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84) 노일저대구일의딸 여성2

개인적인 삶의 추구가 확대되면서 사리사욕에 눈이 밝은 노일저대를, 이제는 우리 모두의 분신으로 스스럼없이 내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최근에는 공명심, 명예, 정의, 승리와 같은 가치들이 찬미되지도 않지만 그 반대편의 양보, 희생, 조화 등의 가치가 찬미되고 있지도 않다. 돈에 대한 욕망에만 파묻혀 나눔과 협력, 공감과 감동이라는 사회적 감수성들을 본 적도, 들은 적도, 해 본적도 없으니 염치없고 강퍅한 세상이 되어 가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제 그녀는 음지에만 있지 않다. 구석진 음지에서 자랄 수 있었던 노일저대의 단순성, 자기중심성, 이기심, 시기심, 허영, 이중성 등의 성향들은 이제는 떳떳하다 못해 매혹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도 많다.

옛날 노일저대 어머니는 보통 자신의 것이라 불리는 것들을 포기하고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최고의 남편과 아이, 친구, 회사를 원하며 동시에 자신도 최고가 되고 싶어 했다. 
가사와 양육, 패션과 요리, 일에 대한 전문성의 확보, 남편의 성공을 위한 눈웃음까지 모든 것을 이뤄내기 위하여 그녀는 매일 많은 재주를 부렸다. 육아와 가사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투자를 그녀는 한 치 의심도 없이 활기차게 해냈다. 자신들의 아이가 일등 성적표를 받아오도록 하기 위해, 최고의 대학에 합격시키기 위해 그녀는 발이 붓도록 아파트 아줌마들을 만나고 정보를 검색하고 학원과 족집게 과외 선생을 찾아 나섰다. 남편의 셔츠에 수트를 맞추고 커프스를 챙기고, 남편 상사의 집에 김치를 담아가면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축지법도, 순간이동도 할 줄 아는 지 미용실에도 가고 마사지도 받고, 코도 훌쩍 고치고, 자신의 취미나 사회활동도 양보하지 않았다. 커피, 와인, 클래식, 악기, 운동 등등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충분히 익히며 자신의 커리어를 확장시키는 것도 필수였다. 슈퍼울트라 그녀는 정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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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더우먼! 슈퍼 히로인 / Wonder Women! The Untold Story of American Superheroines 크리스티 게바라-플래너건 /USA/Documentary/201/62 min. 시대적 변화에 따른 여성 히로인의 등장, 독립적이고 파워풀한 여성들의 대중적 재현이 사회와 어떤 관계에 있는 지.(사진 제공/ 제주여성영화제).

그녀의 적극성, 타인과의 경쟁심, 꼭 이기고 말려는 승부근성, 새로움에 대한 추구, 최고를 향한 매진, 생동감과 강한 추동력을 만들어내는 욕망, 그리고 이 모두를 위한 가상할 정도의 노력들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고 엄청난 잠재력이기도 했다. 슈퍼울트라 그녀가 칭송되어졌다.  

이 욕망의 총량이 결국은 세상의 1퍼센트에게만 실현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의 욕망은 하염없이 빙글빙글 돌면서 높고 넓게 번져나가는 나선처럼 그 안에서 그녀를 헤어 나올 수 없게 했고, 사회에 역동성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오히려 사회를 아주 무력하게 만들어 놓는데 일조했다.  

돈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는 사회, 좋은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취업이 안 되는 사회, 예쁜 것이 최고인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모두들 돈과 자격증과 예쁨을 욕망한다. 나쁘지 않다. 당연하다. 문제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모두들 돈, 대학, 외모를 욕망하면서 돈의 가치도, 대학의 가치도, 외모의 가치도 오히려 무력해지고 있는 상황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돈은 나를 풍요롭고 편리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늘 나를 초라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있고 너나없이 가는 대학, 너나없이 해대는 성형은 대학과 외모의 가치들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많고 많은 욕망 중에 돈에만 욕망이 집중되어 있는 사회, 많고 많은 예쁨 중에 외모만이 잣대가 되는 사회는 그 자체로 다양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개인성의 무시가 만연한 전체주의적 사회에 가깝다.

세상의 일들은 구성원들의 욕망과 이익을 잣대로 풀어보면 명쾌해진다. 하지만 돈이라는 하나의 잣대, 거기에 1퍼센트만 합치된 세상이 제대로 납득될 리 없다.

욕망은 사람의 숫자만큼 존재하나 그 실현은 1퍼센트에게만 가능하니 사회 자체가 허무해지고 무력해져 갈 것은 당연해 보인다. 어느 샌가 대단하고 멋진 여자로 칭송받으며 등장했던, 위의 슈퍼울트라 우먼 역시 재력과 외모와 능력까지 갖춘 1퍼센트를 향한 돌진이 되었꼬, 개그 희화화 되었다. 지배 논리에 의해 왜곡된 변종의 구성물이 된 그녀는 열심, 열심이었으나 유통기한이 끝나 허무해졌고 무력해졌으며 그녀들이 집단 내에서까지 비판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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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네이버블로그 just6063(http://teresainfortworth.wordpress.com.2011. 10. 09. Occupy Wall Street- What Happens to the Money that's being Don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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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월가 시위. 2011. 9.`17.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 sanghui80)

그녀의 긍정성은 삶을 애착하고 그 삶을 열심히, 열정적으로 산다는 것에 있다. 그녀를 열정적으로 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욕망이다. 열심히 살아도 얻은 게 없었던 그녀는 슬슬 화가 나고, 자신의 욕망에 반하는 것들 모두를 헐뜯고 1퍼센트에 골인하려 체면도 양심도 없이 덤비는 모양이 되기 쉽다. 꿈을 키우고 열심히 참고 살면서 어서 여기로 오라 유혹하고 있지만 1퍼센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세습까지 가세해 그 길에 끼어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욕망들이 내부의 역동적인 반란성을 잃어버리고 아주 얌전하게 무비판적으로 가라앉아버리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욕망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다가 좌절되면 욕망을 가졌던 것은 나 자신이니 내 탓만 한다.

그녀가 해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욕망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 스스로를 파괴시키지 않는 일이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할 것만이 아니라 단지 1퍼센트의 사람만이 욕망을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체제와 구조를 인식하는 일이다. 열심히,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왜 나의 욕망은 실현될 수가 없는 것인지, 왜 나는 가지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해 연대해서 화를 내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진정한 가능성은 욕망을 욕망하여 1퍼센트에게 농락당하고 스스로 파괴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99퍼센트와 함께 유쾌하게 힘을 모으는, 욕망의 연대를 욕망하는 데 있다.(노일저대 끝./ 계속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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