하고 탄압, 억압을 포기 않는 한 군정의 시험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갈 것은 뻔한 일이다.

30만 제주도 인민은 굳게 단결하여 정의와 진리를 위하여 영웅적 투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절규하고 있다. “조선을 좀먹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악질경관을 숙청하라. 쌀과 자유를 달라. 진정한 인민에 대한 탄압을 포기하라.” (끝)【제주도에서 본사 특파원 김호진 발】’- 독립신보 1946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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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신문사.

제주신보 창간

‘본도로 말하면 귀환동포가 나날이 그 수가 격증하여 총인구 40만을 算케 된 오늘인만큼 문화전선의 最先端을 가는 언론기관의 절대적 필요성을 느끼는 동시에, 특히 건국 途程에 있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오늘의 사회현상을 돌아볼 때 그 사명이야말로 重且大라 아니할 수 었습니다.’ -濟州新報, 1947년 1월 1일 사고 ‘본지 법인조직으로 재출발’ 

‘우리는 우리의 당면한 긴급과제로써 모든 국제적 마찰과 국내적 혼란 그리고 온갖 생활면에 있어서의 위협을 초월하여 이루어야만 할 것이 무엇이냐 하겠는데 그것은 오직 우리 조국의 완전 자주 독립 뿐이라는 데 낙착하고야 말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2년의 쓰라린 체험을 통하여 새로운 民族의 活路를 찾아야 하겠는데, 요컨대는 朝鮮의 현 단계가 정치혁명 단계처럼 오해하는 점도 있으나 이를 감히 규정하고 실천에 옮기기보다는 우선 문제는 우리국토를 찾은 후에 정책 투쟁을 감행하여야 이치에 당한 일이다.

민족의 자유를 획득지 못한 오늘에 정책만 걸고 나서서 금간판으로 한들 우리의 목적이 달해질 리 만무한 것은 삼척동자가 아닌 이상 명약관화한 일이며 한 걸음 나아가서 국제마찰에 中和의 役을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濟州新報, 1947년 1월 1일 신년사 ‘死境에 活路를-신년을 맞이한 소감’ 중에서     

제주신보(濟州新報)는 1945년 10월 1일 창간되었다. 당시 제호는 제주민보(濟州民報). 창간호에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LST편으로 상륙한 미육군 파우엘(Powell) 대령의 회견 내용을 싣고 있다. ‘제주도민의 생명과 재산은 안전하게 보장한다’는 제목으로 김용수 기자가 제주공항으로 찾아가 파우엘 대령과 회견하였다.

‘浮島丸 사건’도 보도하였다. 8월 24일 한국인 550여명이 귀국하기 위하여 승선하고 있던 수송선 부도환이 출항하기 전 일본 京都 舞鶴港에서 의문의 폭발사고가 일어나 모두 참사한 내용이다. 당시 수송선 폭발은 일본군에 의한 한국인 학살이라는 설이 나돌았다.

제주민보 창간 후, 심한 운영난에 허덕이게 되자 김진수(金鎭洙)를 경영 책임자로 영입하였다. 김진수는 김용수(金瑢洙) 기자의 형이다. 1946년 1월 26일 김진수는 미군정 당국에 미군정 법령 제19호(1945.10.30 공포)에 따라 신문을 등록하여 발행인으로 취임하였다. 신문 제호를 제주민보에서 제주신보로 변경하였다.

이후 제주신보는 1947년 1월 계속되는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지방 유지들을 주주로 영입하여 주식회사로 개편했다. 주주로 참여한 유지들은 황순하(黃舜河)·윤성종(尹性鍾)·백찬석(白燦錫)· 김석호(金錫祜)·박영훈(朴永勳)·신두방(申斗玤) 등이고, 사장에 김석호를 선임하였다. 편집국장 백상현(白尙鉉), 김용수·고광태(高光泰)는 계속 제주신보 발행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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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대의 무기들. 죽창, 도끼 등이 보인다.

