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전고투 끝에 폭동 완전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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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의 4·3칼럼> (31) 일본군 육군대위 출신 유재흥 사령관

유재흥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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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흥.
‘제주도지구에 잠복하고 있는 폭도를 완전히 섬멸코자 제주도 주둔 보병 제2연대본부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다. 전투사령관에 육군대령 유재흥(劉載興), 동 참모장에 보병 제2연대장 육군중령 함병선(咸炳善) 임명됨.’-육군 역사일지 3집(1949. 1. 1~1949. 8. 15)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설치/3월 2일

‘발신: 로버츠(Roberts) 장군/수신: 신성모 장관/다음은 오늘 우리가 토의한 내용의 목록을 귀하에게 고지하는 바입니다./제주도 병력의 본토 복귀/한국군 참모부는 현재 1개 대대(가급적이면 제2연대의 서북대대)를 본토로 복귀시킬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후에 추가로 제2연대의 1개 대대나 혹은 그 이상의 병력이 제주도에서 본토로 보내질 것입니다./서북출신 경찰의 제주도에서 제거/현재 제주도 경찰에 편입되어 있는 문제의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들을 본토로 복귀시켜 널리 분산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유(재흥) 대령/본인은 지난달동안 제주도의 소요를 진압하는데 가장 뛰어난 방법으로 임무를 수행했던 제주도 제2연대의 유 대령의 이름을 염두에 둘 것을 제안합니다. 본인은 제주도 도지사에 그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관행은 미국에서는 널리 통용되는 것입니다. 해당 장교에게 말미를 주고 후에 다시 군대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본인은 제주도 주민들로부터 대단한 신뢰를 받고 있는 유 대령이 도민들에게도 무난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유 대령이 군대로 복귀할 때 책임을 맡을 제주도 출신 부지사를 물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 L. Roberts) 준장’-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 (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공한(公翰) 1949년 4월 16일/서북대대·서북출신 경찰 본토 복귀

‘샤롯 리치몬드(Charlotte Richmond)가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서한/ 발신:『코리안퍼시픽프레스』/ 존경하는 국무장관 대리 제임스 웹(James E. Webb) 귀하/(중략) 미국의 대한원조의 또 다른 면은 군사원조다. 미국은 7,500여 명의 미군과 상당량의 군용물자를 동원해 현재 6만여명에 이르는 한국군을 훈련시키고 장비를 지원하고 있다. 지난 토요일 본인은 한국군들이 가장 심각한 시험을 치르는 제주도를 방문했다.

제주도는 과거 섬의 해안가와 평지만이 습격으로부터 안전한 채 내륙 전체 산간지역이 공산폭도들에 의해 장악돼 테러화 했다. 수개월전 유재흥 대령을 사령관으로 한 3,100명의 한국군 원정군이 제주도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됐다. 유 대령은 처음 휘하 장병들에게 30만여명의 제주도민들과 협력하도록 교육을 강화했다. 제주도민들이 군을 신뢰하게 되면서 이들은 군의 효율적인 동맹군이 됐다.

유 대령은 다음으로 산간 내륙지역에 완전 사면과 자발적으로 귀순하는 모든 ‘산사람들’을 좋게 처리하겠다는 내용의 수천장의 유인물을 뿌리면서 선저공세를 펼쳤다. 이 작전으로 3,000여명이 귀순해 내려와 한국정부의 목표와 목적 하에 일정기간 재교육을 위해 피난민수용소에 일시 수감됐다. 그들 대부분은 지극히 가난하다. 그들은 거의 아무 것도 생산되지 않는 산에서 살아왔으며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해 공산주의 사상에 쉽게 빠졌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에게 거짓 약속을 했고 이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그들은 현재 사상을 다시 전향하려 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토요일 제주도민들에게 복지와 관련해 대한민국의 관심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서울에서 제주도로 날아갔으며 춘기 파종을 위해 농가들이 제때 복구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기본적으로 도민들에게 “과거지사는 과거지사다. 과거는 잊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춘기파종을 위해 제 때 밭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여러분들은 이제 대한민국의 충직하고 유용한 시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귀경하기 전 제주읍 광장에 모인 수많은 군중과 비행장에 모인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최악의 소요지역’인 제주도의 치안문제는 해결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1년간 끌어온 국회의원 2명을 선출할 재선거 연기가 이제 끝났다는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민들은 대한민국의 첫 총선 기념일인 5월 10일 투표장에 갈 것이다. 유 대령의 부대는 잔존 게릴라를 산간 중심지대로 몰아넣고 있다. 대부분의 게릴라 무기와 장비가 압수됐다.

