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하게 혹은 핏방울 흩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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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레코드] (33) Dead Inside /  The Caulfield C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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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aulfield cult ​/ ​godard split 7" / The Caulfield Cult (2014)

내가 아이였을 때 거울 앞에서 아버지가 면도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따라 면도를 하고 싶어 했다. 비누 거품을 잔뜩 묻히고서 슥슥 면도를 하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턱밑에 수염이 나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버지가 싫어졌다. 비료공장 일이 끝나고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온 아버지는 탁상시계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그런 다음 날 아버지는 면도도 잘 하지 않은 얼굴로 출근을 했다. 내가 처음 면도를 할 때는 서툴러 면도날에 베기도 했지만 그런 상처가 어른이 되어가는 표식쯤으로 생각했다. 젊은 날에 항상 면도를 깔끔하게 하던 아버지는 점점 면도를 하는 날이 줄어들었다. 오늘 아침 흐린 거울 아래 아버지의 면도기는 날 한쪽이 녹슬었다. 가끔 술에 취해 들어와도 더는 무엇을 집어던지지 않는 아버지. 날카로운 세상에서 아버지는 능숙하게 면도를 했는데 이젠 잘 베지도 않는 무딘 면도기는 습기만 있어도 녹이 슬어간다. 이제 나도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가는데 날선 세상에 대항하지도 못하고, 사춘기 시절 영광의 상처쯤으로 생각했던 생채기도 나지 않게 조심조심 면도를 한다. 면도의 역사는 상처와 피의 역사라는데 피 한 방울을 두려워하고 있다, 나는. ‘Ssighborggg’의 음악은 깔끔하다. 깨끗하게 면도를 한 얼굴의 아침 같다. 때론 피 뚝뚝 떨어지는 아침. 싱가포르의 아침, ‘The Caulfield Cult’에도! /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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