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29) 강경 토벌작전으로 선회한 윌리암 F. 딘 

윌리암 F. 딘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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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암 F. 딘
‘【서울발 5월 6일(연합)】 한국의 원로 정치가 김규식은 오늘 ‘타락’한 남한의 미국 행정부를 비난하면서 다음 주 월요일 남한에서 실시될 유엔 후원의 선거를 반대하였다. 한국의 가장 영향력있는 정치가로서 중도우파인 김(규식)은 미국인들을 40년 동안 한반도를 통치했던 ‘부정직한 일본인들’과 비교한 반면 소련의 점령 업적을 칭찬하였다.

김(규식)의 발언은 남한 과도입법부의 의장으로서 그를 직접 선택한 미군정당국에게 특별히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가 후원하고 북한에서 열리는 한국통일회담에 참석하기 위하여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김(규식)은 어제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월요일에 있을 선거가 분단을 고착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선거를 반대한다고 말하였다. 만일 선거가 실시된다면 한국은 결국 소련연방의 일원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김(규식)은 북한에 있는 한국의 공장들은 미국점령지에 있는 것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가동되어 생산품을 산출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러시아인들에 대하여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다”고 칭찬하였다. 남한에서 미국인들은 “너무나 많은 간섭을 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많은 부패가 현재 (미국) 군정에 존재하고 있다고 김(규식)은 비난하였다. 일제통치 40년동안 한국인들은 부정직한 일본인들과 일하는 것을 배웠는데 이제 이들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이용하여 부패를 돕도록 미국인들을 이용하고 있다” “몇 명의 미국인들은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북한에서 열린 회담은 만장일치로 소련과 미국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어제 밤 7사단에서 빈 미군 막사를 파괴시킨 화재는 “아마 고의로 시작된 것 같다”고 프레드 오픈쇼우(Fred Openshaw) 대위는 보고하였다. 그는 막사가 “갑자기 하늘로 치솟는 것 같았다”고 말하였다. 부상자는 보고되지 않았다. 만일 방화로 증명된다면 그것은 남한의 미국재산에 대한 지금까지 파괴 중 가장 악명 높은 파괴가 될 것이다.

오늘 일찍 윌리엄 딘(William Dean) 소장은 제주도를 방문한 후에 북한 공산군대의 요원들이 선거에 반대한 테러리즘 작전에서 게릴라들을 지휘하기 위하여 제주도에 상륙했다고 보고하였다. 4월 2일 이래 미국 점령지역으로 제주도에서 유혈 폭동와중에 60명이 살해당했다.‘-『워싱턴포스트』 1948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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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윌리엄 F. 딘(William Frishe Dean, 1899년~ 1981년)은 미국 일리노이주 칼라일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서 공부하며 ROTC로 훈련받았고, 1923년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당시 극동군에 배속되어 활동하였고, 그 후 연대장으로 활약했다.

1945년 9월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자 파견되었고, 2대 군정 장관 러치가 갑자기 병사하면서 군정장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4․3이 발발하자 제59군정중대 민정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수신: 제59군정중대, 민정관(Chief Civil Affairs Officer)1. 귀관은 제주도의 상황에 정통하다. 2. 4월 18일 제주도에 도착한 두 대의 L-5 연락기는 귀관의 지휘 하에 있다. 3. 한국 국방경비대 1개 대대가 추가로 4월 20일 오전 중에 제주도에 도착할 것이다. 도착 즉시 이 대대도 현재의 다른 한국 경비대와 같이 귀관의 작전통제 하에 놓일 것이다. 4. 귀관은 제주도의 폭도들을 진압하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데 귀관의 수중에 있는 군부대를 이용하라. 5. 대규모의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귀관은 소요집단의 지도자와 접촉해서 그들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는데 모든 노력을 다 하라. 6. 경비대의 작전에 의해 붙잡힌 포로들은 경찰에게 인계하지 말라. 그들을 경비대가 마련하고 보호하는 막사에 수용하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본토로 후송하도록 조치하라.  7. 일일 상황보고를 무선통신으로 본부에 보고하라. 군정장관 미육군 소장 윌리엄 딘(William F. Dean)’-1948년 4월 18일/주한미육군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FIK) 일반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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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을 통해서 귀환하는 딘 (1953년 9월 4일)
딘은 1948년 귀환하였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다. 한국 전쟁 참전 중 북한 인민군에 납치되어 평양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그는 맨 처음 투입된 미8군 제24사단을 맡았고, 대전전투에서 전선의 맨 앞에 나아가 3.5 인치 바주카로 T-34 탱크를 사냥하였다. 3.5로켓포 반을 지휘하면서 최선을 다했으나, 34연대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그는 34연대의 마지막 소대와 함께 50여 대의 차량을 이용하여 시계를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매복한 북한군에 의하여 공격을 당하여 차량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그가 탄 지프는 길을 잘못 들어서서 본대와 분리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있는 병력은 미군의 전선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는 함께 가던 부상병에게 물을 떠다 주기 위하여 어둠속에서 물을 찾아 계곡을 내려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신하였다. 