휘하에 7명의 부하만을 두고 있는 제주도의 수석 미군장교인 월터 하버러(Walter J. Haberer) 중령은 본인에게 유 대령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훌륭한 야전 지휘관 가운데 1명이라고 확신했다. 군사적으로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능력을 증명하고 있다. 한국에 축적되고 있는 증거로 보건대 미국이 제공하고 있는 원조는 정말 ‘경기부양책’이 되고 있다.’ -『코리안퍼시픽프레스』(1949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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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최선두, 도하 신상철 장군과 유재흥 장군.
유재흥(劉載興, 1921년 ~ 2011년)은 일본 나고야에서 출생하였고, 다섯 살 때 조선으로 돌아와 충남 공주에서 성장하였다.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 대위로 근무하였다. 그는 ‘2대 친일군인’으로 유명하다. 일본 육사26기를 졸업한 아버지에 이어 일본 육사 55기를 나왔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9월 4일 미24군단의 첫선발대가 도착하여 일본군의 항복수속을 정식으로 밟고 미군정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이승만·김구 등의 해외독립운동가들이 귀국하는 것을 기다리면서 군정을 펴나갔는데, 그해 12월 국가운영을 위해 가장 필요한 군의 창설을 시작했다. 

1945년 12월 5일 미군정은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을 열고 과거 군사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모집했다. 일본군, 만주군, 독립군 등에서 장교 또는 준사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정부가 수립될 때가지 지역별로 부대를 키워가면서 전국의 치안을 담당했다. 

유재흥은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의 대위(군번: 10003)로 임관하였다.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으로 있다가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4·3사건에 관여하였다. 그 후, 제4여단장과 제6사단장(1949년 5월 12일)에 임명되었고, 제6사단장-제2사단장 겸 태백산 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북한군 게릴라 침투 저지 작전을 폈다.

유재흥은 한국전쟁에서 연전연패를 기록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당시 준장으로 의정부 방면에서 7사단을 지휘하면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한테 병력을 쪼개어 투입하는 어이없는 실책을 범하여 서울이 함락당하게 되었다. 2군단장으로 그는 덕천 전투에서 또다시 ‘삽질’을 한다. 휘하 6, 7, 8사단은 중국군이 공세로 나선 사실을 전혀 모르다가 포위 공격을 당하고, 부대 대오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로 괴멸한다.

1951년 3군단장 시절엔 국군 치욕사의 최고봉인 ‘현리 전투’의 주역이 된다. 3군단은 중국군 한 개 대대한테 보급로이자 퇴로인 오마치고개를 점령당한다.  3군단 예하 9사단장 비롯한 고급 장교들이 계급장을 떼어버리고 도망쳤다. 혼란을 수습해야 할 유재흥 군단장조차 작전회의에 참석한다는 구실을 붙여 정찰기를 타고 전선을 떴다.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은 퇴각했다. 장비를 버리고 몸만 빠져나온 병력이 3사단 34%, 9사단 40%에 불과했다. 지휘관이 도망감으로써 부대 전체를 와해시킨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유재흥의 보직 해임을 직접 결정했다. 현리 전투 중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과의 다음과 같은 대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하며 현리에서의 국군의 치욕을 잘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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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플리트 장군과 이승만.
밴플리트: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잘 모르겠습니다."
밴플리트: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그런 것 같습니다.
밴플리트:"유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일자리나 알아보시오!"

 
1953년 육군참모차장을, 1957년 군단장을, 1959년 군사령관을 지냈다. 1960년 합동참모총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었다. 4·19혁명으로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지만 5·16 군사정변이 성공한 뒤 등용되어 타이, 스웨덴, 이탈리아 대사 및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방부장관 등을 지냈다. 1970년, 대통령 안보담당·국방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고 1971년,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퇴임 후에는 대한석유공사 사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1991년 성우회 회장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작전통제권 반환 움직임에 결사반대해 많은 비아냥을 사기도 하였다. 경북 경산 하양초등학교에는 유재흥 장군 전승기념비가 있다.

