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도민 기아상태…가축사료로 끼니 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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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배의 도백열전(22)] 제7대 도지사 길성운⑦

제주도제 폐지안에 대한 도민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있을 때였던 1956년 10월1일 제주대학장을 34개월동안 겸직하고 있는 길성운 지사가 학장직에 물러나고, 후임에 충남 천안 출신으로서 전남지사와 충남지사·문교부차관·국회사무총장·국학대학장을 지낸 박종만(朴鍾萬)이 취임했다.

제주대학은 설립이후 처음으로 전임 학장을 두게 된 것이었다. 이날 저녁 제주대학동창회가 주최한 신·구 학장 이·취임식 축하연에서 길 지사는 "몸은 비록 대학을 떠나지만 도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계속 대학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인사한 뒤에 구성진 노래솜씨를 선보여 좌중으로부터 「음백(音伯)」이라는 별명을 붙기도 했다.

이어 신임 박 학장은 길성은 지사를 두고 "「吉할 운수로 聖스럽게」 제주대학을 이끌어온 前학장인 길성은 지사에 이어 나는 순박할 朴처럼 대학을 순수하게 이끌어 나가겠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박 학장은 부임 4개월만인 1957년 1월28일 출장중 서울 자택에서 갑자기 숨짐으로써 길 지사가 다시 학장을 겸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새로운 학장을 맞이한 제주대학은 제주출신 강경옥 국회의원이 9월23일 창경원에서 열린 재경도민회 야유회에서 강 의원이 설립한 배성대학의숙(培聖大學義塾)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제주대학은 학생들의 출석률이 10%에 밖에 되지 않고 학생들은 다방에나 드나들고 거리의 어깨 짓이나 하고 다니지만 내가 세운 배성의숙 학생들은 출석률이 90%이상으로 양호하고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발언으로 제주대학생들을 크게 자극했다.

제주대학생들은 긴급총회를 열고 강 의원의 발언을 규탄하는 동시에 제주신보에 「제주대학도 일동」이라는 이름의 광고를 내고 "우리들은 강경옥 의원의 발언을 선의로 해석하고 충고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너무도 지나치고 독선적인 폭언에 항변하며, 결석자라고 밝힌 90%의 학생인 9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다방과 주점이 제주시내에 모두 몇 군데나 되는지 묻고 싶다"면서 당장 강 의원은 발언의 진의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신임 박 학장도 "강 의원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정식으로 항의하겠으며 교수회의를 열어 이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이 문제는 강 의원의 해명과 사과로 일단락됐으나 2개월후인 12월4일에는 제주도의회가 제주농고를 제주대학에 편입시키는 안을 가결시켜 제주대학에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이는 제주농고의 학생수가 해마다 줄어들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다 제주대학은 시설기준미달로 정비가 시급해 차제에 제주농고를 대학으로 승격시킨 후 제주대학에 편입하여 국립으로 이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동시에 제주농고를 부속농고로 설립하자는 취지였다.

이에 대해 길 지사도 동의하면서 "아주 시기에 적절한 안으로서 제주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대(農大)를 단과대학으로 설치할 수 있을 것이다"면서 "그러나 부속농고 설치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제주도내에 농고가 4군데가 있기 때문에 실업교육에 별 지장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피력, 적극 찬성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길 지사의 의견과 도의회의 결정은 제주농고 측으로부터 「제주농고의 전통을 말살시키려는 계획」이라는 반발에 부딪쳤다. 농고측은 "지원자가 줄고 있는 것은 비단 제주농고에만 국한되고 있는 일이 아니고 제주도 전체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며, 문교부 방침인 인문계와 실업계의 비율 3대 7을 배제하고 인문계만을 육성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향상책이냐"고 말하고 "제주농고 학생이 우수하게 되면 제주대학 농학부 학생들의 수준도 자연히 높아지게 되는 것이며 제주대 농학부의 70~80%가 제주농고 출신이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제주대학에서는 "제주농고동창회가 병합을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제주도내 유일한 제주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고 국립대학으로 이관시키기 위해서는 제주농고와 제주대학 농학과가 병합하여 단과대학으로 재편성돼야 한다고 주장, 농고측의 입장을 정면으로 공박했다.