무주, 진안 근처에서 헤매던 그는 박종구의 도움을 받아 피할 수 있었으며,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운산리에서 한두규의 밀고로 북한군에 생포되었다. 한두규는 경찰에 체포되어 1954년 9월 23일에 “불법체포죄”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나, 그는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는 1953년 10월 4일까지 포로로 있다가 풀려났다.

딘 소장이 사로잡힌 기간 동안 북한군은 그가 장군인 것을 알지 못하였고, 그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계획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문으로 정보를 누출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미수로 그쳤다. 

딘 장군이 대전에 고립되어 있을 때 대한민국의 열차 기관사 김재현 등의 남한의 기관사들은 그를 구출하려고 시도했다. 김재현은 급수용 기관차에 미군 결사대 30명을 탑승시키고 이원역에서 출발하여 대전역으로 향했다. 세천터널에서 인민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작전은 실패하였으며 이때 김재현 기관사는 인민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그 이후 1953년 9월 4일, 딘 장군은 북한군 총좌인 이학구와 포로교환이 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돌아와 미6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거기에서 1955년 예편과 동시에 은퇴하였다. 그는 은퇴할 때 2차대전과 한국전의 참전한 공로로 육군 무공 훈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82세에 사망하여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국립묘지에 묻혔다.

‘【서울 UP특파원 발 조선】남조선 미군정장관 윌리엄 F. 딘 소장은 4월 2일 이래로 유혈폭동과 살인소동으로 사자 약 60명을 낸 제주도를 시찰하고 5일 밤 귀경하였는데 6일 기자들에게 그의 시찰결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북조선 공산군 간자(間者)가 5ㆍ10선거에 반대하는 테러전에 종사하는 게릴라를 지휘하기 위하여 제주도에 상륙하였다.

나와 남조선 관헌이 별개로 행한 조사는 다같이 외부 간자가 오해를 가진 청년들을 교사하여 선거찬동자를 살해하고 그들의 가족을 소각하게 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한 촌락은 두 부대가 양면에서 습격하고 있는데 이 두 부대는 철퇴하고 다시 합류하여 산중으로 퇴각하고 있는데 이 습격상태를 보건대 동 습격은 동도 내에 있는 북조선 군인이 무전으로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산중에는 200명 이상의 이단분자가 있다고 생각지 않으나 공산당계 신문들은 1만명이라고 측하고 있다. 나는 비행기로 동도 상을 비행하였는데 소산에 있는 폭도 7명 이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남조선 경찰관 2명은 일간 미국 군법회의에서 동도에서의 포학행위로 재판을 받을 것이다. 이들은 한 사람이 구타로 사망한 사건에 관련한 것이다.

동도 공산주의자 지도하 반란인들의 주요 요구는 선거를 중지하라는 것이다. 동도 치안 회복에 파견된 20명의 경관 중 반수는 5일간의 훈련밖에 받지 않았으며 이 결과로 지나친 행위를 하였을지 모른다. 제주도는 현재 평온 무사하다. 일중(日中)의 동도 평온상태를 보면 야중(夜中)에 다소 살인자들이 선량한 시민을 살해하는 것을 믿기 어려운 것이다.”’-우리신문 1948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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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4·3과 딘 소장 