군은 90세를 일기로 2011년 11월  27일 별세한 유재흥 예비역 육군 중장의 장례식을 합동참모본부장으로 치른 데 이어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했다. 국립현충원에는 <친일인명사전> 등재자 76명이 묻혀 있다. 일본군 또는 만주군 장교 출신이 50명으로 가장 많다. 장군묘역에 묻힌 친일파 인사로는 일본군 헌병 출신으로 육군특무대장을 지낸 뒤 육군 중장으로 전역한 김창룡이 대표적이다. 그는 김구 선생 암살 배후로 의심받아왔다. 장군묘역에는 또 일본 육사 출신으로 일제가 징병제를 실시하자 “기다리던 징병제가 실시됐다”며 청년들의 참전을 선동, 대좌까지 오른 이응준 장군과 만주에서 헌병 상위로 활동했던 정일권 장군 등도 묻혀 있다.

‘ 제66호(1949. 3. 26~4. 2) 소요의 역사적 중심지이자 지난 해 동안 주민 1만 5,000명의 살육과 전체의 1/3에 해당하는 가옥의 소실을 경험했던 이념투쟁의 유혈 전쟁무대가 된 제주도는 점차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고 있으며 3월의 지난 3주간은 1947년 3월 1일 이후에 그 섬에서 경험했던 가장 평온한 나날이었다.

현재 상황 : (제주도에서의) 반란활동의 소강상태는 이전 일본군 장교이자 한국 육군사관학교 부교장 유재흥(Yu Jai Hung) 대령의 덕택으로 돌려질 수 있다. 유대령은 3월 2일 제주도지구전투부대 사령관으로서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유재흥 대령은 해안마을에 있는 그들의 막사(숙사)로부터 부대들을 이동시켜 반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산악지대로 그들을 보냈다. (유재흥 대령은) 오름지역에 사는 마을 주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육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으며 사면계획을 채택했다.

정부군 부대들은 유재흥 대령이 제주도에 부임한 이후 폭도 혹은 폭도 동조자 300명을 사살했으며 1,500명을 포로로 생포했다. 또한 권총 1정과 소총 22정을 되찾았다. 1,000~1,500명의 비전투원 동조자들의 후원을 받은 약 250명으로 추정되는 무장 폭도들은 이곳저곳의 은거지로 옮겨 다니면서 괴롭힘을 당해왔다. 3월 9일 경비대 일개 소대 병사들에 대한 매복을 제외하면, 반군들은 반격을 가하거나 마을에 대한 습격을 감행할 수 없었다.

탄약의 부족은 게릴라들이 현재 지니고 있는 가장 긴급한 문제이다. 노획하고 약탈한 식량 저장량은 많았고,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동굴들은 안전을 보장해 주었으며 주거지도 큰 문제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준비된 탄약 자원이 없었다. 반군들은 미군 탄약 1,500발 미만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어지며 일제 99 소총 탄약 2,000발에 해당하는 비축된 충분한 공급량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그들의 미제 무기류에 대한 유일한 공급원은 대한민국의 무장된 부대들로부터 노획한 재고 탄약뿐이다.

소문은 반군부대들이 육지와 북한으로부터 바다로 병참지원을 받았다는 점을 시사해주지만 그 보고를 실증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한국 해군 함선에 의한 끊임없는 순찰, 공중 정찰비행, 그리고 해안마을에 대한 경찰의 빈틈없는 경계는 외부 지원의 가능성을 감소시켰다. 누적된 반군 활동과 방위군의 반격의 결과로써 제주도 민중 사이에서 대단히 비참한 고난과 상실이 있었다.

섬 거주민 30만의 1/4정도로 추정되는 인구가 그들의 파괴된 마을로부터 떠나 해안지역으로 이주했다. 식량, 의류, 그리고 의약품 재고는 적었으며 육지로부터 구제 공급을 필요로 했던 3월의 마지막 두 주간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양이 제주도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재민들을 위한 거주문제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건축 재료인 돌과 진흙은 그 섬 전역에 걸쳐 풍부하게 있다.