사태가 점점 제주농고 폐교 쪽으로 기울어지자 제주농고동창회장(회장 金泰俊)에서는 폐교반대진정단을 상경시켜 관계요로에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했다.

길 지사는 제주농고와 제주대학간의 갈등이 이상한 방향으로 심화되자 "제주농고는 현재의 농과·수의과·원예과의 3개과 중에서 원예과를 폐지하는 대신에 실업교육향상에 불필요한 농고의 시설물을 제주대학에 이양해 대학설치기준령에 미달된 제주대학을 중점육성해 나가는 방안을 검토하겠다. 농고의 원예과 폐지는 원예과에 지원하는 학생수가 갈수록 줄어들어 운영이 어렵기 때문이다"고 말해 제주농고의 폐교는 축소 쪽으로 방향이 바뀌어 일단락을 지을 수 있었다.

그 무렵 한라산에 남아있는 4명의 재산 무장대에 대한 마지막 소탕작전이 경찰 토벌대에 의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때가 길 지사의 후임으로 박종만 학장이 부임하기 하루전인 1956년 9월26일이었다.

이날 새벽 6시를 기해 제주도경찰국 보안과장 변정욱(邊貞旭) 총경을 작전지휘관으로한 토벌대가 한라산 500고지 일대에 투입됐다.

그러나 토벌작전은 경찰의 대대적인 출동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한 해를 넘기고 말았다. 지지부진 하던 토벌작전 중에 여자 무장대원 한 사람을 생포하는 뜻밖의 성과를 올린 것은 작전을 시작한지 6개월만의 일이었다. 토벌대의 끈질긴 추격 속에 생포된 여자 무장대원은 조천면 와산리 출신의 한순애(韓順愛. 23세)였다.

토벌대는 1957년 3월21일 오전11시 재산 무장대원 4명이 제주시 월평동 견월악 부근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추격전을 벌인 끝에 한순애를 생포할 수 있었다. 이어 토벌대는 3월27일 오전5시50분 한라산 평안악 부근에서 재산 무장대의 지휘자인 김성규와 변창의를 사살했다.
또 4월2일에는 성산포경찰서가 한라산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구좌읍 송당리 출신의 오원권(吳元權. 39세)을 송당리의 산간부락 장기동(場基洞)에서 생포함으로써 1948년에 발생한 4.3 사건으로 입산한 재산 무장대를 완전히 소탕했다. 4.3 사건이 발발한지 만 9년을 꼭 하루를 앞둔 때였다.

오원권의 생포는 제주지역에 대단한 화제가 됐으며 국민회도지부에서는 박치순 위원장, 전인홍·강재량 부위원장 등이 「공비완멸기념행사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대대적인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그러나 기념대회는 다음해인 1958년 11월3일에야 개최할 수 있었다)

당시 경찰기록에는 제주도내 공비 숫자가 한때 1만6900명에 달했으며 그 중 7893명이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고 2040명이 귀순, 7000여명이 생포됐다고 밝히고 있다. 또 경찰 토벌대는 연인원 164만9471명이 투입된 이외에 경찰전문학교 1, 2기생과 각시도 경찰국 특별응원대 5000명이 지원됐으며 육군 9연대, 2연대, 7연대와 해병대들도 작전에 참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순직한 경찰과 군인은 각각 120명과 89명이고 공무원을 포함한 일반주민 납치자와 사살자는 1300명이라고 밝혔다.(1957년 4월3일자 제주신보)

한편 1957년 4월20일에는 9년동안 4.3 사건을 피해 토굴생활을 해오던 김성부(金成富. 30세. 신평리)가 모슬포 경찰서에 자수했다.

1950년대의 제주지방 식량사정은 매우 심각하다 못해 보리수확을 기다리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까지 속출할 정도였다. 그나마 형편이 나은 제주시에서도 전체 인구의 10%정도인 6500명이 끼니를 이어가지 못했고 조천면의 경우는 90%가 절량(絶糧) 상태였다.

