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35) 4·3 당시 순교한 제주출신 첫 교역자 이도종

이도종,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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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종 목사.
‘제주도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고,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이 초래된 것이다. 젖먹이 어린아이부터 늙은 노파에 이르기까지 4·3의 비극은 피할 수 없었다. 교회 역시 그 무섭고 혹독한 시련을 빗겨갈 수 없었다. 1945년 해방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이데오로기 대립이라는 무서운 시련을 통과해야 했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 속에 수많은 민중들이 생명을 잃었다. 서귀포 교회당이 소실되엇고, 제주가 배출한 최초의 목회자 이도종이 순교했다.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박용규 지음 『제주교회사』 453쪽

이도종(李道宗, 1891~1948)은 애월면 금성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덕련(李德連,1872년∼1950년)은 조봉호 등과 함께 1907년 3월 10일 금성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덕련은 본도 최초 장로가 되었으며, 조봉호는 1919년 독립희생회 사건으로 옥중 순국하였다. 금성교회는 조봉호와 이도종을 중심으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하였다.

이도종은 105인 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 온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1864∼1930)과도 교우하였다. 이때의 인연으로 이도종의 아우 이의종(李義宗)이 남강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 : 평북 정주)로 유학을 가서 1917년 졸업하였다. 이의종은 3·1운동으로 함남경찰에 의해 당국에 체포되어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도종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8살 때에 결혼도 했으며 부농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한문을 읽고 선비행세를 하였다. 1919년 조봉호의 독립군자금 모금 사건 때 연루되어 6개월간 구속되었다 풀려났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남은 평생 한쪽다리를 절면서 다녔다.
 
1907년 9월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로회가 조직되고, 독로회는 이기풍(李基豊: 1865∼1942)을 제주선교사로 파송한다. 그가 도착한 것은 1908년 봄이었으며, 당시 제주도는 ‘이재수의 난’으로 서양종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때였다. 이도종은 그해 이기풍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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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최초 교회당.

이기풍은 평양의 폭력배였다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 전도자가 된 인물로, 그가 부임하던 당시의 제주도는 외지에서 온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서양종교를 전한다고 몰매를 맞는 등 고난을 겪었지만, 이기풍은 제주도 최초 교회인 성내교회를 비롯하여 삼양, 내도, 금성 등 15곳에 교회를 설립했다. 이도종은 이기풍 목사가 전도한 첫 열매였다. 

이기풍의 소개로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이도종은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안수 받은 제주도출신 첫 교역자가 되었다. 1927년  김제읍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후 귀향하고, 제주도 순회목사가 되어 개척교회를 설립해 나갔다. 

1929년 서귀포교회를 시작으로 1933년 중문교회, 1935년 남원교회, 1936년 고산·두모·용수교회를 설립하였지만 시련이 닥치기도 하였다, 제주노회가 신사참배를 반대하기로 선언하자, 일제는 그를 한 달 간 감옥에 가둬버렸다. 다시 그는 고산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환란기가 지나기를 기다렸다. 

해방 후 제주도는 광풍에 시달리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도종은 새벽부터  예배를 인도하다 보면 밤늦은 시간에야 귀가했다. 당시 조남수, 강문호 목사와 친교를 맺고, 함께 지역을 분담하며 목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48년 4월 3일부터 7년 7개월 동안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로 주민 3만 여명의 희생자를 낸 채 승자 없는 피 흘림으로 끝난 이른바 ‘제주4·3사건’으로, 교회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이도종의 순교를 비롯해 교회가 불에 탔고 성도가 무장대에 의해 피살되었다. 안덕면 화순교회에서 고산으로 향하던 산길에서 무장대에 의해 붙잡혀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독립운동가 조봉호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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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봉호.
‘우리들은 신사(神社)가 기독교에 위반되지 않은 본지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대국적으로 보아 국가의 의식인 것을 자각하고, 이에 신사참배를 선서함.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이행하며, 더 나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참가하여, 시국 하에 총후 황국신민으로 적성(赤誠)을 다하기를 기함.’-1938년 9월 10일 제27회 장로교총회 성명서 일부

‘동 경찰서에서 이도종(李道宗)에 대한 신문조서 중 본년 7월 초순, 나는 제주성내에 와서 길가에서 조봉호를 만나 동인은 내게 대하여 조선은 독립하게 되었으니 비용이 필요하므로 조선인은 하인을 불문하고 각 2원씩 돈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의 기재.’-독립희생회 군자금 모금운동 판결문문에서

