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중국기행] (3)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터와 그 주변, 한-중 애환이 묻어나는 곳

필자는 서귀포시 야구연합회가 추진한 ‘사회인 야구단 국제교류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지난 10월 3일부터 7일까지 중국 상해(上海)를 방문하였다. 마침 몇 해 전부터 상해와 인근 절강성(浙江省) 일대에 관심을 갖고 답사할 기회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방문은 개인적으로 뜻있는 기회가 되었다. 비록 4박5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나름의 보람이 컸던 지라 그 감흥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야구를 목적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야구보다는 다른 소재에 대한 얘기가 많을 것이다. 스포츠 교류라는 게 원래 스포츠를 매개로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모처럼 귀한 기회를 마련해주신 서귀포시야구연합회 문순용 회장 이하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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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 마당로에 남아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터

관광객들이 상해에 도착하면 가이드들이 빼놓지 않고 안내하는 곳이 상하이 관광 제1명소인 외탄(外灘)이다. 탄(灘)은 모래사장을 이르는 말인데, 황포강변에 서양 근대풍의 건축물이 모여 있어 독특한 정취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해에서 맛볼 수 있는 근대 유럽풍의 정취란 사실 중국인들에게는 자존심에 남은 상처의 흔적이기도 하다. (20세기 초, 아편전쟁(1840-1842)에서 패한 중국은 서양의 압력에 굴복해서 상해를 개항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외국에 내준 조계지가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했음은 이미 지난 기사에서 언급했다.)

외탄이 한국인들에게 반가운 것은, 근처 마당로 306동 4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터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이 저녁에 방문했는데, 우리가 있는 동안에도 많은 한국인 일행들이 임시정부청사 터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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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 선생의 흉상
이 건물은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사용했던 여러 건물들 중에서, 상해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3층 형 목조건물로 연건평이 48평에 달하는데, 그간 중국인이 거주하다가 지난 1993년에 우리나라 기업들이 후원하여 복원하게 되었다. 건물 1층에는 좁은 교육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교육장 맨 앞에 있는 김구선생의 흉상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2층과 3층에는 직무실과 회의실 취사 공간 등이 복원되어 있다.

임시정부가 이 자리에 터를 잡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애초에 3·1운동을 전후로 해서 국내외에는 상호간 부지불식간에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다가 상해를 거점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었다. 그래서 상해는 윤봉길 열사의 홍교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으로 떠돌이 신세가 될 때까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싱해임시정부는 애초에 지금의 상해 서금로(瑞金路)에 있던 건물에서 창립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야 했는데, 1926년에 이르러 마당로에 터를 잡았다. 그 후 1932년까지 임시정부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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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야구연합회 소속 단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에 대해 현지 안내원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모습이다. 왼쪽에 계신 분들은 이곳을 방문한 다른 일행이다.

최근 상해가 다시 중국 개방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한국과 중국 사이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터는 연간 수십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한국과 중국간 국교가 수립되기도 전인 1988년에 이미 중국 정부에서 이 터를 문물보호중점(文物保護中点 )으로 지정해 청사 옆에 관리소까지 설치했다. 한-중간 교류가 활발하게 이어질 것을 염두에 둔 조치였으니, 앞을 내다보는 그들의 혜안에 감동할 수밖에.

한편, 임시정부청사 터 바로 옆에는 중국의 오래된 옛 골목을 눈여겨볼만하다. 사실 임시정부청사 건물을 제외하고는 주변 건물 대부분이 지저분하고 낡은 느낌이 드는데, 이는 임시정부청사를 그만큼 깨끗하게 잘 복원하고 관리했음을 말해준다. 마당로 임시정부 시절, 요원들 대부분이 청사 근처에서 기거했다고 하니, 주변 어느 건물은 독립운동가들이 생활공간이었으리라.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도로는 마차 하나가 겨우 다닐 만하고, 3층 규모의 목조 주택들 빽빽하게 서로 붙어 있다. 이런 구조를 갖는 주택을 이롱주택(里弄住宅)이라 하는데, 골목길을 중심으로 연립하여 지어진 주택을 이르는 말이다. 19세기 이후 상해(上海)가 근대도시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집합거주 유형으로, 오늘날의 연립추택이나 아파트와 같은 개념으로 지어진 건물들이다. 상해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던 시절에 주거 난을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특별한 도시주거유형으로, 중국의 전통 주거양식과 영국의 테라스하우스의 배열방식을 접목한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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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청사 터 인근 골목 안의 풍경이다. 좁은 지역에 많은 집들이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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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롱주택으로 약 150년 전에 상해에 처음 나타난 주거형식이다. 상해 임시정부청사 터 근처에는 이롱주택 골목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주택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60년대이다. 상해가 개항하고 아시아 금융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서양의 유명 건축사들이 줄을 지어 상해를 찾았다. 그리고 외탄에 서구식 고층건물이 들어서는 등 도시가 근대식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와중에,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1860년에 소주를 점령한 태평천국 군은 상해까지 접수하려 하였지만, 상해성을 지키는 청국군과 조계지에서 결성된 만국상단군이 연합하여 이들을 막아냈다. 상해가 안전한 지역으로 인식되면서, 주변 항주와 소주 등지에서 태평천국의 약탈을 피해 50만 명의 피난민이 상해 외국인 조계지로 몰려들었다.

외국인 조개지 안에 서양인들보다 중국인들 숫자가 훨씬 많아졌고, 몰려온 중국인들을 수용할 만한 집단 주거시설이 필요했다. 조계지 내에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고, 주택임대업이 활기를 띠었다. 이런 사회적 요구에 의해 유럽인들은 부동산 임대업에 눈을 돌리고 좁은 면적에 여러 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저렴한 비용으로 빠르게 지을 수 있고, 보수가 수월하다는 이점으로 인해 이롱주택은 조계지를 넘어 상하이 밖의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까지 퍼져나갔다. 이롱주택은 중국 근대를 특징짓는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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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 시내에 아파트를 짓는 현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 상해로 몰려들면서, 상해는 구석구석이 공사 중이다.

오늘날 상하이 주변은 어디를 가나 아파트 공사 중이다. 포동의 경우 아파트 가격이 우리 돈으로 평당 1억 원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하니 가파르게 올라가는 중국의 주거비용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나타난 현상일진데, 이미 150년 전에 겪었던 홍역을 현대 중국인들이 다시 한 번 겪고 있다는 생각이다. (계속/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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