‘민전에서는 제주도에 조사단을 파견키로 준비 중이라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이에 관하여 군정 당국의 양해와 신변보장 등에 관한 협력을 요청코자 민전 외교부차장 최태용(崔兌龍)씨는 지난 27일부터 연일 딘 군정장관과 면담코자 교섭하였으나 동 장관과 미인(美人) 비서는 조사단 파견 곤란을 운운하여 지난 30일까지 면회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한다. 이에 대하여 민전에서는 이와 같은 당국의 무성의에 대하여 목하 동도에 전개되고 있는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유감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5월 5일

‘지난 4월 초순에 발발한 제주도의 폭동은 그 후 당국의 선무진압 공적에도 불구하고 한 달이 지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어 총선거를 앞두고 금후의 추이가 주목되고 있는데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과도정부측에서는 소요사건의 실정을 시찰하고자 딘 군정장관과 조(趙)경무부장이 5일 오전 7시 비행기로 김포비행장을 출발하여 제주도 현지에 향하여 실정을 시찰 후 동일 오후 5시 경 귀착하였는 바 제주도 소요사건의 금후 귀추는 각 방면의 심대한 주시를 받고 있다.’-조선일보 1948년 5월 6일

1945년 9월 8일 미군이 38선 이남에 진주하면서 또 다른 외세인 미국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딘 소장은 아놀드, 러취 등을 거쳐 1947년 11월 3일자로 군정장관에 취임하였다. 제주4·3은 딘 소장이 군정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발발했다. 

딘은 평화적으로 수습될 수도 있었던 4·3을 강경 토벌작전으로 선회케 한 장본인이다. 그는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토벌대 9연대장 김익렬 사이에 4·28평화회담이 성공리에 이루어진 바로 다음날인 1948년 4월 29일 극비리에 제주를 방문하였다. 

그의 방문 직후인 5월1일과 5월 3일에 경찰과 우익 청년단원들은 오라리 방화사건과 귀순자에 대한 발포 사건을 저지르면서 평화협정을 무위로 돌려놓았다. 미군은 오라리 방화사건을 지상과 공중에서 촬영하여 마치 이 사건이 무장대에 의해서 일어난 것처럼 조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5월 5일 딘 소장은 제주를 시찰한 후 "제주도 밖에서 온 공산분자들이 일부 청년을 오도하여 산에 가서 폭동을 일으켜 관리와 선거를 지지하는 자들을 위협 살해하고 있다"라며 4·3을 외지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된 폭동으로 몰아가려고 하였다. 곧 이어 그는 평화적 해결을 추진하던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대신 박진경을 그 후임으로 내세워 강경 토벌 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딘 소장의 두 차례에 걸친 제주방문은 미국의 입장을 관철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고 강경 토벌정책의 기초를 마련코자 한 것이었다. 4·3 당시 딘 소장의 행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진압작전 전과정을 통하여 한국정부의 군사작전 지휘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4·3 양민학살의 책임소재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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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연대 본부가 설치된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린 박진경 연대장 고별식에서 딘 군정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1948. 6. 18)

‘발신: 서울 정치고문관/수신: 국무부/ (전략) 4월 제주도에서 발생한 소요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때문이라고 사료됩니다. 군정장관 윌리엄 딘 소장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주로 이북출신들인 경찰과 최근 제주도에 들어온 청년단체 회원-이들 또한 주로 이북출신으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원으로-에 대한 제주 도민들의 적개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주 도민들은 분명히 모든 육지사람들을 싫어하며 남한사람들이 싫어하듯이 북한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바꿔 말해 자신들이 역사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제주 도민들은 이방인들이 치안을 맡거나 간섭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경찰력을 원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공산주의 선동가들은 이러한 적개심을 간파하고 제주도에 출현해서 자신들의 대의 명분을 위해 나쁜 상황을 극대화시키고 있습니다.(후략) 제이콥스(Jacobs)’-1948년 5월 4일 <항공우편> A-58/주한미육군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FIK) 주한미육군 고문관실(American Civilian Advisory Group, USAFIK)