‘3·1사건’과 신문내용

‘사고(社告) : 3․1사건 희생자유가족 조위금 모집/ 3월 1일 돌발한 불상사로 말미암아 불행히도 십수명의 사상자를 내었던 것은 이미 주지하는 바인데, 그들 희생자는 독립의 영광도 얻지 못한 채 천고의 원한을 남기고 무참히도 쓰러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만강(滿腔)의 조위(弔慰)를 표함과 동시에 전도암담(前途暗澹)한 유가족의 생활을 구원하고 중상자를 위문하는 의미에서 본사 사회부에서는 좌기요항(左記要項)에 의하여 조위금을 모집하여 당사가(當事家)에 전달하고자 하오니 30만 도민은 이들 희생자를 동정하여 스스로 우러나는 동포애의 정의에서 다소를 가리지 마시고 거출해 주시기 앙망하나이다.

△마감 : 4월 15일까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수부장소(受付場所) : 제주신보사 사회부/본사에 직접 기탁하는 외에 가호방문 등은 않기로 되었사오니 이 점 양지하시옵기 바라며 각 지방에서는 서류로 직접 본사에 우송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제주신보사 백’-제주신보 1947년 3월 10일 

초창기 제주신보의 내용을 살펴보자. 1947년 들어서는 ‘羅針盤’, ‘民聲’ 등의 고정란도 설정하였다. 주요사설을 살펴보면 ‘死境의 活路-신년을 맞이한 소감’(1.1), ‘翰林事件’(1.10), ‘貿易港의 문제’(1.26), ‘謀利輩 天下인가’(1.28), ‘포츠담선언 2주년 기념일에 際하야’(7.28) 등이다.   특히 신년사 ‘死境의 活路-신년을 맞이한 소감’에서 ‘전후 양대 세력의 대치로 38선이 설정되어 우리에게 치명상을 주고 있으므로 우선 국토를 찾은 후에 정책투쟁을 감행해야 이치에 당한 일이며, 극단자의 정치이념은 朝鮮의 현 단계에 적합지 못한 것’이라고 쓰고 있다. 

신년사에 국호를 ‘조선’으로 표기하고 있음은 통일국가의 의미로 호칭한 것이다. 특집으로 중앙정계인사들의 신년사를 실었는데 남로당 위원장 허헌(許憲)의 ‘民主獨立 위해 分身碎骨’이라는 글에서 ‘조선인민은 인민위원회를 지지하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로서 지배되는 남조선의 정치를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군정관 대리 헬멕 대장, 입법의원 의장 김규식(金奎植),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 한민당위원장 김성수(金性洙), 민전 김원봉(金元鳳), 제주도지사 박경훈(朴景勳), 제주도미군정청 공보관 케리 대위의  신년사도 함께 싣고 있다.

3·1사건이 발생된 후 도청직원을 비롯하여 도내 곳곳에서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중둥학교 학생들까지 나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요구조건도 내걸었다. △발포한 책임자 강동효(姜東孝) 및 발포한 경관을 살인죄로써 즉시 처형하라 △경찰관계의 수뇌부는 인책 사임하라 △피살당한 유가족에 대한 생활을 전적으로 보장하며 피상자(被傷者)에게 충분한 치료비와 위로금을 즉시 지불하라 △경찰의 무장을 즉시 해제하라 △경찰내의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즉시 축출하라 △3․1사건에 관련되어 피검된 인사를 즉시 무조건 석방하라 △경찰의 학원간섭 절대 하지 말라 △교원과 생도의 최저의 생활을 보장하라 △국립대학안(國立大學案)을 즉시 취소하라 △고문한 경관에 대하여 철저히 처형하라 △교정과 관사를 반환하라 생도합동대책위원회 

특히 제주신보는 1947년 3월 10일자에 ‘3‧1사건 희생자 유가족 조위금(弔慰金) 모집’이란 사고(社告)를 내고 6월 18일 마감했다. 이 사고는 “그들 희생자는 독립의 영광도 얻지 못한 채 천고의 원한을 남기고 무참히도 쓰러졌다”는 글귀에서 풍겨주듯,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같은 모금 취지문은 경찰의 정당 방위론과는 배치되는 내용이다.  