일제시대 신사참배 문제는 교회의 패배로 종막을 고했다. 1938년 4월 25일, 서대문경찰서 2층에서 일선(日鮮) 교회 대표자들이 모여 신사참배는 물론,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하여 황도(皇道)정신을 발양하겠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 후 1938년 5월 8일, 부민관 대강당에서는 서울거주 일선 교도 일치단결을 도모하는 경성기독교연합회 발현식이 있었다. “40만 십자군병들아, 다 같이 일어나 총부보국의 보조를 맞추자”는 슬로건 밑에서, “자에 일층 전도에 정진하여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의 성을(誠)을 치(致)하기를 기함”이라는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1938년 6월 7일, 기독교의 일본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전조선기독교 청년연맹위원회를 서울YMCA회관으로 소집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반일운동에 앞장선 기독교인도 있었다.

사라봉 모충사에는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탑(殉國志士 趙鳳鎬 記念塔)’이 있다. 가로, 세로 10m의 십자가 기단 위에 20m 높이의 기념비 상부에는 한국 고유의 완자무늬가 있다. 십자가 기단은 기독교적 애국정신을 뜻하며, 완자무늬는 조국의 독립을 의미한다. 독립군 군자금 모금 운동 사건으로 복역 중 순국한 조봉호(趙鳳鎬, 1884~1920) 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립하였다.  

조봉호는 한림읍 귀덕리에서 태어났다. 이기풍 목사가 입도하기 전 이미 ‘자생적인 교회’ 금성교회가 태동하였다. 어려서 서당을 다녔고 서울로 유학하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설립한 기독교계 경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귀향하였고 23세 때 결혼하였다. 경신학교 재학 때 접한 기독교 신앙이 깊어 제주에 온 이기풍과 김재원·홍순흥·김행권·김봉호 등과 함께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야간 영흥학교를 개설하여 주민 교육에도 열성을 다하였으며 이기풍의 권유로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하였다.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서울에서 내려온 김창규는 최정식ㆍ조봉호에게 독립희생회를 제주지역에 조직해 줄 것과 회원 1인당 2원씩을 군자금으로 모금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최정식의 집에서 등사판을 이용 3종의 문서를 각 50매씩 인쇄한 다음 제주도 각 면사무소에 배부하였다. 이도종도 함께 참여하였다. 

최정식은 신좌면ㆍ구좌면ㆍ정의면ㆍ동중면에, 조봉호는 제주면 성내와 신우면 일대에 배포하였다. 그리하여 4,450명으로부터 1만 원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일본 경찰에 의해 7월에 조봉호 등 6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해 11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0년 4월 28일 옥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919년 기미독립만세를 축복하며 조봉호가 기록한 수첩이 독립기념관에 유품으로 소장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우리 삼천리 금수강산 2천만 민중이 손가락을 깨물어 선혈로 태극기를 그리고 손에 손에 드니 충천의 기개로다. … 동포 여러분! 분기하여 독립의 대도에 함께 매진합시다”라는 구절이 있다. 

1994년 3월 1일 기독교에서는 조봉호에게 내려졌던 3·1운동 이전의 출교라는 책벌을 무효화시켰고, 성내교회에서는 77년 만에 그에게 복권 조치를 내렸다. '신앙적 순교와 순국은 별개가 아니라 곧 하나다'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비록 죄를 지어 출교 처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순국은 용서받고도 남으며 장로교 종교 재판에 필수적인 피고소인을 위한 해명의 기회마저 허용되지 않았고 그의 잘못된 기록도 없다는 점에서 재판 절차상 무효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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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학원설립을 위해 만주에 갔을 때 정순모, 이도종, 안내인.

