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레코드] (25) 바보 버스 / 삐삐롱스타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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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e way ticket / 삐삐롱스타킹 (1997)

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 가면 사보(社報)가 꽤 있다. 사보는 기업의 이미지를 위한 것으로 도서관에 온 것들은 당연하게도 사외보들이다. 사보는 주로 대기업에서 발행한다. 돈이 있으니 홍보 비용으로 할애를 한다. 나는 스무 살 무렵에 도서관에서 사보를 읽으며 훗날 대기업 홍보과에서 사보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보시다시피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지금은 ‘제주작가회의’에서 기관지 ‘제주작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으니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고 우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보의 그 미묘한 매력을 계간 ‘제주작가’에서 찾을 순 없다. 우선 사보는 얇아서 좋다. 화장실에 앉아 있는 동안 다 읽을 만한 두께다. 대개, 정작 자신의 회사 상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없다. 주로 여행이나 문화에 관한 글과 사진이 많다. 시가 한 편 정도는 있기 마련이고,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콩트다. 제법 이름이 알려진 소설가의 콩트가 실려 있다. 생계형 소설가가 쓴 듯한 콩트는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너무 무거워 들기 싫게 만드는 게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귀착되는 게 다반사다. 더욱이, 보통 소설집에서는 찾기 힘든, 적절한 삽화도 있어서 읽기에 편하다. 왜 어른들의 책에서는 삽화를 찾기 힘들까. 이건 출판사에서 삽화가들을 집단적으로 막는 음모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른 책에서의 삽화 실종 사건은 미제로 남을 게 유력하다. 내가 아이였을 때, 아버지가 보던 책 ‘삼국지’에서 본, 관우의 어깨에서 피가 뚝뚝뚝 떨어지는 컬러 삽화를 잊을 수 없다. 사보는 글에 삽화를 실어준다. 현대차가 급발진을 해서 교통사고가 나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쓰러져 죽어도 매달 사보는 깔끔한 표지 디자인으로 도서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 발송된다. 변명도 하지 않는다. 여전히, 남해안이나 지중해에서의 한때를 사진과 함께 여행기사가 실려 있고, 진지했던 소설가들도 가벼운 붓터치로 콩트를 싣는다. 적절하게 어울리는 삽화와 함께. 여전히, 원고료를 두둑하게 준다는 사보에 글을 싣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인 나는, CJ가 조정하는 말 그대로 ‘제한 상영관’에서 그다지 고민할 필요 없이 영화를 예매한다. 막연히 영화가 좋아서 아카데미 극장 영사실에 취직했던 스물한 살의 나는 큰 극장의 부속품이 된 듯한 환각에 사로잡혀 영화 상영 중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는 일요일 오후에도 도서관 정기간행물실 앉아 사보를 읽을 것이다. 그 의자에 박혀있는 나사처럼 단단히 조여진 채 미동도 없이 사보의 나라에서 단꿈을 꿀 것이다. /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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