이 모금운동은 전도적으로 확산됐다. 조위금 첫 기탁자는 고석조(高碩祚, 제주읍 일도리) 1만원이고, 서울 제우회(濟友會)에서도 5만원을 모금하여 보내왔다. 각 직장에서, 학교에서, 시장에서 조위금이 모아졌다. 3월 14일자에는 “대정면민이 인민위원회에 기탁한 성금만도 3만 원을 돌파했다”고 보도, 대정인민위원회에서 그 지역 모금운동을 주도했음을 시사한다. 

모금운동에는 우파계열 유지들도 참여했으며, 강인수 감찰청장과 일부 응원경찰도 성금을 기탁했다. 또 서울 제주도민단체인 ‘서울제우회’에서 50,000원을, 광주 제주도민단체인 ‘광주제우회’에서 23,025원을 보내왔다. 그 해 6월 모금운동이 마감할 때에는 기탁된 조위금이 317,118원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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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0선거 후 제주해안에 나타난 미구축함.

김호진, 그는 누구인가

‘신문기사 관계로 八월초 이래 경무부수사국에 검거되어 최조 중에 있던 독립신보 주필 고경흠(高景欽)씨와 동기자 김호진(金虎振)씨는 불기소로 二十三일 오후 석방되었다. 그리고 동사장 장순각(張洵覺)씨는 아직 조사중에 있다고 한다.’-경향신문 1947.8.24

‘친애하는 장병, 경찰관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펴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이 피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부리를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말라. 귀한 총자 총탄알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제주도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 쫒겨내기 위해 매국노 이승만 일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임민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의 포고문

김호진(金昊辰, 1920~1948)은 해방정국의 언론인이다. 서귀포 출신으로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해방이 되자 귀국하였다. 동년 11월 진보적 성향의 청년들이 ‘白鹿會’(회장 鄭基俊)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그 사업으로 백록일보(白鹿日報)를 창간하였다. 창립멤버로 김호진·조수인(趙壽仁)·정기준(鄭基俊)·고봉효(高奉孝) 등이 주도하여 제주시 두목골에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타불로이드판 2면으로 창간호를 발간했으나, 결국 재정난으로 제주신보와 통합하게 되었다. 

제주신보가 자유주의적 노선의 신문인 데 반하여 백록일보는 진보주의 성향의 신문이었다.  해방 이후 신문은 공산주의 계열의 신문, 보수우익 계열의 신문, 진보주의 계열의 신문으로 나눌 수 있겠다. ‘백록회’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등의 정치노선에 동조한 단체였다.  

몽양이 피격될 당시 제주출신 고경흠(高景欽)이 그 옆자리에 있었다. 몽양은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괴한에 피격되었다. 범인 한지근(韓智根)이 몽양이 탄 자동차 앞 뚜껑 위로 올라가 권총 두 방을 쏘았다. 그는 백의사(白衣社) 멤버였고, 백의사는 1945년 월남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반공주의적 청년단체였다. 

여기서 주목할 사람은 몽양을 따랐고, 몽양 옆에서 죽음을 목격한 제주출신 고경흠이다. 그는 독립신보 주필이며 건국준비위원회 간부였다.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며 몽양과 가까워졌다. 1946년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의 특사로 평양에 가서 최고 수뇌부와 회담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월북하여 조선노동당 중앙후보위원이 되었으나, 1963년 숙청되었다.

자주독립을 바탕으로 한 겨레의  통일을 위하여 애썼던 고경흠은  일본 동경에서 <노동자신문>과 <현계단>을 찍어내었고, <전기(戰旗)> <인터내셔날> <무산자> 같은 잡지를 펴낸 문필가이기도 하였다. 그가 쓴 글 가운데 한 편이다. 독립신보 1947년 3월 26일치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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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
“해방 후 유쾌할 것이라고는 그리 찾아볼 수 없는 우리네 살림살이와 국제적으로 몇 번이고 약속되었던 조선독립은 미소의 의견 불합으로 여지껏 공위가 열리지 않고 국내의 모든 공장은 모리배와 원료 부족 등으로 파손 내지 정지 상태에 있고 쌀값과 모든 물건값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듯 선량한 인민과 월급쟁이들을 울리고 있으며 광목 고무신이 우리네 살림에 가장 긴요한 것인데도 거리에서 광목 한 자 볼 수 없고 고무신이라고는 노인네 뱃가죽 같은 한번 신으면 찢어져 없어지는 것이다. 해방이 됐다고 고국에 돌아온 전재 동포들은 움 속에 있게 되고 단간방이라도 제 집을 지닌 사람은 해방 후 창호지 하나를 똑똑이 못 바르고 그날그날 밥걱정과 원인 모르는 테러와 공포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백록일보는 제주신보 제작진들의 제안으로 두 신문이 통합하였다. 백록일보 제작자들은 제주신보에 입사하여 1946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신문편집을 둘러싸고 제주신보파 기자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많았다. 

