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중국기행] (2) 역사의 질곡 보여주는 상해 건축물들

필자는 서귀포시 야구연합회가 추진한 ‘사회인 야구단 국제교류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지난 10월 3일부터 7일까지 중국 상해(上海)를 방문하였다. 마침 몇 해 전부터 상해와 인근 절강성(浙江省) 일대에 관심을 갖고 답사할 기회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방문은 개인적으로 뜻있는 기회가 되었다. 비록 4박5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나름의 보람이 컸던 지라 그 감흥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야구를 목적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야구보다는 다른 소재에 대한 얘기가 많을 것이다. 스포츠 교류라는 게 원래 스포츠를 매개로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모처럼 귀한 기회를 마련해주신 서귀포시야구연합회 문순용 회장 이하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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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되면 황포강 주변 건물들이 오색의 빛을 발하여 활홀경을 연출한다. 상해 야경은 상해 관광의 백미로 인정받는다. 가운데 붉은 빛을 발하는 탑이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자랑하는 동방명주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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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원상창'이란 시장에 사람이 몰린 모습이다. 상해가 경제 중심지로 도약하면서 중국 농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상해로 모여들고 있다.

가수 고운봉이 1940년대 초에 발표한 가요 중에 ‘황포강 뱃길’이란 노래가 있다. ‘물 위에 꽃잎 실은 황포강 뱃길, 쌍돛대 흔들흔들 휘파람 싣고’로 시작하는데, 황포강을 소재로 향락적인 낭만을 표현하는 노래다. 가수 고운봉은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려고 왔던가’라는 첫 구절로 시작되는 ‘선창’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가수다.

그런데 고운봉의 ‘황포강 뱃길’이 발표되기 이전에 상해를 소재로 한 노래가 이미 10편 발표되었다고 한다. 이는 상해가 해방 이전부터 이미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나라 부산을 소재로 한 노래가 몇 곡 알려지지 않은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포동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상해 중심지로 들어서면 상해 중심을 가로지르는 황포강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강의 양변에 줄지어 자리 잡은 고층 건물들, 그리고 길거리에 쏟아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항포강과 초고층 건물들, 많은 사람들, 이 세 가지가 현대 상해를 특징짓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황포강은 강소성의 정산호(定山湖)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다 북쪽으로 선회하여 상하이 중심부를 관통한 후, 상해 동쪽 오송(吳淞)에서 양자강과 합류한다. 그리고 그 양자강과 합류한 물길은 이내 태평양에 이르러 강으로서의 운명을 마감한다. 명(明)나라 이후 중국조정에서 이따금 대규모의 준설작업을 했기 때문에 대형 선박들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상해가 중국 개혁개방의 중심에 놓인 것도, 배를 이용해 바다나 내륙 모두로 나아갈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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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포강 서쪽 옛 조계지에 들어선 건물들은 대부분 150년 전 쯤 유럽의 건축사들이 지은 것들이다.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개항의 길을 걷게 되었고, 황포강 서쪽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양인들을 위한 조계지가 조성되었다. 이후 상해는 아시아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상해시는 황포강을 주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야간에는 황포강 주변 건물들을 이용해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화려한 야경을 선사한다. 밤이면 황포강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모여든 관광객들로 유람선은 넘쳐나고, 강변에는 시민들이 개미떼처럼 모여든다. 황포강 야경은 상해 관광의 백미로 자리 잡았다.

중국정부가 상해 야경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화려한 불빛만이 아니라 바로 그 빛을 발하는 강변의 초고층 건물들이다. 특히, 밤이 되면 황포강 동쪽의 고층 건물이 일제히 다채로운 빛으로 치장하는데서,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떠오른 포동(황포강의 동쪽)의 웅장함을 과시하려는 중국정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중국은 이미 1990년대에 황포강을 가로지르는 대교와 터널을 완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어 포동공항과 지하철을 완공했다. 이런 도시 인프라 사업에 우리 돈 20조원 정도가 투입되었다. 그리고 그 바탕위에 동방명주탑(468m), 상하이국제센터, 국제금융빌딩(53층, 226m), 교은금융빌딩(50층, 230m), 진마워타워(88층, 421m) 등 초고층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이들 중 동방명주탑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진마워타워는 가장 높은 건물로 인정받는다. 지금도 상하이 곳곳에는 초고층 건물 공사가 진행 중이다. 중국 정부는 상하이 초고층 건물들을 통해, 중국의 발전의지를 세계에 과시하면서 동시에 인민들에게는 자부심을 선물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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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에 있는 '예원'이라는 정원 뜰에서 바라보니 정원 뒤에 초대형 건물을 짓는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상해는 어딜 가나 공사 중이다. 사람이 몰리다보니 생긴 현상일 게다.

1990년대 이후 황포강 서쪽에 지어진 초고층 건물들이 중국인들의 자부심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유럽식 고전적 건축물들이다. 이 건물들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유럽에 의해 강요된 세계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던 아픈 과거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던 상해의 번영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사실,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개항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주력항은 상해 남쪽의 영파(寧波)였고, 상해는 영파 배후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 이후 상해의 운명이 달라졌다.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한 중국은 치욕적인 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강용된 세계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상해는 영국의 요구로 개항의 길을 걸었고, 그 일환으로 영국은 상해 안에 자국민들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조계지를 제공받았다.

영국의 중국 진출 이후, 서구 열강들은 앞 다퉈 중국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다. 중국은 그야말로 서양의 ‘동네북’으로 전락했고, 상해내 외국인 조계지는 중국의 영토이면서도 중국인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중국인들은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지만, 이를 계기로 상해가 국제도시로 성장할 수있게 되었다. 길이 좁아 마차가 다닐 수도 없고, 깨끗한 생활용수도 없던 초라한 어촌이 아시아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로 도약하게 되는 데는 불과 50년 도 걸리지 않았다.

한편, 상해가 개항된 후 생활환경이 다소 개선되자 유럽의 정통 건축가들이 상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866년에 영국왕실건축사 회원이었던 윌리엄 카이드너를 비롯하여 당시 유명한 건축가들이 상하이에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상해에 외국공관이나 교회 및 성당 등이 정통유럽식으로 지어졌고, 오래도록 이들은 상해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1930년대 우리 유행가에 상해가 자주 등장했던 것은 당시 상해가 아시아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풍 세련미를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계속/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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