‘1. 시민 소요: (a) 포상금(Blood Money): 북한 노동당(The North Korean Labor Party)은 남한 경찰들을 죽인 세포들에게  포상금으로 경감 100만엔, 일반경찰 20만엔을 걸었고 그 외 중간 계급의 경우도 차등적으로 지급했다. 남한 경찰 표식과 계급장은 북한노동당에서 각기 10만엔의 가치로 인정되었다.   (2) 제주도, 1948년 5월 1일~30일: 공산주의자가 선동한 민간인 소요는 미 구축함에 반란 진압 원조를 요청한 5월에 제주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정보요약> 제2105호). 5월 10일 사태를 제외하고 5월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간인 소요 관련 일부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오라리 1948년 5월 1일: 폭도 50명이 마을을 공격하여 남자 2명, 여자 4명 피살/ Pyung 1948년 5월 1일: 선거관리위원장 피살/ 화북리 1948년 5월 5일: 선거관리위원장, 남자 1명, 여자 1명 피살/ 삼양리 1948년 5월 5일: 대동청년단원 2명이 폭도들에 의해 피살/ Mul Rumgw 1948년 5월 6일: 파출소 공격 중 폭도 1명 사망/ 하귀리 1948년 5월 12일: 폭도 300명의 경찰서 공격으로 폭도 1명 사살/ Kan Oon 1948년 5월 12일: 폭도 30명의 마을 공격으로 1명 사망/ 송당리 1948년 5월 12일: 대동청년단원 2명이 공산주의자에게 피살/ 함덕리 1948년 5월 13일: 폭도 300명의 마을 공격으로 경찰 1명과 민간인 2명 사살, 2명 부상, 경찰 5명 행방불명./ 한림리 1948년 5월 14일~15일: 폭도들의 마을 공격으로 폭도 5명, 여자 1명, 경찰 1명 피살./ 수산리 1948년 5월 16일: 폭도 80명의 마을 공격으로 폭도 1명 사망/ 오등리 1948년 5월 16일: 폭도 1명 피살/ 대정면 1948년 5월 17일: 연합청년당 의장이 18명의 폭도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총에 맞아 죽은 사체로 발견됨./ 고산리 1948년 5월 23일: 폭도 3명 사망/ 모슬포 1948년 5월 21일: 경찰 3명과 남자사환이 경비대 탈영병에 의해 피살./ 송당리 1948년 5월 21일: 경비대, 폭도 7명 사살/ 표선리 1948년 5월 21일: 폭도 5명의 마을 공격으로 민간인 1명과 폭도 4명이 사망/ 오등리 1948년 5월 21일: 폭도들의 마을 공격으로 폭도 4명 사망, 경찰 1명 부상/ 하귀 1948년 5월 21일: 경찰, 폭도 4명 사살/ 토산리 1948년 5월 23일: 폭도 30명의 마을 공격으로 민간인 1명, 민보 단원 1명, 폭도 15명 사망/ 연동 1948년 5월 19일: 폭도들에 의해 경찰 가족 5명 피살/ 신평리 1948년 5월 25일: 경찰 1명 피살/ 서홍리 1948년 5월 25일: 폭도 10명의 마을 공격으로 사망 3명, 부상 3명/ 사계리 1948년 5월 27일: 경찰과의 교전에서 폭도 3명 사망’-1948년 7월 7일/48년 5월 제주도 소요상황/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군사정보국 정보요약(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Intelligence Summary)

‘1. 민간 소요: (a) 일반사항: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한 폭력행위는 3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던 5월 이래로 눈에 띄게 감소하였다. 경찰의 효과적인 대처와 소련의 지배를 받는 정당의 지도자들이 조직이 재편성될 때까지 활동을 최소화하라는 명령으로 인하여 시민 소요와 폭력사태로 인한 죽음이 감소되었다. (b) 우익집단 간의 알력: 우익 청년단체간의 알력이 8월 15일 일부 대동청년단원들이 서북청년단 본부를 공격하는 것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이 충돌로 양측 청년단원 일부가 부상당했다. 사건과 관련된 모든 서북청년단원들과 40명의 대동청년단원들이 체포되었으나 다음 날 석방되었다. (c) 사건요약 1948년 8월 1일~31일: 8월 동안 남한에서는 약 25명이 폭력과 테러행위로 사망했다. 다음은 중요 소요사건에 대한 요약이다:
서광리 1948년 8월 2일: 경찰의 게릴라 50명에 대한 작전 중에 게릴라 2명 사살, 경찰 1명 부상/ 귀덕리 1948년 8월 4일: 무장 게릴라의 공격으로 서북청년단 1명 중상/Ongto 1948년 8월 14일: 경찰이 순찰 중에 매복해 있던 게릴라에게 습격 당함. 경찰 부서장급 1명 사망./Choju 1948년 8월 18일: 경찰이 게릴라를 사살함/협재리 1948년 8월 19일: 게릴라와 교전 중에 경찰 사망/김녕리 1948년 8월 31일: 30여 명의 폭도들에 의한 경찰지서 습격과 그에 응전하는 경찰의 교전 끝에 우익 저명인사 사망.’-1948년 9월 23일/제주도 소요 8월 상황요약/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군사정보국 정보요약(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Intelligence 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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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1951, 국립파리 피카소미술관