4·3의 회오리는 언론계에도 몰아 닥쳤다. 1948년 10월 24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李德九)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이 제주신보사에서 인쇄되고 뿌려진다는 정보를 서북청년회가 입수하였다. 경찰은 기자들을 잡아들였다. 김호진 편집국장과 공무국장, 공무국차장 등이 군 당국에 구속되었다. 

또 제주신보 창간멤버였던 박광훈(朴光勳)이 일본으로 밀항하다가 조천포구에서 검거돼 김호진과 함께 수사를 받았다. 군 당국은 박광훈을 ‘좌익활동을 하다 밀항하려던 자’로 결론 짓고 그를 처형키로 했다. 박광훈은 1948년 11월 17일 군계업령 하에서 군재판에 회부됐으나 무죄판결을 받았다.

김호진은 수재로서 시를 즐겨 쓰는 문학청년이었다. 키가 작았고 눈이 아주 나빴다. 농업학교로 끌려가서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안경이 없으면 봉사나 다름없던 사람인데 안경테도 없이 안경알 한 개를 겨우 실로 묶어 매달았다. 김호진은 삐라 인쇄 후 신변이 노출될 기미가 보이자 입산을 시도하다가 잡혀 농업학교로 끌려왔다. 김호진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거구의 송요찬 연대장이 왜소한 김호진을 구둣발로 마구 차니까 김호진은 곧 초주검이 됐다. 김호진은 그해 10월 31일에 처형당했다.

서청이 제주신보를 접수한 시기는 2연대 주둔기인 1949년 2월 혹은 3월 초순경이다. 제주신보 ‘박경훈 사장․김호진 편집국장’ 체제가 무너진 것은 1948년 10월 말 무장대삐라 인쇄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즉시 서청에게 접수되진 않았다. 그 사이에 ‘김석호(金錫祜) 사장․김용수 편집국장’ 체제가 약 3~4개월간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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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이 암살당한 혜화동로터리. 고경흠이 당시 현장에 있었다.

제주4·3에 대한 당시 사회단체 성명서

△전국노동조합전국편의회 : “제주도 인민들의 이번 이 절규야말로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거룩한 구국애족정신의 성화(盛花)요, 가장 정당한 투쟁으로서 최대의 영예와 찬양을 받아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 경찰대를 동원하여 토벌을 감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방경비대 심지어는 미 군대까지를 동원하려고 하여 대규모적으로 제주도 인민들을 살상하려함에 이르러서는 단호코 묵과할 수 없다. 우리 조선과 인민들은 미국에 선전 포고한 일도 없고 적국도 아니다. 토벌 행위는 미국의 적국에 가서나 하라! 우리 조선민족은 그런 꼴을 미국인들로부터 받을 필요도 없고 또 미국인들이 우리 조선인민들에게 그렇게 할 하등의 권한도 없다. 살상 행위를 즉시 중지하라! 단선단정 음모를 포기하라! 미소 양군은 즉시 철퇴하라! 우리는 통일 민주 독립을 원한다! 제주도 인민들의 절규는 우리 3천만 동포의 부르짖음이요 성스러운 구국투쟁이다. 여하한 무력으로도 우리 조선인민들의 지향과 요구를 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전평(全評)은 전 노동자, 사무원, 대중과 더불어 비인도적인 토벌행위에 대하여 엄중 항의하고 그의 즉시 중지를 강경히 요구한다.”

