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레코드] (26) 일강정 / 최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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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최상돈.

지난 겨울이었다. 김수열 시인과 시외버스 터미널 순옥식당에서 두루치기에 소주를 마셨다. 방학을 해서인지 김수열 시인은 수염이 덥수룩했다. 마치 산사람 같았다. 이러구러 술자리는 무근성 부근으로 이어졌다. 무근성으로 가자고 한 것은 김수열 시인의 제안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즉 무근성은 그가 유년기를 보낸 고향 동네였다. 인민유격대장 이덕구가 효수 당한 관덕정 뒤에 있는 동네. 택시를 타고 무근성으로 가는데 쉰을 넘긴 김수열 시인의 아이처럼 들뜬 표정이 역력했다. 술에 취해 몸을 허청거리면서도 골목과 간판을 기웃거리며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혼자 흥에 겨워 골목마다 집집마다 사연을 늘어놓았다. 주정공장이 있던 자리며 몇 해 전에 백주년을 맞이한 북초등학교며 4·3 때 이야기며. 애써 듣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김수열 시인이 갑자기 담배를 사러가겠다며 간판도 없는 어느 허름한 슈퍼마켓으로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도 나오질 않는다. 이상히 여겨 내가 슈퍼로 들어가보니 김수열 시인은 아예 나무 의자에 앉아 주인으로 보이는 팔순 가까이 된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무슨 연극의 한 장면 같아 나는 그냥 두었다. 언제부터 이 가게를 하셨는지, 원래 여기가 고향이신지 노인에게 자꾸 묻는 김수열 시인. 같은 북초등학교 동문임을 확인하자 선배님으로 호칭이 바뀌더니 과자며 음료수를 이것저것 고른다. 나보고도 먹고 싶은 과자가 있느냐며 물었다. 다 먹을 것도 아니면서 과자 봉지를 여러 개 집는다. 김수열 시인은 이미 눈이 붉어져 있었다. 근처 주점에 가서 막걸리를 마실 때도 김수열 시인이 울먹거리는 말로 말했다. 이제는 많이 변한 유년의 동네에서 마시는 막걸리. 골목마다 얽힌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해 가을, ‘제주작가회의 문학의 밤’에서 김수열 시인은 강정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시 ‘붉은발말똥게’를 낭송했다. 붉은발말똥게도 자신의 고향인 강정에서 서럽게 울고 있을 것 같은 밤이었다. 몇 사람이 더 합류해 술을 마시다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귀가를 했다. 그날밤 그의 마지막 말벗은 조중연 소설가였다. 다음 날 들어보니 김수열 시인은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고 한다. 김수열 시인은 가수 최상돈의 노래에 날개를 달아주자는 후원회의 대표이기도 하다. /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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