제주4·3 진압을 위한 최고수뇌회의

‘【서울 5일 발 합동】딘 군정장관, 안(安)민정장관 및 조(趙)경무부장 일행은 제주도 지방의 소요사건의 실정을 조사하고자 5일 상오 7시 김포비행장을 출발하였는데 동일 오후 5시경에 귀임할 예정이라고 한다.’- 동광신문 1948년 5월 7일

1948년 5월 5일 오전 12시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 참석자는 미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 딘 장군 전용통역관 등 9명. 회의 주제는 제주4·3의 진압에 대한 것이었고, 회의 결과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김익렬과 조병옥의 난투극이 발생한다. 

최천 경찰감찰청장은 4·3은 국제공산주의자에 의한 사전에 조직 훈련‧계획된 폭동이며 군‧경 대병(大兵)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철저하게 토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익렬 연대장은 무력 위압과 설득,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건의하였다. 그는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했으며, 제주도경찰을 자기의 지휘 하에 달라는 요구를 한다.

김익렬이 증거로 제출한 사진첩을 들여다보던 딘 장관은 흥분하여 사진들을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던져준다.  화가 난 조병옥이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면서 회의장은 난장판이 된다.

조병옥 :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요.”
김익렬 : “닥쳐라!”
조병옥 : “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 자는 자기 부친의 교화를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의 지령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요.”

딘 장군은 조병옥이 김익렬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설명하자 의심에 찬 눈초리로 김익렬을 쳐다봤다. 김익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설하는 조병옥에게 달려들었다. 김익렬은 주먹으로 조병옥을 끌어내 실랑이를 벌였고,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 조병옥은 숨을 못 쉬고 비명을 지른다. 딘 장군이 송호성 장군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고, 맨스필드 대령과 안재홍이 달라붙어 김익렬과 조병옥을 떼놓으려 하였으나, 김익렬 역시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김익렬 : “당신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송호성 : “이 놈 연대장! 누구에게 폭행을 하느냐. 네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
안재홍 : “연대장! 손을 놓으시오. 폭행을 멈추시오. 외국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

김익렬은 조병옥의 넥타이를 붙잡고 통역관에게 달려가 발길질로 음낭을 걷어찼다. 딘 장군은 대기 경호 중이던 미군헌병을 불러들여 장내 질서를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제주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딘 장관은 5월 6일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북조선 공산군 간자(間者)가 5ㆍ10선거에 반대하는 테러전에 종사하는 게릴라를 지휘하기 위하여 제주도에 상륙하였다. 나와 남조선 관헌이 별개로 행한 조사는 다같이 외부 간자가 오해를 가진 청년들을 교사하여 선거찬동자를 살해하고 그들의 가족을 소각하게 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한 촌락은 두 부대가 양면에서 습격하고 있는데 이 두 부대는 철퇴하고 다시 합류하여 산중으로 퇴각하고 있는데 이 습격상태를 보건대 동 습격은 동도 내에 있는 북조선 군인이 무전으로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우리新聞>, 1948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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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 연대장 피살

‘제주도 경비대 연대장 박진경 대령 피살의 비보에 접하여 18일 정오 공로로 급거 제주도에 내려간 딘 군정장관은 현지 사정을 청취한 다음 즉시 박대령의 시체를 싣고 동일 하오 7시 서울에 도착하였다. 동 시체는 서울에서 해부한 결과 진상이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20일

박진경 연대장은 1948년 6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의 진급은 딘 장군의 배려에 따른 특진이었다. 제주도민의 시각으로 볼 때는 ‘무차별 체포작전’이었지만 딘 장군은 이를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했다. 