△전국민주애국애국청년총동맹 : “지난 3일 제주도에서는 단선 등록을 강요하려는 폭압에 반대하여 궐기한 애국 인민에 대하여 각하의 경찰을 대량 파견하여, 이 애국인민을 모조리 닥치는 대로 탄압하고 있다. 이는 단선을 거부하는 애국인민들을 멸족하려는 가공할 사실이다. 또한 이는 5월 10일 강행되려는 매국단선 투표의 서곡이라고도 할 것이다. 우리 민애청은 참을 수 없는 격분으로 항의하는 동시에 이 원한의 피로 물들인 애국인민의 뜻을 받들고 어떠한 폭압이라도 이를 박차고 단선 투표를 분쇄하고 통일 조국의 민주독립을 완수하려는 결의를 피력한다.”

△근민당 : “단선을 반대하고 조국의 민주통일을 기하는 것은 조선민족의 지상명령이며 이를 위하여 일어난 제주도민들의 4월 3일 투쟁은 타당한 것이다. 우리 당은 전민족의 이름으로 즉시 당국의 조치를 즉시 정지할 것을 항의한다.”

△전국농민회총연맹 : “지금 제주도에서는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가 살상당하여 넘어지고 있다. UN조위 감시하의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4월 3일 일제히 일어난 애국인민들에 대하여 총과 탄환은 어느 나라에서 누가 가져온 것인가. 죽어도 잊을 수 없다. 제주도인민은 일찍이 일제시대에도 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싸워왔으며 거년 3월 13일 투쟁에서도 용감하였었다. 우리 전 인민들은 멀리 고도에서 무수한 희생을 무릅쓰고 싸우고 있는 제주도 동포들을 구호하자. 제주도 인민의 싸움은 곧 우리 인민의 싸움이다.” 

△교협(敎協) : “현하 제주도 인민들은 왜 봉기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위정자는 이것을 반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인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 유혈케 하는 것이다.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며 인민의 생존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연극동맹 : “제주에서 발생한 인민봉기는 조국의 난관을 구하고자 감연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일부 소수분자의 책동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전도 재래의 조선인민의 자발적 의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음악동맹 : “자유분위기를 선전하여 민주주의 선거를 표방하는 단선에 대하여 이것을 반대한다고 해서 무수한 인민이 살상 당하였다는 보도가 있는 것은 중세기적 전제 폭압이다. 우리 조선음악동맹은 전국 조선인민과 더불어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민주주의민족전선 : “제주도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우리 민전에서는 전 인민의 의사와 절실한 요청을 대표하여 사건의 진상을 구명하고자 각계를 망라한 강력한 조사단을 파견할 것을 결의하고 군정 당국과 누차의 교섭을 전개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들의 노력에 대하여 정의있는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 민전대표 최태용(崔兌龍)씨는 27일부터 연일 교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일에 이르기까지 언(言)을 좌우하여 책임자와의 면담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당국의 무성의한 처사는 조선인민의 중한 투쟁을 묵살하여 버리려는 배짱 이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당국의 무성의에 대하여 항의하는 동시에 고립무원의 제주도 인민의 염원을 승리로 달성하기 위하여 전 조선인민은 조국의 주권을 방위하고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전취하기 위한 투쟁에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바이다.”

△문련(文聯) : ”제주도에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피를 흘렸는데 다시금 대량적으로 경찰과 경비대를 파견하고 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제주도의 형제자매에 대한 동족상잔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남북통일과 자유와 정의와 삶을 갈망하는 제주도 인민의 요구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무력으로 하려 하므로 우리는 묵과할 수 없으므로 제주도에 대한 살육을 즉시 중지할 것을 10만 문화인은 3천만 인민과 함께 강경히 요구한다. 나아가서 이와 같은 제반문제는 남북통일의 중앙정부 수립에 있음은 재언할 필요도 없으므로 우리 문화인은 이 성스러운 투쟁에 적극 참가하여 왔으며 앞으로도 이를 위하여 매진할 것을 엄숙히 성명한다.”

△민주한독당 : “제주도인민의 봉기를 단순한 파괴를 위한 폭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여 전도는 거의 황폐화되었는데 또다시 무장경관을 증파하여 ‘근본적으로 소탕’ 운운하니 본당은 애국적인 동족을 한사람이라도 희생시킴을 참을 수 없어 3천만 인민과 더불어 즉시 여사한 행위를 중지할 것을 강경히 주장한다.”

