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집] 제주 상도리 정시훈씨 ‘26년 재직’ 곧 마감 “주민 아니면 못버텼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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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직 이사무장 중 전국 최고령인 정시훈(76, 상도리)씨. ⓒ 제주의소리 문준영 기자

“어~ (오후)3시까지 이리로 와!”

대뜸 한마디 하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중에 느꼈지만, 나름 상대를 편하게 대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시훈(76)씨. 인구 372명의 작은 마을,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 이(里)사무장이다. 현역 이사무장 중 전국 최고령이다.

손자 재롱 볼 나이도 넘었는데 이사무장이라니. 언제부턴가 ‘(리)서기’에서 ‘사무장’으로 격(?)이 높아졌다고는 하나, 예나 지금이나 이사무장은 마을의 일을 죄다 챙겨야 하는 심부름꾼이다.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은 필요할 때만 스스로를 ‘국민의 머슴’으로 낮춰 부르지만, 이사무장이야말로 제대로 그 역할을 한다.    

더욱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무려 26년이나 이사무장으로 재직했다는 사실이다.  

강산이 세 번 가까이 변할 동안 마을회관을 지킨 그를 가리켜 이장 정태훈(67)씨는 “우리 마을의 산 증인”이라고 했다. 

비결이 뭘까 궁금했다. 사연도 남다를 것 같았다.

‘전국 최고령 이사무장’, ‘26년 재직’, 그리고 올해말 퇴임...

기자로서 구미가 당겨 한달음에 달려갔다. 회관을 찾은 건 동장군이 맹위를 떨친 지난 17일 오후. 

바깥에는 세찬 눈보라가 휘몰아쳤지만, 정씨는 업무 처리에 여념이 없었다.

“비결은 따로 없어. 이장도 잘 해주고, 주민들도 잘 도와주니까 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못했을 걸!”

인터뷰 내내 정씨는 ‘26년의 비결’을 주민에게 돌렸다.

솔직히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그 때마다 늘 자신을 존중해준 이장과 주민들이 눈에 밟혔다. 결정적으로는, 26년 몸에 배인 습관이 ‘무조건 반사’처럼 그를 다시 마을회관으로 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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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 강윤정 후임 사무장 예정자, 정시훈 사무장, 정태훈 이장. ⓒ 제주의소리 문준영 기자

1988년 시작한게 어느덧 26년, 호흡 맞춘 이장만 9명...전부 손 아래 

“여러번 (생각)했지. 몸이라도 아프면 더욱 그렇고. 그만둘까 하다가도 해난(늘 하던) 거니까 습관이 돼서 아무리 아파 죽어가멍도(죽도록 아파도) 할 일은 꼭 해놓고 여기(마을회관)서 누워 자든지 했지”         

그가 사무장을 시작한 것은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9월. 당시 이장이 도와달라길래 선뜻 응했다. 그때 나이 51세.  

몸이 약해 농삿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도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게 했다. 사실 농사라고 해봐야 부인 부인생(77)씨가 도맡다시피 하는 당근밭 800평이 전부다.  

“1년, 또 1년 하다보니 이렇게 된 거야” 당시만 해도 20년 넘게 사무장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26년동안 그와 호흡을 맞춘 이장만 9명.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장은 한명도 없었다. 빈틈없이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은 사무장의 기본. 성격도 웬만큼 무던하지 않고서는 어려울 법 하지만, 정 씨는 그것 역시 이장과 주민들이 잘 봐준 덕 이라고 했다.

“젊은 사람에 비해 일처리, 기억력 떨어지는 것 없고, 머리가 완전히 컴퓨터우다. 동네 분들 주소, 전화번호, 심지어 밭 번지까지 머릿속에 꿸 정도니까. 자료를 뒤져보기도 전에  ‘누구’ 하면 번호가 줄줄 나옵니다”

이장의 칭찬은 그칠 줄 몰랐다.

“이장이 9~10번(연임 포함) 바뀌어도 큰 트러블 없이 마을을 잘 운영해왔수다. 모든게 숙달돼 있으니까 이장이 외지에 나가 있어도 사무장님만 있으면 안심이 됩니다. ‘토요일에는 나오지 맙서’(토요일에는 나오지 말고 쉬세요) 해도 꼭 나와서 일을 처리하니까”    

농사짓기가 어려운 마당에 정씨에게 사무장이라는 자리는 그나마 손자 셋을 어엿하게 키울 수 있었던 밑천(?)이 아닐까 싶었다.(정작 정씨는 부인이 무진장 고생한 덕분이라고 했다)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지만, 아들은 나이 삼십에 불의의 사고로 자녀 셋을 남겨두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거둘 수 밖에 없었다.

이사무장으로서 요즘 정씨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하는 단어는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그 때(과거)는 거의 다 발로 뛰었지. 뭐 하나 신청하거나, 신청받으려 해도 직접 (읍사무소나 각 가정을)찾아가야 했으니까. 지금은 컴퓨터가 다 해주잖아. 나중엔 나도 안되겠다 싶어 컴퓨터를 배웠지. 워드(Word, 문서작성) 밖에는 못하지만.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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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시훈 사무장이 마을회관에서 안내방송을 하고 있다. ⓒ 제주의소리 문준영 기자

‘발품’에서 컴퓨터로 ‘격세지감’...“이사무장이 뭐냐고? 주민의 머슴이지”

희수(喜壽)를 앞둔 촌로의 입에서 나온 컴퓨터 용어가 낯설게 느껴졌지만, 그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연신 ‘정보화시대’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제 그만 젊은 세대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이미 정씨의 후임은 정해졌다. 무려 37살 아래의 강윤정(39)씨다. ‘새내기 사무장’ 치곤 젊지 않은 나이지만 강씨는 “모르는 거 있으면 정 사무장 님을 귀찮게 해드려야 할 것 같다”며 정씨의 경륜에 존경심을 표했다.

퇴임-원래는 올해말 퇴임이지만, 내년 1월 정기총회까지는 떠날 수 없는 처지다-을 앞둔 요즘 정 씨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무엇보다 이장들 한테 제일 미안하지. 다 나보다 밑이니까 존댓말을 못했어. ‘O이장’ ‘△이장’이라고만 불렀지, ‘님’자를 못붙였거든. 이게 습관이 되어버리니까...이장님들이 나를 잘 봐준 거지” 

여느 조직이든 수장을 보필하는 사람은 도드라지지 않는 법이다. 마을 행정을 처리하는 이사무장은 더욱 그런 편이다. 

‘베테랑 사무장’ 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26년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농익은 대답을 기대하곤 이사무장의 정의(定義)를 물었는데, 짧고 임팩트있는 답변이 돌아왔다. “뭐 주민들의 머슴이지”

후임자에겐 “주민들한테 욕 안 듣게만 하면 돼. 이장 잘 보좌하고. 주민의 심부름꾼이다~ 생각하면 잘 될 거야”라고 조언했다.

정씨는 기자와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철저히 자신을 낮췄다. 

“내 얘기는 나쁜 것만 쓰고, 좋은 것은 절대 쓰지 마라. 주민들이 뭐라고 하겠나”

정작 머슴이어야 할 사람들이 말로만 머슴을 외치면서 주인행세를 하는 ‘오버’가 넘치는 세상. 직분에 충실하라는 일깨움을 촌로에게서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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