동년 6월 18일 새벽 박진경이 그의 숙소에서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진경은 전날 진급 축하연에 참석해 술을 마신 뒤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던 중 이튿날 새벽 3시 15분경 M-1 소총 총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박진경은 그의 작전방침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한 달 사이에 수천 명의 ‘포로’를 양산해낸 박진경의 작전은 주민들을 더욱 산으로 도망치게 했고, 자신은 암살당함으로써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딘 군정장관은 박진경의 죽음에 크게 분노했다. 사건 즉시 군‧경은 물론 미군 CIC(방첩대), CID(범죄수사대) 요원들이 투입돼 조사를 벌였다. 연대본부에 근무하던 사병들은 모두 연병장에 집결한 채 조사를 받았다. 헌병들은 일일이 탄창과 총기검사를 해 탄알을 갖고 있거나 총기청소 상태가 불량한 병사들을 따로 집결시켜 조사했다. 특히 딘 장관이 대동하고 온 총포 연구자들이 11연대 장병들에 대한 일제 총기조사를 벌이는 등 철저한 조사가 이뤄졌다.

‘지난 18일 새벽 제주도 연대 숙소에서 암살당한 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朴珍景) 대령의 장의는 22일 오후 2시부터 서울 남산동에 있는 경비대사령부에서 부대장(部隊葬)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이날 장의식에는 통위부장을 비롯한 부대관계자와 유가족, 군정장관 딘 소장, 안재홍(安在鴻)씨 등 각계 인사 다수가 참석하였으며, 통위부 차장 송호성(宋虎聲) 준장의 고인을 추모하는 애끓는 조문 낭독에 참여자 일동은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경향신문 1948년 6월 23일

북제주의 선거 무기 연기키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서 북제주군의 갑·을 양 선거구는 선거반대파의 폭동으로, 중앙선거위원회에서는 당선무효를 군정장관에게 건의하였다. 딘 군정장관은 선거무효와 재선거에 관한 포고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 1948년 3월 17일부로 공포된 국회의원선거법에 의거하여 1948년 5월 10일 제주도 북제주군 갑 선거구와 동군 을 선거구에서 시행한 선거는 자(玆)에 무효임을 선포함. (2) 국회의원선거법 제44조에 의하여 국회선거위원회의 지휘 감독하에 1948년 6월 23일 전기 갑을 양 선거구에서 재선거를 실시할 것을 자(玆)에 지시함. (3) 전기 갑을 양 선거구는 반동분자의 방해로 전투표구의 반수 이상이 투표를 행하지 못하여 완전히 민의를 표현시켰다고 볼 수 없으므로 국회선거위원회와 협의한 후 해(該) 갑을 양 선거구의 선거를 무효로 결정한 바임.1948년 5월 24일/군정장관 미국 육군소장 윌리엄 F. 딘
 
딘 군정장관은 부득이 6월 10일 선거를 무기 연기하는 다음과 같은 행정명령도 발표했다.

‘제주도(濟州島) 재선거의 무기연기/제1조 1948년 3월 17일부 국회의원선거법 제44조에서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중앙선거위원회의 추천으로서 본관은 1948년 5월 10일 시행된 북제주도(北濟州島)의 갑구 및 을구 선거의 투표가 파괴분자의 행동과 폭력으로 인하여 해(該) 양 선거구의 5할에 미급(未及)한 투표구에 한하여 행하여졌기 때문에 1948년 5월 24일 무효를 선언하였음. 동시에 본관은 해(該) 양 선거구에서 1948년 6월 23일 재선거를 시행하도록 명하였음. 제주도에서 파괴분자는 공중치안과 질서의 교란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으므로 북제주도(北濟州島)의 갑구 및 을구의 선거인에 대하여 해(該) 양구(兩區) 인민의 의사를 진실히 대표할 수 있는 평화롭고 혼란없는 선거를 보장하기 위하여 본관은 자(玆)에 해(該) 양 지구의 재선거를 무기연기할 것을 명함. 제2조 본령은 공포일로부터 효력이 발생함.「남조선과도정부 행정명령」 제22호, 1948년 6월 10일.’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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