△민주여맹 : “우리는 동족상잔의 죄악을 절대 용인할 수 없다. 우리는 전 여성의 이름으로 이를 단연 배격하여 제주도의 토벌 즉시 중지를 강경히 요구한다. 우리 인민들은 외군을 철퇴케 하여 조국의 통일독립과 자유를 쟁취함으로써 멸족적 동족상잔을 막아내야 할 것이다.”
 
△서울 제주도출신 유학생 일동 : “조국이 통일이냐 분열이냐,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이때 단선 단정을 반대하고 쓰러져 가고 있는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를 묵살하겠습니까? 우리 부모와 형제를 구출해 주십시오. 조국을 사랑하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본능일진대 나라 잃고 부모형제를 잃게 되면 우리만 살아서 무엇하리오. 단선 분쇄에 나갑시다. 동포들이여. 조국을 위기에서 건져내는 유일한 길인 단선 분쇄 전열에 다같이 섭시다.”

제주신보와 서청의 갈등

1948년 10월께부터 토벌당국은 언론인에 대해 협박과 테러를 가하더니 급기야는 농업학교에 구금, 처형했다. 맨 먼저 경향신문 제주지사장인 현인하(玄仁廈)가 잡혀가 처형당했다. 뒤이어 서울신문 제주지사장인 이상희(李尙熹)가 끌려가 희생됐다. 제주읍내의 유명한 모자점인 갑자옥(甲子屋) 사장이기도 한 이상희는 무장대 총책이었던 김달삼과도 친척간이었다.

특히 무장대삐라 인쇄사건으로 제주신보는 서청에 강제로 접수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1948년 12월 25일 서북청년회  김재능(金在能)이 제주신보를 강제 접수하고 김묵(金黙)을 편집국장에 앉혔다. 후에 영화감독으로 이름이 알려진 김묵은 당시 서청 특별중대원으로 성산포에 근무하고 있던중 발탁된 것이었다. 김석호 사장은 강력히 항변하엿으나 무수히 폭행을 당하고 김용수 편집국장도 한밤중에 연행되어 고문 받았다. 

1949년 초 2연대 2대대(대대장 李錫鳳대위)의 주도아래 경찰, 서청, 대청이 총동원된 ‘봉개작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다며 신문사에 불만을 표시했다. 

하루는 서청대원들이 신문사에 들어와 김석호 사장을 구타했다. 김용수는 집에서 잠을 자던 중  서청원들에게 끌려갔다. 김재능 단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능은 키가 6척이나 되는 장신으로 콧수염을 길렀고 일본놈들이 신던 긴 가죽장화를 신고 다녔다. 그는 워낙 악명이 높아 큰 키에 휘적휘적 걸어 다니는 모습만 봐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김용수를 무조건 구타했다. 그냥 구타가 아니고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초주검이 되자 김재능은 ‘데려가 처리해!’라고 말하고, 김용수를 일단 경찰서 유치장에 가뒀다. 곧이어 차를 구해온 서청은 김용수를 태우더니 아라리 쪽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박성내 부근에 이르자 갑자기 차 바퀴가 펑크가 났다. 서청원들이 내려 수리하느라 시간이 좀 지체됐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군인 지프가 오더니 김용수를 내리게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가족들이 김용수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함병선(咸炳善) 연대장이 장호진(張好珍) 부연대장을 시켜 김용수를 구출토록 한 것이다. 함병선은 김용수에게 군복을 입히고 편집국장 대신에 선무공작을 하도록 지시했다.  1949년 10월 12일 계엄령이 해제되자 김석호 사장은 경영권을 회복하였다. 

한편 함병선 2연대장은 왜 군 홍보지의 역할에 충실하던 제주신보를 서청이 접수하도록 방치했을까. 물론 서북청년단은 군을 의식했다. 하지만 민간인인 김용수를 몰래 죽여놓고 나서 ‘그는 빨갱이였다’라고 말하면 그만이던 세상이었다.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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