식량 상황은 긴급한 문제이며 그러한 긴급한 식량문제는 지속될 것이다. 농부들은 농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약 8킬로미터까지 내지로의 이동이 허용 받았지만, 그들은 현재 그들의 거주지까지의 거리로 인해 장애를 받았고 반군과 군대 양자에 의해 징발된 동물의 무자비한 도축에 의해서 불리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B-2)..........(후략)’-미극동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합동 주간정보분석((Joint Weekly Analysis WEEKA) 1949년 4월 3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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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이후락, 양유찬, 유재흥, 양유찬의 부인, 김형일.
‘제주도에 준동하는 폭도를 완전 소탕할 목적으로 지난 3월 2일 설치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그동안 도처에서 작전의 묘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적을 완전 섬멸 혹은 귀순케 하였던 바 부하된 임무를 완료하고 철수하게 되어 사령관 유재흥대령이하 ○○○○명의 장병은 13일 오후 목포에 상륙, 빛나는 개선의 길에 올랐는데 유대령은 14일 오전 11시 20분 송정리역까지 출영한 제5사단 석(石)참모장 이(李)작전참모 등과 잠시 환담한 후 재광(在光) 기자단과 회견하고 제주도 제반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주도 사태에 있어서 군사적 문제는 이미 완료되었다. 남은 문제는 황폐된 제주도를 여하히 복구하냐 하는 정치적 문제다. 그리고 제주도 공비의 세포망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이번 작전에 있어서 군이 얻은 바는 많으며 38선 문제에 대하여도 유력한 힌트를 얻었다. 특히 한마디 말하고자 함은 하급장교들의 작전전투 능력이 대단히 우수하여 오히려 상급장교가 배울 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작전 중 7명의 막료 이하 나의 부하들은 상하일치 하여 선전용투하였는데 특히 임부택(林富澤)소령이 통솔하는 1개 대대는 2개월 동안이나 산 속에서 살며 일본군 이상의 전투능력을 발휘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도민의 민심은 현재 지극히 평온하며 왕성한 근로정신으로 제주도 복구에 노력중이다.” (같은 기사 국도신문 49. 5. 15)’-동광신문 1949년 5월 15일
 
‘1948년 4·3사건 이후로 계속 진압하여 오던 제주도의 폭도를 강력한 공격으로 단시일 내에 격멸(擊滅)코자 지난 3월 2일부로 육군대령 유재흥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투사령부를 동도(同道)에 설치하고 약 2개월에 걸쳐 악전고투 끝에 동도지구(同道地區) 폭동을 완전히 진압하여 치안을 확보하고 5·10 선거기념일을 전후하여 제주도에 선거까지 무사히 끝마치기에까지 큰 공훈을 세운 동 사령관 유 대령 휘하 부대인 전투부대 및 제2연대 1개 대대는 그 임무를 완수하고 동 사령부를 접수하여 금(今) 5월 17일 11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 최용덕(崔用德) 차관 및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을 (1줄누락) 각 청년단체 다수 환영리에 서울역 플랫홈에서 국방부장관 각하의 치사와 아울러 육해군악대의 주악(奏樂)과 함께 성대히 거행하였다.’-육군 역사일지 3집(1949. 1. 1~1949. 8. 15) 제주도 전투부대 개선 / 5월 17일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사령관에는 유재흥 대령이, 참모장에는 2연대장 함병선 중령이 임명됐다. 유재흥이 지휘하는 토벌대는 한국군 2,622명, 경찰 1,700명, 민보단 약 5만 명으로 편성되었다. 한 미군 보고서는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의 토벌대의 전과를 ‘반도(rebel) 사살 1,075명, 반도 체포 3,509명, 반도 투항 2,065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유재흥 사령관은 병력을 산악지역으로 이동 배치하였다.제1대대는 현재의 제1횡단도로 수악교(水岳橋) 부근, 제2대대는 관음사, 제3대대는 조천면 교래리, 그리고 특수부대는 노루오름에 주둔하는 등 산악지역으로 전진 배치한 것이다. 50명 규모의 특수부대는 산악지역을 배회하다 무장대를 만나면 제주사투리를 구사해가며 정보를 수집하는 조직이었다. 해변마을에서는 상공에 정찰기를 날게 하거나 로켓트포 시범사격을 보여줌으로써 위세를 과시하는 등 진압·선무 병용작전을 폈다. 이 때의 작전에 대해 유재흥은 이렇게 말했다.

