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목회자들은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사역합니다"

▲ 김응창 목사님의 영정.ⓒ 장태욱
개그맨 김형곤씨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한 지 불과 4일만인 지난 13일에 제가 평소에 알고 지냈던 김응창 목사님이 비슷한 원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김 목사님은 제가 고향에 살 때 다녔던 위미교회에 부목사로 사역을 감당하시다가 농촌목회에 뜻을 두고 남제주군 대정읍 신도리에 있는 신도교회라는 작은 교회에 부임하셨습니다.

1960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신 김응창 목사님은 어릴 때 불어닥친 가정의 어려움으로 소년 가장으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다가 어렵사리 숭실대 영문과를 마치고, 장로회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신 다음 목회자의 길을 걸으셨다고 합니다. 1997년 위미교회의 초빙으로 제주에 오신 목사님은 1999년 신도교회에 부임하시고 만7년 동안 헌신적으로 목회에 전념하셨습니다.

얼마 전까지 김민수 목사님이 목회사역을 하셨던 종달리교회가 제주도의 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면, 신도교회는 제주도 서쪽 끝에 있는 교회입니다. 신도리 마을은 제주도에 위치하면서도 귤 농사도 되지 않아, 예로부터 주민 대부분이 감자나 마늘 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촌입니다. 해마다 인구가 감소하여 초등학교는 이미 폐교되었습니다.

▲ 신도교회입니다. 예배당이 너무 작아서 장례예배에 참석한 분들을 다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장태욱
워낙 목회환경이 열악했던지라 교회당은 비어 있었고, 목사님 가정은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사모님과 딸은 건강이 여의치 않아 병원 출입을 자주 했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정작 목사님은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병원에 가서 검진 한 번 제대로 받을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도내 많은 목회자들이 신도교회를 방문해보니 교회나 목사님 가족들에게 장례를 치를 비용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목회자들이 돈을 모아서 임시비용을 마련했습니다.

▲ 예배가 끝난 후 영정과 관이 운구에 실리기 직전입니다. 왼쪽이 아들 희재이고 오른쪽이 딸 은재입니다.ⓒ 장태욱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16일(목)에 신도교회를 다녀왔습니다. 교회당은 너무 작아서 도내에서 모여든 조문객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 제주시 양지공원입니다. 목사님의 시신이 이곳에서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장태욱
장례식이 끝나니 시신이 운구차에 실려 제주시에 있는 양지공원으로 이동했습니다. 목사님의 죽음이 너무 안타까웠는지 대부분 조문객들이 양지공원으로 함께 이동했습니다.

▲ 양지공원에서 시신을 화장하기 전에 예배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목사님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많은 분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셨습니다.ⓒ 장태욱
양지공원에서 예배를 드린 후, 시신은 화구를 향해 들어갔습니다. 관망실이라 쓰여진 곳에서 가족들의 오열이 터져나왔습니다.

▲ 시신이 화구에 들어가지 직전의 모습입니다. 가족들의 오열에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장태욱
“내가 죽어야지, 목사님이 왜 먼저 가시냐”는 사모님의 절규에 모두들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 시신을 보내고 난 뒤 허탈해하는 가족들의 모습입니다.ⓒ 장태욱
화장이 진행될 동안 조문객들과 유족들이 식당에서 삼상오오 모여 점심식사를 할 때 테이블에 모여 앉은 모습을 보니 농촌의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들과, 비교적 규모가 크고 여유 있는 교회의 목사님들끼리 서로 다른 테이블에 모여 식사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북제주군의 어느 작은 농촌교회에서 사역하신다는 한 목사님은 자신의 소회를 솔직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장례식에서 낭독되었던 조사(弔辭)를 들어보셨나요? 그 조사에 나와 있는 내용이 바로 우리 농촌교회의 젊은 목회자들의 심정입니다. 농촌교회의 젊은 목회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심정으로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지, 그러면서도 왜 굴욕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살아야 하는지 이제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평소에 좋은 인상을 주셨던 젊은 목사님의 안타까운 소식에서 문득 70년대 평화시장에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 열사의 절규와 현대중공업에서 정규직 노조의 차가운 외면 속에 장례가 치러졌던 비정규직 노동자 박일수씨의 죽음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동일노동에 대하 차별 금지’를 위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 교계에서는 같은 종류의 사역에 대해 주어지는 목회자간 임금격차가 10배가 넘는 불합리함이 언제면 해소될까요? 농촌에서 모든 인간적 유혹을 뒤로 한 채,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농촌목회자들을 위해 교회 전체가 나서서 할 일을 찾아야 할 때라 생각했습니다.

조사(弔辭) 고 김응창 목사님을 보내며 
- 서성환 목사 쓰고 고남수 목사 읽다 -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응창 목사님
함께 평양대부흥운동 제주세미나를 위해 의논하고, 이어 제주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함께 웃으면서 운동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헤어진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이런 일을 만나다니 도저히 믿어지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망연자실 할 뿐, 차오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사모님과 어린 자녀, 은재와 희재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이제 마지막 중보기도회가 되었던 지난 월요일기도회에서도 목사님은 은재의 건강회복과 장로님의 감귤처분을 위해 기도하셨지요. 마지막 오찬 자리에서도 일전에 심근경색으로 유명을 달리한 개그맨 김형곤씨 이야기를 하시면서, “김형곤씨와 내가 동갑인데,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찾아줄까?” 라고 말하면서 사모님과 어린자녀들 염려를 하셨지요.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들과 교회와 동역자들을 뒤로 하고 어찌 이리 황망하게 떠나신 것입니까?

[중략]

우리는 제주의 농촌목회와 선교가 뜻하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건 세상적인 화려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세상적인 성공과도 상관없습니다. 때로는 도시의 성도들과 교회들에게 무시도 당하고 목사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굴욕감과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소위 잘 나아가는 목사들과 교회 중진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그 모멸감에 몸을 떨어야 하기도 합니다. 스스로도 자괴감과 소외감과 상실감에 몸부림치기도 합니다. 정말 한숨과 눈물이 섞이기도 합니다. 세상 적으로야 목사님 내외만큼 학벌 좋은 사람들도 얼마나 있겠습니까? 귀한 성품과 신실함에서 목사님 내외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겸손함과 인내에서 목사님 내외분을 따를 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내외분은 그런 것 어느 하나 내색조차 하시지 않으셨지요. 그저 시골의 이름 없는 농부와 같은 모습으로 봉사하고 섬기셨어요. 우리 주님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갔던 것이지요. 김 목사님과 달리 우리들이 사는 모습을 우리 주님이 보시면서 너무나 낯설어 하실 것만 같아요. 생각해 보면 우리 주님 예수님을 정말 김 목사님 같은 그런 모습으로 사셨지요. 7년 동안 그렇게 신도교회와 제주선교를 위하여 너무나 애쓰고 수고하는 모습을 우리 주님이 보시면서 안스러워 “더는 안 되겠다. 이제 되었다”하시고 품어 안으신 것이지요.

[중략]

신도교회나 제주선교의 짐도 벗어 놓으세요. 하나님께서 남겨놓으신 목사님의 동역자들을 통해 이루실 것입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으시고 주님의 잔치자리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세요. 언젠가 우리 모두 엊그제 오찬을 나누었던 것처럼 주님의 잔치자리에서 만납시다. 그때까지 주님 안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면서 편히 쉬소서. 아멘

 

※ 장태욱 기자는 '제주예안교회' 평신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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