해방직후 제주교회

‘체포고발서에 강문호는 1919년 3월 31일 오전 10시 40분 군산지청 공판정 앞에서 군중 속에서 모자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은 자이므로 이를 체포하여 고발하였음을 종합하여 이를 인정할 증빙이 충분함.’-강문호 판결문 중에서

‘4·3의 혹독한 어둠 속에서 제주 기독교는 한치 앞을 예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대 제주 기독교는 참으로 지혜로웠다. 기독교는 우익의 입장이었지만 우익 단체에 가담하고 직접 좌익과 투쟁하는 선봉에 서지 않았다. 이도종과 조남수 그리고 강문호는 간접적으로 심정적으로 그들을 지원하고 협력하면서도 교회가 휘말리지 않도록 교육했다.’ - 박용규 저 『제주기독교회사』 중에서

‘고산지방에 갔을 때 이도종 목사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이분은 정년 은퇴가 아니라 여러 가지 사정이 생겨서 1942년부터 노회 및 교회와 상관을 끊고 귀농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해방된 오늘에 있어서야 나와 주지 않을까? 더욱 목사라곤 그분과 나만이 있는 실정인데…’-조남수의 『4·3 眞相』 127쪽

해방 후 개신교 반공주의는 '교회법'으로 보호받았다. 반공주의는 종교 이데올로기의 뒷받침을 받았다는 면에서 '성스러운 반공주의'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대립은 '악마와 천사 간 전쟁'으로 발전한다. 반공 투쟁에 나선 신자들은 성전(聖戰)에 참여한 '십자군'이 되며, 희생된 사람들은 '순교자'가 된다. 

제주사람들은 개신교에 대해 배타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제주4·3의 비극 때문이다. 그 학살의 주범이 바로 서북청년단 때문이 아닐까? 당시 서북청년단 구성원의 85%가 개신교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전국 개신교 인구비율에 비해 제주도가 유독 적은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 때문이며, 제주도 할머니들은 개신교라면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서청은 반공 사상이 투철했다. 목회자들이 설교 시간에 반공을 강조하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1948년 ‘4·3’이 발생한 이후 ‘낮이면 대한민국이요, 밤이면 인민공화국’인 세상으로 변모했다. 낮에는 경찰과 서청이 마을에서 의심되는 사람을 죽이고, 밤에는 무장대가 내려와 주민을 살해하는 등 집단학살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자신의 생명을 담보제로 내어놓고 학살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이도종과 조남수 그리고 강문호 목사이다. 무장대는 기독교인을 우익으로 간주하고 경계와 감시를 계속했다. 이도종이 산북지방을 맡고, 조남수가 산남지방을, 강문호가 동부지방을 책임지는 상황에서 흩어지는 교회들을 돌보았다.

조남수(趙南洙, 1914-1997) 목사는 한경면 조수리 출신으로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에 목사로 임직 받았다. 해방이 되고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이어 서귀면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오용국(吳龍國)이 위원장에 부위원장에 강성모(康性模)가 선출되었고, 그는 문화부장을 맡았다. 말년에는 그의 회고록 조남수의 『4·3 眞相』(1987)을 집필하여 일생 목회에 관련된 여러 가지 중요한 증언들을 남겼다.

강문호(康文昊, 1899~1986) 목사는 서귀포시 중문동 출신으로 강규언(姜圭彦)과 함께 최대현(崔大賢)의 전도에 의해 1914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두 사람은 전북 영명학교(永明學校)로 유학을 가서 재학하던 중 1919년 3월 5일 군산장날을 이용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규언은 보안법 및 출판물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고, 그는 소위 법정소란 및 보안법위반으로 1년 6월형을 선고 받았다. 강문호는 창씨개명 및 신사참배의 강요마저 끝까지 거부하였다.  

해방 전후의 시기에 교회 회복을 위해 더욱 분연히 헌신한 이도종, 강문호, 조남수 목사. 강문호 목사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21~22일 제16회 정기노회를 소집해 향후 제주교회의 재건을 위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당시 임원명단은 노회장에 강문호, 부노회장에 이도종, 서기에 조남수, 부서기에 문명옥, 회계에 고상봉, 부회계에 장양선이었다. 제주노회는 1946년 1월부터 제주성경학교를 다시 개강하였고 각 교회의 제직들을 교육하여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중점을 두었고 제직들이 70여명이 모여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도종 목사는 다시 교장을 맡아 1948년 6월 순교하기까지 제주교회 일꾼양성을 위해 수고하였다.

1946년 제주에는 이도종, 강문호, 임기봉, 조남수, 김용모, 최희준 목사가 있었고 이도종목사는 8개처, 강문호 목사는 12개처 교회의 당회장을 맡아 부지런히 순회하였는데, 서귀포지역은 조남수 목사, 제주 성내지역은 임기봉 목사가 맡아 교인들을 돌아보았다. 

