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86) 이공신화와 원강아미 이야기2

그날부터 원강아미의 모진 종살이가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강아미는 잘 생긴 아들을 낳았다. 사라도령의 말대로 신산만산할락궁이라 이름 지었다.
제인장자는 계속 원강아미를 탐하며 몸 허락을 요구하였지만 원강아미는 그때마다 이러저런 핑계를 대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던 하루 제인장자가 원강아미 방으로 밀어 들어오려 했다. 원강아미는 방문을 막아서며 완강히 말했다.
“우리 법은 아기 태어나 석달 백일 몸이 굳어야 부부 잠자리를 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위기를 모면하는 사이 할락궁이는 무럭무럭 자라 열다섯 살이 되었다.

제인장자의 잠자리 요구는 더 심해졌다. 원강아미가 다시 말했다.
“아이가 쟁기를 지고 밭 갈러 다니게 돼야 부부 잠자리를 같이하는 법입니다.”
할락궁이가 쟁기를 지고 밭 갈러 나갈 만큼 장성하자 제인장자가 다시 원강아미의 방에 들어가려 하였다. 원강아미는 굵은 몽둥이를 방 입구에 놔두었다가 인기척이 나면 그 몽둥이를 매섭게 후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요 개 저 개, 못된 개로구나. 지난밤에도 조반 지을 곡식을 다 먹더니 오늘 밤에도 또 왔구나.”
“아이쿠, 나 제인장자다!”
몽둥이질을 당한 제인장자는 어깨를 감싸 쥐며 난간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원강아미는 이게 어찌된 일이냐는 듯 말했다. 
“아이고 상전님, 이 어쩐 일입니까?”
“네 이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지금까지 날 속인 세월이 얼마냐? 내, 이년을 오늘 죽이고야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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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어공주(출처/씨네21). 사랑하는 사람에게 갈 수 있는 다리도 없으면서 어떻게 해피엔딩?

제인장자는 머슴들을 불러 형틀을 마련하게 했다. 아버지가 노발대발 외치는 소리에 막내딸이 달여 왔다.
“아버지, 무슨 일로 그리 화가 나셨습니까?”
“저 종년이 이 번 저 번, 매 번 나를 속이니 하도 괘씸해서 그런다.”
“아버지, 아무리 우리 집 종이라도 죽이면 죄인이 됩니다. 아버지를 속이며 욕보였다니 저것들이 해내지 못할 만큼 힘든 벌역을 시켜 분을 푸십시오.”
“어떻게 하면 이 분이 풀리겠느냐?”
“할락궁이에게는 낮에 나무를 오십 바리 해 오고 밤에는 새끼줄 오십 동을 꼬아내라고 하십시오. 어미에게는 낮에는 물명주 다섯 동, 밤에는 물명주 두 동을 짜내라 하십시오. 보통 사람이면 도저히 해내지 못할 힘든 일이니 아마 둘 다 잠도 한숨 못자고 기진맥진 지쳐서 아버지에게 살려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 그건 그러자꾸나.”