“제주도에 가보니까 산중에 피난민 2만 명 정도가 있었어. 그리고 바닷가에는 경찰·군인이, 산쪽에는 공비하고 피난민이 있는 등 서로 갈라져 있으면서 밤이 되면 욕하고 싸우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나는 ‘군인은 무조건 산으로 올라가라, 공비토벌 해야 한다’며 3개 대대와 1개의 유격대대 등 4개 대대를 한라산 중복지역으로 이동시켰어. 처음에는 각기 전투지역이 있으니까 각 대대가 다니면서 소탕을 했고, 마지막에는 내가 4개 대대를 기동시키면서 작전을 했지.”

유재흥 사령관은 남아 있는 무장대 체포와 특히 ‘2만 명 가량의 피난민’을 하산시키기 위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3월 2일 창설부터 5월 15일부로 그 임무를 마칠 때까지 두 달 여 기간의 전과에 대해 한 언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과반 빛나는 개선을 한 제주도 전투부대 발표에 의하면 동부대의 종합적인 폭도소탕전과와 손해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전과(3월 1일~5월 11일) △무기압수:자동소총 3, M1총 25, 카빈 28, 99식총 106, 38식총 2, 44식총 4, 30식총 4, 피스톨 9, 폐총(廢銃) 25, 기타 무기 224 △포로·귀순자 6,117, 사살 1,117 △아군손해:전사 35, 부상 17, 민보단원 전사 11’-'朝鮮日報', 1949년 5월 20일.

군과 경찰의 전과를 종합하면 포로·귀순자가 7,641명, 사살이 1,612명이다. 정부 당국이 밝힌 무장대 수는 늘 ‘250명 가량’이었다. 이는 9연대와 2연대 초기의 진압작전 때만큼 주민희생이 컸던 것은 아니지만,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설치 초기인 1949년 3월 말까지는 함병선 2연대장의 소위 ‘섬멸전’이 여전히 계속되었음을 말해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그해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정보요약 제39호) 제4부: 특별보고/남한이 직면한 문제점들/2. 공산주의자가 자극한 무질서(중략) C. 게릴라 토벌작전 (1) 제주도: 테러리즘이 통제되어 가고 있다. 제주도는 지난 1년동안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마을에 대한 급습, 건물의 파괴, 민간인 살해, 군경과의 전투, 파괴행위, 방화약탈 등으로 인하여 선혈이 낭자한 전투장이 되어 왔다. 제주도의 테러리즘을 억제할 총 책임은 육군사관학교의 지휘관인 유재흥(Yu Jai-hung) 대령에게 지워졌다.

전체 진압부대의 사령관으로서 49년 3월 2일 제주도에 도착한 이래 유대령은 반란군들을 한라산 쪽으로 패주시켰다. 그의 부대는 약 300명의 적을 사살했으며 1,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제주도에는 현재 약 250명의 무장 반군들이 남아 있는데 그들은 약 1,000명에서 1,500명 정도의 비전투 동조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최근의 전투에서 노획된 소수의 무기는 사살당하거나 사로잡힌 포로의 숫자와 비교해 볼 때 반군들이 거의 무장하고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산악지형의 작은 섬에서 벌어진 전투의 심각성은 살해당한 사람들과 재산의 피해 정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약 1만 5,000명의 인명이 전투에서 죽었으며 섬에 있는 가옥의 3분의 1이 지난해에 소실되었다. (후략)’-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민정정보국 정보요약(Civil Intelligence Section, Periodical Summary)1949년 4월 15일/제주도 게릴라 토벌