또한 이들 목회자들이 170여개 부락에서 학교나 향사를 빌려서 순회 사상 강좌를 개최하였다. 순회강연회는 미 군정청 당국의 의뢰를 받고서 이루어진 행사였으나, 동시에 복음 전도의 기회로 활용함으로서 이도종, 강문호, 임기봉, 조남수 목사 등은 복음 설교와 함께 ‘공산주의에 빠지지 말자’는 제목의 강연을 계속하였다. 이도종 목사는 유해진 제주도지사가 제공한 트럭을 타고 다니며 ‘기독교와 건국’이라는 강연을 마을과 교회마다 다니며 하였는데  좌우익의 대립이 극한으로 달렸기 때문에 우익 편에 선 기독교를 좌익들이 그냥 좌시하고 있지 않았다.  

하루는 삼양지방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국민의례 중 애국가에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대목을 동원된 좌익 사람들이 큰 목소리로 ‘조상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애국가 제창이 끝난 후 이도종 목사가 청중을 향해 지금 부른 애국가 내용이 잘못되었으니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부르자고 제의했다. 그 대목에 와서 ‘주먹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것이 아닌가? 좌중에서는 소동이 일어났다. 방해꾼들의 아우성이 계속되자 도저히 강연회를 할 수 없어서 집회는 취소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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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교회 입구.

이도종의 순교와 개신교 피해

‘1949년 3월 12일 하오 7시 한림교회 사택에서 노회 임원회를 소집하여 악화된 도내 사정과 교통사정으로 인해 정기노회를 무기연기하기로 하고 노회(老會)적으로 긴급한 것은 임원회에서 토의하기로 하였다. 동년 6월 고산교회당에서 노회를 소집하여 4·3사건으로 순교 또는 희생당한 성도들을 위한 추도식을 노회장 강문호 목사의 사회로 엄수하였으며, 소실된 교회에는 노회에서 20만 원씩을 보조하였다.’-대한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 편저 『濟州宣敎70年史』 65쪽 

이도종은 조봉호가 주도한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모금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제주도 1호 목사로 16년간 10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1948년 4·3사건이 일어난 그 해 6월 16일, 순회예배를 위해 고산을 출발해 인성· 화순교회 순방을 위해 나섰다가, 무장대의 돌에 맞아 생매장되었다. 허성재 장로도 4·3에 순교하였다. 

이도종은 대정읍 신평리 인향동 인근 중산간 도로에서 무장대에 의해 납치, ʻʻ양놈의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ʼʼ, ʻʻ미 제국주의의 스파이ʼʼ라는 혐의로  구덩이에 생매장되었다. 당시 55세.  무장대는 왜 이도종을 생매장한 것일까? 저들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항쟁하고 친일파를 배척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반동으로 몰아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남로당에 가입하지 않은 자, 5·10선거에 참여하려는 자, 선거관리인, 지하선거 비협조자, 식량이나 물건을 지원하지 않은 양민들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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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교가 그렇게 좋다면 공산인민이 이 싸움에서 이기도록 기도 좀 해 주시겠습니까?”하는 조롱 섞인 질문에 이도종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죄 없는 양민을 죽이는 무신론집단의 승리를 위해 기도할 수 없소.”  죽음의 문턱에서도 계속 찬송을 부르고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기도로,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고 순교했다. 

모슬포 항구에서 가까운 곳에 대정교회가 있다. 그 교회에는 <이도종 목사 순교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와 기념종도 함께 있다. 밖에서 들어온 종교에 대한 근본적 거부감이 있는 무속의 섬 제주도를 일깨우기까지는 ‘종교의 길’(道宗)이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제주 방방곡곡을 누비다 순교를 당함으로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진 것이다. 

제주기독교는 한 치 앞을 예견할 수 없었던 상황. 우익의 입장이었지만 우익 단체에 가담하고 직접 좌익과 투쟁하는 선봉에 서지 않았다. 이도종과 조남수 그리고 강문호 목사는 간접적으로 심정적으로 그들을 지원하고 협력하면서도 교회가 휘말리지 않도록 교육했다. 

