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듣는 희망의 전주곡
절망의 끝에서 듣는 희망의 전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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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와 정의, 표가 말하게 해야

2004년 3월 12일은 절망이었다. 87년 6월 시민항쟁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의 정신이 총칼 없는 백주의 쿠데타로 허물어지는 비명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절망을 희망이라고 고쳐 쓴다. 곳곳에서 희망의 새싹이 돋아나는 생명의 환희를 본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촛불을 밝혀 들고 전국의 거리거리에 쏟아져 나온 1백만의 인파, 그 해 초여름 유월의 뙤약볕 속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넥타이 부대' 그 역전의 용사들도 다시 뭉쳤다. 전라도에서 충청도에서 경상도에서 수구정치의 볼모였던 완고한 지역주의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희소식을 듣는다. 민의를 깔아뭉개고 '국민'을 팔아 물리적 폭력으로 관철시킨 그들만의 승리를 단죄하는 준엄한 심판의 소리를 듣는다.

또 하나 반가운 조짐이 보인다. 정통 냉전 수구세력으로부터 건전 보수세력이 이탈, 분리되는 조짐이 그것이다. 최병렬 전 대표는 그들이 건전 보수세력이라고 강변한다. 아니다 그들은 '보수'를 말할 깜냥이 못된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하지 않던가.

그들은 아직도 지역주의에 정치의 사활을 걸고 있을 뿐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냉전수구세력이다. 예기치 못한 탄핵안 날치기 가결의 거센 역풍과 된서리는 보수세력이 골수 수구세력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3·12 '한민련 정변'을 주도한 한나라당의 뿌리는 1980년 5월 민주화를 절규하는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그 여세를 몰아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주축이 된 민정당이다. 그 후 민정당은 3당 합당을 거쳐 민자당으로, 다시 오늘의 한나라당으로 옷을 바꿔 입었지만, 이번의 탄핵 쿠데타는 반민주 수구냉전이란 그들의 태생적 본질을 다시 한번 내외에 천명했다.

당사를 천막으로 옮겼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독재자의 딸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워 백팔배를 하며 이미지 정치를 시도한다고 해서 지난 날 그들이 뿌린 역사의 죄업을 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세 당이 야합해 민의에 정면 도전한 그들의 폭거는 달려오는 차에 슬쩍 몸을 부딪혀 돈을 뜯어내거나 보험금을 타내는 자해공갈단의 파렴치한 수법과 흡사하다. 도끼로 제 발등 찍어 상대편인 대통령과 여당, 국민들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우고 협박한 그들의 자해는 그 피해가 자신들만이 아니라, 나라 경제를 더 어렵게 하고 국가의 명예와 신뢰를 실추시켰다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이 더하다.

지금 돌아가는 형국으로 봐서 그들의 자해공갈은 미수로 그칠 공산이 커졌다. 가장 큰 범죄 대상인 대다수 국민이 그들의 야비한 속셈을 간파해버렸기 때문이다. 우국충정 운운은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 아닌가. 장독 깨고 장 쏟고, 판돈만 날려버린 황당한 도박판에서 그들은 지금 극심한 도덕적 아노미에 빠져있다.

서울 시청앞, 광화문에 모인 수십만의 탄핵 규탄 인파를 보며 급진 좌익세력이라거나, '어리석은 백성들'이라고 한탄하거나 '이태백' '사오정'들의 분풀이라고 침을 튀기는 당 지도부의 모습은 이젠 분노를 넘어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한다.

3·12는 절망이었으나 이제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전주곡을 듣는다. 모든 국민은 그들의 정치 수준 그 이상의 정치를 기대해선 안된다. 보름 앞으로 다가온 17대 총선은 주권자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배반한 그들만의 정치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똑똑히 보여줄 기회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민주인지 표가 말하게 해야 한다.

* 이 글은 3월 31일자 한라일보 한라칼럼에도 게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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