‘(전략)......폭도들에 대한 작전은 통합부대장인 유재홍 대령이 제주도에 파견된 3월 2일 이후에야 실제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일본 육군 장교의 아들인 유대령은 그 자신이 제2차 대전 중 정예 일본 제2방어사단의 박격포 대대장을 지냈으며 제주도 파견 전까지는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이었다. 그는 매우 유능한 장교이며 미 고문관들과 잘 협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부대를 해안 마을에서 끌어 올려 게릴라와 대치중인 산으로 보냈다. 그는 사면계획을 채택해 중산간 주민에 대한 무분별한 사살을 중지토록 했다. 현재의 정책은 작전중에 체포됐거나 자발적으로 투항했거나를 불문하고 산에서 내려온 모든 사람을 구금하는 것이다. 여자, 어린이, 노인은 대부분 피난민으로 분류되고 있는 반면, 전투 가능 연령의 남자들은 피난민 지위가 부여되기 전에 철저히 심사되고 교육된다.

유대령 도착 이후 300명에 달하는 폭도나 혹은 그 동조자가 사살되었고 1,500명이 수감됐으며, 소총 22정과 권총 1정이 회수됐다. 무장폭도들은 은신처를 이곳 저곳으로 옮기느라 고통받고 있다. 3월 9일 산길에서 한국군 1개 소대를 매복공격한 것을 제외하면 폭도들은 이제 반격을 가하거나 마을을 기습할 능력을 상실하였다....(후략)’-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 / G-2 Periodic Report(1945. 9. 9~1949. 6. 17) 1949년 3월 30일~1949년 4월 1일 (No. 1097, 1949. 4. 1.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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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군과 경찰의 선무공작에 의해 산속에 숨어 있다 하산한 제주도민들. 이들 중 상당수가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

선무공작의 필요성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출범하면서부터 강경작전과 함께 ‘선무공작’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선무공작 방침은 중산간마을들이 이미 초토화됐고 무장대도 거의 궤멸됐다는 상황 인식에서 비롯됐다. 유재흥은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에 대해 “하여간 해안선에서 위로는 다 태워버려 없어진 상태였고, 산중에는 피난민 2만명 가량과 무장공비 230명 가량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제주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서울로 막 돌아왔을 당시에도 “폭도 중에 진짜 공산도배라는 것은 극히 적고 무지로 휩쓸리어 들어간 자가 많았다. 우리는 이들을 귀순시켜 피를 흘리지 않도록 노력하였다”라고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또한 산중에 숨어있는 주민들을 하산시켜 사태를 완전히 종결짓기 위해서는 주민 구호대책이 요구됐다. 당시 제주도의 상황은 너무도 비참했다. 주민들은 짐승같이 살고 있으며 평균 하루에 고구마 한 개를 먹을 정도였다. 

‘이재민수 86,797명으로 차등(此等) 이재민은 식량, 의류를 운반할 틈도 없이 피난한 관계로 문자 그대로 돼지우리처럼 만든 집 속 땅바닥에 건초를 깔고 그냥 기거하며 해초 산초로써 그날그날 겨우 연명하여 가는 형편이고 누구 할 것 없이 허기에 신음하고 있으며 집 내외는 악취가 진동하여 견딜 수 없었다. 위문을 하면 하늘을 쳐다보고 눈물만 지을 뿐 이 가련한 꼴을 바라보는 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自由新聞', 1949년 3월 23일.

유재흥은 “제주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서북청년들의 횡포를 막으면서 ‘과거 일은 불문에 부칠테니 안심하고 내려오라’고 선무했고 또 실제로 몇 군데 그렇게 한 결과 소문이 나서 매일 몇 천명씩 내려오니까 2만 명이 금방 내려오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1949년 4월 7일부터 13일까지 귀순자는 898명이나 되었고 4월 13일 현재 합계 3,500명이 돌아왔었다. 제주도 5개 수용소에 있는 자가 3,174명이나 되었고, 귀순자는 점점 늘어 5월 11일 현재 6,000여 명에 달했다.

이승만 대통령 스스로 담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입산자 대부분이 ‘공산당 선전에 속거나 집이 불에 타 갈 곳이 없어 도로 올라간 자’임에도 그동안에는 이들을 ‘폭도’라 하여 무차별 총살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귀순자들은 철저히 검색됐다. 