‘미국의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무장대들의 손에 붙들려 생매장 당한 이도종. 정부도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경찰관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양민과 폭도를 구분하지 낳고 폭압적인 방법으로 제압하여 민중의 반감을 샀다. 무장대는 이도종을 미국인의 스파이로 보고 생매장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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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종 목사 기념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에서는 일찍이 『濟州宣敎70年史』를 발간하였다. 여기에서 이도종 외 17인의 순교자 및 희생자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거의가 ‘공비’에게 피살되었다는 사실이며, 군인의 차에 치여 사망한 허영국(모슬포교회), 국군오발로 사망한 고창선(모슬포교회), 폭도혐의를 받고 국군에게 피살된 지성익(대정영락교회)과 지성익의 동생(대정영락교회) 등도 거론하고 있다. 무장대에게 피살된 희생자를 보면, 이도종(화순교회 목사), 허성재(모슬포교회 장로), 부양은(김년교회 집사), 진시규(중문교회 집사), 오대호(중문교회), 진학인(중문교회), 임명선(서귀포교회), 오병필(서부교회), 오병필의 동생(서부교회), 최순임(모슬포교회), 권찰(삼양교회), 학생(삼양교회), 김승은(두모교회) 등이다. .

『濟州宣敎70年史』에는 또 교화와 교인의 재산피해도 열거하고 있다. 그것들을 살펴보면 ■공비에 의해 소각 당한 교회당은 서귀포· 협재· 삼양· 조수 ·세화(사택)등 다섯 교회이며 ■공비에 의해 소각당한 가옥은  모슬포 1채· 영락 4채 ·협재 6채· 인성 3채 ·성읍 2채·서귀포 1채 ·중문 2채· 삼양 20채 등 모두 40채이며 ■ 수개에 의해 소각당한 가옥은 조수 30채· 영락 11채· 한림 11채· 인성 2채· 남원 3채 ·청수 10채 등 모두 67채이며 ■공비에 의해 약탈당한 가옥은 삼양 1채· 외도 5채· 금성 1채· 서귀포 1채· 인성 1채· 영락 1채· 모슬포 3채· 고산 3채 등 모두 16채라고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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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남수 목사 공덕비.

조남수와 문형순의 대화

‘좌익청년들은 무슨 학습을 한답시고 밤에 비밀집회를 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교회에서는 공개적으로 대중집회를 계속하였다. 전도적으로 교회당이 있는 소재지에는 빼지 않고 4·3사건 이전까지 전도를 순방하면서 북치고 노방전도하며 야간에는 대중전도 집회를 열었는데 한번도 충돌이 없었다.’-조남수의 『4·3 眞相』 27쪽 

해방이 되었을 때 제주에서는 조남수 목사 혼자서 사역하고 있있다. 조남수는 이도종 목사를 찾아갔다. 이도종은 교회와 관계를 끊고 귀농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도종은 조남수의 간절한 청원에 항복하고, 산북은 이도종이 산남은 조남수가 맡기로 하고, 육지부에서 사역하고 있는 강문호 목사까지 청빙하였다.  

조남수는 1948년 11월 20일 새벽 집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았지만 골방에 숨어서 무사하였다. 날이 밝자 모슬포경찰서 문형순 서장을 찾아갔다. 그 후 11월 25일부터 선무강연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을 주위에 축성을 쌓아 무장대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다음은 작가 오성찬의 『한라의 통곡소리』에서 뽑은 조남수와 무형순의 대화내용이다.

조남수 : 최근 수 주간에 걸쳐서 교회 내의 장로, 집사, 직원들 짐만 골라 습격하여 살해 방화 약탈살상을 계속하더니 오늘 새벽은 나의 집까지 포위하여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데 죽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오늘밤 일도 기약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나는 죽더라도 내 소신을 밝히고 공비의 손에 죽기보다도 아군의 손에서 죽기를 결심하고 나왔습니다.
문형순 : 우리가 제주도에 와서 수개월이 됩니다. 지방 인사로서는 목사님과 처음으로 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좋으니 허심탄회하게 애기하여 주십시오!

조남수 :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일이 있습니다. 밤에는 공비들의 흉기에 양민이 죽고, 낮에는 군경의 총에 양민이 매일같이 죽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서로 죽이다 보면 30만 도민이 모두 죽겠으니 백성 없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말입니까?
문형순 : 우리가 알고 오기는 제주도가 좌익운동의 온상지라고 듣고 왔습니다. 도민들은 거의 가 우리를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과 처음 대화라는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물증이 있습니다. 한라산 토벌에서 노획한 불온문서인데 부락민 90%가 공비들에게 식량을 비롯한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게 된 목적은 바로 이들 공산당을 소탕하는데 있습니다.

