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범 칼럼] 올해의 사자성어

지록위마(指鹿爲馬)

21세기 초입도 훌쩍 넘어 2015년을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지금, 21세기 우리 정치판은 70~80년대 개발도상국 정치로 회귀한 듯 하더니 급기야 한나라 말기 삼국지에서나 읽던 십상시 얘기가 화두가 됐다. 그것도 모자라서였을까. 시간적 감각의 어지러움을 채 가누기도 전에 대한민국 교수들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진나라 말기 환관 조고와 황제 호해 간 일화에서 유래된 지록위마를 선정했다.

알다시피 지록위마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뜻한다. 높아도 아득히 높아 미처 쳐다보지도 못할 나라님 앞에서 한 줌도 안 되는 일개 환관이 뻔한 거짓말을 서슴지 않으니 나라가 곧 망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십상시나 조고나 모두 망국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환관들이다. 그들은 뛰는 숭어 따라 함께 날뛴 망둥이가 아니라 눈 먼 숭어 대신 설쳐댄 망둥이들이였다. 그들이 임금을 눈이 멀게 한 것인지 아니면 임금의 어리석음이 그들을 오만방자하게 만든 것인지는 따지고 싶지도 않다. 분명한 사실은 나라가 망하는 곳이면 어김없이 막강한 권한만 있고 책임은 지지 않는 이른바 비선들이 정치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록위마의 일화에는 주인의 귀에 달콤한 얘기만 늘어놓는 간신배들의 시커먼 뱃속에 숨은 칼날은 결국 주인을 향했다는 역사적 교훈이 들어있다.

호가호위(狐假虎威)

하지만 지록위마를 선진 한국의 정치판에 적용시키는 것이 가당치나 한 것인가. 어느 교수는 비선 실세 의혹 등 “국민이 알고 싶은 것은 밝히지 않고 본질을 호도한 경우”를 지록위마의 예로 들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청와대 비선 문건들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여론의 수세에 몰린 청와대가 허겁지겁 여권중진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청와대 실세는 진돗개”라는 농담을 던진 것은 어떨까? 이날 청와대 회동에서 이른바 찌라시 문건에 적힌 정보에 대한 진지한 해명과 청와대 조직의 난맥상에 대한 정중한 사과를 기대했던 국민들에게는 하나도 웃기지 않는 썰렁한 농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정권의 정치인들은 유별나게 진돗개를 좋아하는 것 같다. 대통령부터가 “쓸데없는 규제는 우리의 원수”라며 “한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겨 나갈 때까지 놓지 않는 진돗개”처럼 규제 철폐에 임하겠다는 섬뜩한 말씀을 하신 바 있다. 앞의 비유는 빼고 그냥 규제 철폐에 전력하겠다고만 하셨더라도 대통령의 무게 있는 말씀이니 충분히 먹혔을 것을 굳이 “진돗개”를 들먹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요즘 비선 실세로 지목된 인사도 자신의 내용이 담긴 문건 유출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는 한 언론사 회견에서 이제는 토사구팽당한 사냥개에서 벗어나 진돗개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진돗개를 자신들만 좋아하면 그만이지 굳이 공적인 일까지 진돗개를 연결시킬 필요가 있을까. 그렇잖아도 영리함과 용맹스러움에 있어 타견들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진돗개가 주인을 물어 죽인 사건들이 심심찮게 기사로 오르내리는 판이다. 그래도 진돗개처럼 되겠다니 정치인들의 진돗개 사랑은 정말 남다르기만 하다.

주객전도(主客顚倒)

그래서일까. 아무리 정치인들의 생리가 그렇다 해도 요즘 정국에서는 집에서 기르는 개가 주인을 무는 느낌이 특히 강하다. 세월호 참사로 삼백 명이 넘는 소중한 목숨들이 희생됐음에도 그들은 제대로 사고원인과 구조 책임에 대한 진상규명도 하지 않은 채 자식의 죽음을 가슴에 묻었던 단원고 학부모들의 피눈물을 외면하고 경제 살리기를 해야 할 때라고 외쳐댔다. 그들에게는 ‘꽃보다 아름다운’ 학생들의 목숨보다 돈이 더 아름다웠던가. 이것이야말로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현혹하는 지록위마가 아니고 무엇인가. 선거철에만 “뼛속까지 바꾸겠습니다”라고 읍소하며 악어의 눈물을 흘렸던 그들은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로 악어였던가 보다.

그래도 경제를 살리겠다는 그들의 말만큼은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지금 그 결과를 보면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비판도 욕으로는 차라리 아까울 정도다. 그들의 사전에는 경제 살리기가 서민 죽이기와 동의어로 쓰여 있는지, 그리고 형평세란 단어는 아예 빠져 있는 것인지. 담뱃값 대폭인상에다가 주민세, 자동차세까지 줄줄이 인상한단다. 거기에다가 무모한 부동산투기 규제철폐와 무리한 금리인하 정책으로 아파트 값 부양에만 신경 쓰느라 주거비용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바람에 집 없는 세입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빈대 잡느라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 돼버렸다. 봉급쟁이들은 ‘13월의 세금폭탄’까지 맞을 판국이고 곳간에 인심 났던 학교 무상급식마저 예산타령으로 없애버리고 있다. 

이것들이야말로 국민들을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호갱쯤으로 보는 현대판 지록위마가 아닐까. 자신들을 키워낸 주인을 무는 못된 진돗개의 ‘주객전도‘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정치인들만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이다.

지민위천(指民爲天)

본래 한문에 어두운 필자는 개인적으로 올해 사자성어를 ‘가렴주구’로 설정했었다. 제 무식한 까막눈으로 끝의 두 글자 ‘주구’가 ‘개’를 뜻하는 것쯤으로 어림잡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을 의미한단다. 세금을 꼭 올려야 할 정당한 명분과 이유가 있다면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들의 소중한 세금을 무책임하게 흥청망청 탕진한 전 정권의 이른바 ‘사자방 비리’의혹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기르던 개에게 물린 듯한’ 찝찝한 기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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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헌범 제주한라대 교수.
내년부터라도 정치인들이 진돗개가 아니라 제발 사람다웠으면 좋겠다. 정치인들은 그래도 명색이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들이 아닌가. 왜 자꾸 개처럼 되겠다고 하는 것인지. 부디 “사람을 개로 여기는” 지인위견 (指人爲犬) 대신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지민위천(指民爲天)하는 정치인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 김헌범 제주한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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