유재흥은 5·10재선거가 무사히 실시되자 5월 13일 제주를 떠났다. 그는 선무공작을 실시하면서 “하산을 하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생명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가 제주를 떠나고 난 후 1,600여 명이 총살당하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다.

‘26일 귀성한 바 있는 시(市)선출 민의원 고담룡(민)씨는 30일 이도에 앞서 4·3사건 등 진상규명을 위한 한계와 복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6월 1일의 국회 본회의에 국회조사단을 초치토록 재경 김(金), 현(玄) 양 민의원과 합력(合力)하고 긴급동의를 할 계획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선 최고책임자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며 그런 자료로서 1949년 3월의 유재흥(劉載興) 계엄사령관 부임 이후를 하나의 한계로 선을 그어놓고자 한다.

거기서 지적될만한 인물은 함병선(咸炳善), 신현준(申鉉俊), 김재능(金在能) 등 제씨이며 4·3사건 이후 사태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수는 경찰에는 2만 7,000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모은 기록으로 보면 6만 5,000 내지 6만 8,000으로 되어 있다. 도민으로서는 국회조사단에게 조사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일이 급선무인줄로 안다. 나에게 주어진 것도 몇 건 있는데 막연한 감이 없지 않은 만큼 구체적인 것이 필요하다.’-제주신보 1960년 5월 31일

1949년 군법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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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흥의 묘.
‘제주도에 출동하여 폭도를 소탕 중에 있는 유재흥 대령은 임무를 완수하고 17일 오전 10시 특별 열차로 막료를 대동하고 서울역에 도착하였다.’-자유신문 1949년 5월 17일
 
선무공작에 따라 많은 입산 피난 주민들이 속속 하산하여 왔다. 3월 한 달만에 1,500여 명이 내려왔다. 5월 11일 제주를 찾은 국제연합한국위원단에게 유재흥 사령관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3월 25일부터 4월 12일까지 잡힌 포로가 3,600명이라고 하였다. 4월 21일에는 ‘포로 및 귀순자’가 5,817명으로 급증하였다. 내무부차관의 5월 22일 작전 결과 발표에 의하면, “3월 5일부터 5월 14일까지 귀순자 총수는 6,014명이며, 그 중 남자는 2,974명 여자가 3,040명이며 석방자 수가 4,163명, 현재 수용자 수는 1,851명”이라고 하였다.
 
당시 하산자들의 수용 장소는, 제주읍내의 경우 주정공장(동척회사) 창고가 가장 컸으며, 그밖에도 농업학교, 일도리 공회당, 용담리 수용소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서귀포에는 정방폭포 위 감자공장과 천지연 부근의 창고가 수용소로 활용되었다. 5월 11일 주정공장을 방문한 국제연합한국위원단의 시찰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수용소에는 2,000여 명의 수감자가 오래된 창고에서 살고 있는 것이 발견됐다. 여성 수가 남성보다 대략 3배나 많았고 팔에 안긴 아기들과 어린이들도 많았다. 수용소장은 수감자의 90%는 산에 숨어 있다가 투항하였고, 나머지는 군 토벌대에 의해 체포됐다고 말하였다.’-Transmitting Excerpt from UNCOK Report on Visit to Cheju Island, Despatch No. 358, June 17, 1949, American Embassy, Korea.

경찰관들이 주정공장에 별도의 수사대 사무실을 설치하여 이들에 대한 취조를 담당하였다. 경찰은 수감자들에 대해 갖은 고문을 실시하여 무장대와의 연관성을 억지로 자백하게 하여 조서를 작성하여 군에 넘기기도 하였다. 

‘1949년 군법회의’는 한라산에 피신해 있다가 하산해 제주도내 각지 수용소에 감금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열린 것으로 되어있다. ‘1949년 군법회의’는 1949년 6월 23일부터 7월 7일까지 총 10차례 개최되었고, 그 명목은 고등군법회의였다. 이 군법회의에서 민간인 1,659명에 대해 한 사람도 어김없이 국방경비법 제32·33조 위반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 및 간첩죄’를 이유로 유죄 판결을 선고한 것으로 되어있다. '군법회의 명령'에는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호로부터 제18호까지 수록되어 있으며, 각 명령 호수마다 별지 명부가 첨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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