조남수 : 제가 충고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제주도는 일본과 가까워서 일본 유학한 분들이 많고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많습니다. 이분들이 애국운동·사회운동을 하다 보니 좌익으로 몰린 분도 있고 또한 과격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모두 숙청되고 도피하고, 현재 남아있는 자들은 극소수의 부화뇌동한 사람들이며 공산당의 ‘공’자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방금 보여주신 볼온 문서명단을 중요시하셨는데 그것 역시 결코 동조한 것이 아닙니다. 철야삼경에 무장공비가 나타나서 총기를 들이대고 내 놓으라는 것을 누가 감히 불응하겠습니까?
문형순 : 그것이 목사님이 보는 시국관입니까?

조남수 : 아닙니다. 도민에 대한 인식의 차이점과 사리판단에 대한 차이점을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현시국에 대한 나의 관점과 사태수습에 대한 나의 복안은 나름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문형순 : 어떤 말씀을 하셔도 좋으니 견해를 숨김없이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조남수 : 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그 하나는 중간기로에서 고민하고 있는 민중을 어떻게 아군편으로 전향시키느냐는 문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면 공비 토벌을 신속하게 끝내느냐는 문제입니다. 중간기로에서 고민하는 민중이란 말은 그 동안에 인민공화국 지상이 되어 금방이라도 별유천지나 될 것처럼 선전하던 사람들은 모두 도주했거나, 숙청되는 실정을 똑똑히 보와 왔기 때문에 민중은 좌익의 감언이설에 속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군경 편으로 선뜻 돌아설 수 없는 것은 군경은 무서운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 중에는 살기 위한 수단으로 본의 아니게 물품을 제공한 죄책감에서, 걸리기만 하면 죽는다는 공포심에서 우향도 좌향도 못하고 중간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민중을 아군편으로 전향시키면 모든 정보와 동태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입수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형순 : 그분들을 우리 편으로 돌아설 수 있게 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조남수 : 주민들의 의식구조의 변혁이 큰 과제가 될 것입니다. 밤중에 물건을 내어준 것은 살기 위한 수단으로 한 것이니 절대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용기를 얻게 하고, 군경은 국민의 생명 재산을 지켜주는 국민의 보호자요 민중의 친구라는 점을 인식시키고 자수만 하면 절대로 용인하는 어버이같은 입장임을 인식시켜 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문형순 : 공비 토벌을 신속히 알 수 있는 비결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엇인지요?

조남수 : 공비들이 출몰하는데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으로서는 공비가 침입하면 독 속에 든 쥐 잡듯 하는 생포작전의 비결입니다. 제주도에는 무진장으로 쌓여 있는 돌이 있습니다. 이 돌을 이용하여 각 부락마다 축성으로 둘러쌉니다. 3미터 이상 높이를 쌓고 입출구는 한 군데만 냅니다. 출입구에는 부락청년들이 돌아가며 불침범을 서면 경찰병력 소모도 절약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공비 출몰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대담하고 무모한 공비가 월성하여 들어왔을 경우에는 이는 독 속에 들어있는 쥐의 신세가 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주민과 공비와의 연락이 차단되고, 식량공급이 끊어지고, 습격이나, 연락, 납치사태가 근절될 것은 분명합니다. 보급이 끊어지면 공비들은 미구에 굶어죽든지 탈출, 도주하든지, 살기 위해서 귀순하든지, 삼자 택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문형순 : 한마디로 말해서 대단히 훌륭한 착상입니다마는 그것의 실현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생각대로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부락 주위를 모두 성으로 드른다는 게 그게 어디 용이합니까? 몇십 미터나 몇백 미터입니까? 부락이 하나 둘입니까?

조남수  : 우리 도민들은 밤잠을 못잔 지가 5~6개월이 더 됩니다. 부락민들의 남녀노소를 모두 동원한다면 작은 부락은 15일, 큰 부락은 한 달이면 넉넉히 완성합니다. 시험 삼아 어느 한 부락만이라도 해 보십시다. 절대로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저의 착상이 아닙니다. 제가 이 난국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얻은 착상입니다. 나는 하느님이 주신 계시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실천에 옭기기만 하면 꼭 성공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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