원강아미와 할락궁이의 모진 종살이와 고초가 계속되었다. 원강아미는 밤낮으로 베틀에 앉아 달칵대었다. 낮에 물명주 다섯 동, 어두운 밤에 두 동, 일곱 동의 명주를 짠다는 것은 도저히 사람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지런히 하다보면 물명주가 저절로 짜여져 쌓여 있었다. 할락궁이도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한 바리 정도 하다보면 나머지 마흔 아홉 바리의 나뭇짐은 저절로 쌓여 있었다. 밤에도 새끼줄을 한 동 꼬노라면 마흔 아홉 동의 새끼줄이 저절로 꼬아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 딸이 제인장자에게 말했다.
“아버지, 불쌍하지 않습니까? 오늘은 좀 쉬라고 하시지요.”
“그래, 오늘은 쉬라고 해라.”
오랜만에 원강아미는 부엌으로 들어가 아들이 좋아하는 콩을 볶고 있었다. 할락궁이가 부엌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어머님아, 저 정낭 밖 올레에서 누가 어머니를 찾습니다.”
어머니를 올레로 나가자, 할락궁이는 콩 젖던 막대를 숨긴 후에 숨넘어가는 소리로 어머니를 불러댔다.
“어머니, 빨리 오십서! 콩이 다 탑니다.”
원강아미가 부엌으로 뛰어 들어와 콩 볶는 솥으로 다가서자 할락궁이가 어머니 손을 확 잡고는 뜨거운 솥바닥에 곧 닿을 듯 꾹꾹 눌러대며 물었다.
“어머니, 우리 아버지는 어디 가고, 어머니와 나는 이렇게 종살이 신세입니까?”
“아이고 뜨겁다! 이러다 내 손에 불 나겠다. 네 아버지는 제인장자다.”
원강아미의 말에 할락궁이는 어머니 손을 솥바닥으로 더 바짝 들이밀면서 소리쳤다.
“우리 아버지가 제인장자면 어째서 이런 무지막지한 종노릇을 하며 살고 있는 겁니까? 어머니, 무슨 사연인지 말씀 해 주십시오. 저도 이제 어른이 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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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얽힌 실타래(출처/위.위키피디아 아래.다음블로그 caocaojr)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칼로 잘랐다고 하는 전설 속의 매듭. 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원강아미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그래? 어른이 되었다고? 이 에미는 사실 네가 어른이 되기만을 기다려 왔다. 그러면 말하마. 네 할아버지는 김진국 대감이고 외할아버지는 임진국 대감이다. 네 아버지와 나는 구덕혼사를 했고 나이가 들어 결혼을 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너희 아버지에게 꽃감관을 살러 오라는 부름을 내려 왔다. 너를 임신한 배부른 몸으로 이 에미는 너희 아버지를 따라나섰고 그 길이 너무 힘들어 이 제인장자 집에 나와 너를 팔고 서천꽃밭으로 가셨다.”
“오늘이라도 당장 아버지를 찾아 나서겠습니다. 메밀 범벅 두 덩어리만 만들어 주십시오.”
“그래, 그러하자. 이건 너희 아버지가 남겨놓고 간 본메(증거물)다. 이걸 가지고 어서 떠나거라.”
“제인장자가 나를 찾으면 어머니는 무조건 모른다고 잡아떼십시오.”
“그래, 그건 내게 맡기고 어서 떠나라. 너나 잡히지 말고 꼭 아버지를 만나 거라.” 

할락궁이는 반으로 꺾어진 얼레기를 들고 길을 떠났다.
제인장자는 할락궁이가 도망친 것을 알고 천리둥이(천리를 뛰는 개)를 풀어 놓아 뒤쫓았다. 할락궁이는 쫓아온 천리둥이에게 메밀범벅 한 덩어리를 던져주고 천리둥이가 먹을 것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천 리를 도망갔다. 이번엔 만리둥이가 쫓아왔다. 또 메밀범벅 한 덩어리를 던져주고 만 리를 뛰어 갔다.
개들을 따돌리고 가다보니 개울이 나왔다. 개울을 건너는데 물이 무릎을 찰랑찰랑 쳤다. 한참 가다보니 또 개울이 나타났다. 그 물을 건너는데 이번은 물이 허리를 찰랑찰랑 쳤다. 그 물을 건너 또 가다보니 또다시 개울이었다. 이번에는 물이 목 위까지 차올라 겨우 건널 수 있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외까마귀가 앉아 울고 있었다. 할락궁이는 청버드나무에 올라가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선녀들이 물을 긷고 있었다. 물 긷던 선녀들도 청버드나무 윗가지에 걸터앉아 있는 무지랭이 총각을 보았다. 매번 서천꽃밭에 줄 물을 길러 왔지만 처음 보는 낯선 총각이어서 돌아가 사라대왕에게 아뢰었다.
“사라대왕님, 서천꽃밭에 뿌릴 물을 길러 갔는데 청버드나무 가지에 어떤 총각이 앉아 있었습니다.” (계속/ 김정숙.)

*참고: 현용준「제주도 무속자료사전」, 문무병「제주도무속신화」, 제주문화원「제주신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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