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칼럼] 가출을 상상한다는 것

가을이 되면 서점에 들르는 일이 잦다. 올 가을 서점에서는 예년과 달리 중년 남성이 부쩍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다. 교보문고의 조사에 의하면 최근 5년간 시·소설 분야의 구매층 중 50대 남성의 비율이 높아졌다고 한다. 1998년 경제위기 이후 직장을 나온 수많은 중년들이 몰려든 등산 문화와는 다른 양상이다. 현재 중년세대는 직장에서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둔 베이비부머 세대다. 은퇴 후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는 사람, 여유는 있으나 가족이라는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욕망을 버리고 마음의 여유를 찾아 안반낙도를 지향하는 사람, 경제적으로 여유를 누리는 사람 등 각양각색으로 처지가 다르다.

인생에 있어서 중년은 위기이자 기회다. 가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다. 중년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제2의 인생, 인생 이모작과 3모작 등과 같은 메시지보다는 시간적 여유에서 오는 마음의 평정과 자기와의 대화가 아닐까. 중년은 자신이 중심에 서서 주체적으로 생존을 영위해야 할 때다. 책을 읽고 문화적 경험을 쌓는 일에 집중한다는 것은 자아를 확장하고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다는 증거다.

새로운 가능성에는 무한한 상상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가출’이나 ‘출가’도 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가출’은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는 것으로 청소년 가출 등 부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가’는 집이나 세속을 떠나 종교에 입문하여 수행생활을 하는 일을 뜻한다. 가출과 출가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지만 집을 떠난다는 서사는 유사하다. 

중년세대에게 가출은 환상이나 몽상, 유치한 짓, 감히 실천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가출을 재발견하고 꿈꾸는 일은 중년에게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감수성과 비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실존적 자아를 겸허하게 성찰하면서 마음의 빈 둥지를 채우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가출을 직접 실행하거나 상상하면서 역사를 바꾸거나 문화 예술의 금자탑을 쌓았다. 예수와 석가는 집을 나와 기독교와 불교를 탄생시켰다. 두 성인의 출가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행적은 기독교와 불교의 기본 경전으로 정리되어 수십억 신도들의 신앙으로 영생하고 있다. 집을 나오는 행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종교 수행자들이 영성과 불성을 찾아 집을 떠나는 일도 마찬가지다.

고대 인도의 바라문은 인생을 4단계로 구분하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배우고 교육받는 범행기, 결혼하여 세속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가주기, 숲에 들어가 자기완성에 매진하는 임서기, 자기 완성을 위한 진리를 찾아 세속을 완전히 떠나는 유행기로 나누었다. 중년인 임서기부터 삶을 마치는 유행기까지가 집을 떠나는 기간이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삶의 문제에 대한 오랜 번민 끝에 가출을 결행하고 사흘만에 시골의 역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인생의 궁극적인 진리를 찾는 기나긴 싸움을 가출을 통해 끝낸 것이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접시닦이와 거리의 부랑자, 광부 생활을 직접 체험하면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남겼다. 그는 글을 쓰기 위해 하층민의 밑바닥이나 스페인 전쟁에 직접 뛰어들었다.

가출은 시나 소설의 소재로 사용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양중해 작시, 변훈 곡 ‘떠나가는 배’는 처자식이 있는 저명한 시인이 젊은 여인과 사랑에 빠져 제주도로 도피하고 헤어진 사연에서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소설가 박범신의 <소금>은 가족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치열하게 삶을 영위한 베이비부머 세대 아버지의 가출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아주 작은 부분만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독일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이제까지의 삶을 버리고 자아를 찾아 리스본행 기차를 탄 한 남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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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기에 접어들면 시간이 초고속열차처럼 빠르게 지나간다고 아쉬워하며, 감정의 기복은 심해진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감상에 젖기도 한다. 이 피할 수 없는 번뇌에 맞서고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한 촉매로 가출을 상상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가 말한 지상에 존재하면서 인간의 꿈을 담는 일상의 실제적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로 가출을 상상하고 음미하며 이 가을을 보낸다면 중년의 시간은 행복해질 것이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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