길성은 지사는 식량문제가 갈수로 심각해지자 매일 간부회의를 주재하고 대책마련에 부심했으나 뾰족한 방안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부가 미국측으로부터 도입하기로 한 잉여농산물이 제주에 도착하기 전에 도민들이 모두 굶어 죽을 형편이었다. 천주교에서도 절량주민들에게 옥수수 가루를 배급하는 등 구호지원에 나섰지만 절량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제주도의회는 1957년 2월21일 길 지사와 김익중(金益重) 산업국장을 출석시킨 가운데 임시의회를 소집하고 제주도당국의 안일한 식량대책을 추궁했다. 그러나 도당국으로서도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길 지사는 "현재 부족한 양곡은 4만500여석에 이르며 당장 구호가 필요한 주민은 3만5000여명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대용(代用) 식량인 小麥皮(기울)를 도입하고 천주교와 세계기독교봉사단체에 호소하고 중앙정부에 대한 계속적인 지원을 요청해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 제주도민의 대부분은 가축사료인 밀기울로 겨우 연명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자 밀기울 값이 한 가마니당 600환에서 800환으로 폭등하여 그것마저 사먹기가 힘들었다. 밀기울은 부산에서 반입되는 가격이 200환에 불과했다.

도의회는 도의회대로 부족한 식량 가운데 3만석을 긴급 배정해줄 것을 중앙관계기관에 요청키로 했다. 또 국민회제주도지부에서는 전도민을 대상으로 「식량 절약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농수산부가 제주도에 내려보낸 구호미는 전국에 배정한 잡곡 6만석 가운데 3%인 2000석에 그쳐 도민들의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길 지사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중앙부처에 계속 추가배정을 요구했고 도의회는 국회에다 직접 구호미의 추가배정을 건의했다. 또 제주출신 김두진 의원은 대정부 질의에서 제주지방의 절량실태를 낱낱이 설명하고 정부의 구호대책의지를 따졌다.

이러한 각계의 노력은 결국 국회를 움직여 제주도에 대한 현지조사에 나서게 했다.
국회는 1957년 3월16일 농림분과위원회 조병문 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제주도절량실태조사단」을 파견했다. 국회 농림분과위원과 농림부 양정국장 등 13명은 모슬포비행장에 도착한 뒤 서귀포를 거쳐 남원·표선·성산·조천 등 동부지역의 중산간과 해안부락의 절량실태를 돌아봤다.

제주시에서는 이들 조사단을 환영하기 위해 귤림회관에 다과회를 준비하며서 회관 한 쪽에는 주민들이 현재 먹고 있는 밀기울과 꿩마늘, 전분찌꺼기 등 대용 식량 12가지를 견본으로 진열해놓고 절량사정을 그대로 보여줄 계획이었다.

국회 조사단은 조 위원장의 심한 비행기 멀미로 이동이 불편하자 서귀읍에 혼자 남겨둔 채 대정으로 출발했다. 대정에 이른 조사단은 주민들이 밀기울을 먹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사람이 어떻게 가축들이 먹는 밀기울을 먹을 수 있느냐는 놀란 표정들이었다.

성산포에서는 밀기울 포대를 짊어지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밀기울 값이 얼마냐"고 묻기도 했다. 주민들은 "값이 매일 올라 정확한 가격을 말하기가 힘들며 그나마 상인들조차 구하기가 어렵다"고 말해 주민들이 밀기울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현실을 목격했다.

그런데 문제는 국회 조사단에서 일어났다. 실제 제주의 절량사정을 돌아본 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식량상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자신들의 시찰결과에 거는 주민들의 기대가 너무 커서 어떻게 해결을 해야 좋을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또한 제주도를 비롯한 공무원들의 간절한 요청도 매우 부담스러웠다.

국회 조사단은 3월19일 농림부장관에게 제주지방의 식량상태를 자세히 설명하고 절량농가에 대한 대여곡으로서 1만8000석을 긴급히 방출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제주도의 전체농가 21만4788명 가운데 18만명이 절량으로 아사(餓死) 직전에 놓여 있어서 4월부터 6월중순까지 1인당 2홉5작씩 모두 1만8000석을 방출하지 않으면 모두 굶어 죽게 됐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결과로 정부에서는 대맥 1만8000석, 옥수수가루 1만8000포대를 급히 제주도에 추가배정했으나 도민들의 식량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다가 보리수확을 넘기면서 조금씩 회복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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