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이 아름다운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다른 방식의 이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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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좌보미 오름. ⓒ 제주의소리DB

 “…여기저기 육중한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고/ 중산간을 마구 파헤치고/ 지하수 양이 감소하면 땅덩어리가 가벼워질 테고/ 게다가 사람들이 마구 밟아버리면 그 하중을 견뎌내지 못하여…/ 혹시 이러다가 제주 섬이 바다로 꺼지는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지구 온난화로 북남극의 얼음이 녹아 2030년대에는 저지대의 수몰현상이 일어난다는 우울한 전망까지 있는데…/
 상상력치고는 참으로 치졸합니다. 제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미친놈’소리 듣기 딱 알맞습니다. 정말이지 ‘어리석고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밟고 굴러도 땅은 꺼지지 않습니다.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걱정했던 ‘기(杞)나라 사람의 근심(杞憂)’에는 옛사람들의 ‘우주에 대한 사색’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리석다는 기나라 사람’의 걱정도 막상 그렇고, ‘기(氣)의 집적에 의한 천지의 견고성’을 들고 나온 ‘이웃의 설명’도 다 그렇습니다. “…기의 집적인 이상 언젠가는 해체될 터…다만 그때가 언제인지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는 예측하지 못할 뿐”이라는 장려자(長廬子)의 반론도 모두 ‘우주에 대한 사색’의 일단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거기에는 현자의 아타락시아까지 있습니다. “…무너질지 아니 무너질지 알 수 없는 것…또 무너지면 어떻고 아니 무너지면 또 어떠랴. 살아서는 죽음을 알 수 없고 죽어서는 삶을 알 수 없는 것…무너지든 아니 무너지든 무엇 신경 쓸 일 있으리…”

 이런 말로 제 어리석음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언감생심, 그건 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자연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만큼은 단호합니다. 이러다간 끝내 우리 고장의 아름다운 자연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 때문입니다. 한라산을 가로막는 초고층건물들이 들어서고, 여기저기 중산간을 파헤치고…. ‘제주의 소리’ 보도(1월 8일자)에 따르면 중산간 지역에 ‘계획, 공사 중이거나 운영 중인 10만 평방미터 이상의 대형 관광개발 사업장이 19곳’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다 기존의 골프장들, 그리고 중소시설 등…이 좁은 땅덩어리에!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건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연파괴를 일컬어 발전이라고 찬양하는 문화의 모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역발전을 위해 자연개발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누가 있어 지팡이 짚고 나설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역발전은 ‘개발’이라는 과정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환경 보존과 발전은 분리된 과제가 아닙니다. 두 문제는 철저히 결합돼 있습니다. 현재의 표면적인 개발 속에 감춰진 자연 남용의 메카니즘을 따지지 않고서는 우리의 자연은 보호될 수 없습니다. 개발이라는 개념에는 이렇듯 ‘한계’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눈앞의 효과만 노려 그 ‘한계’라는 의미를 도외시하면, 우리의 미래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자연이 훼손되면 우리의 삶도 거칠어집니다. 그 어떤 개발도 오직 자연을 본받는 정도만큼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남루한 일입니까.

 그러나 아무리 남루하더라도 이야기는 계속돼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개발의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만 보는 ‘우리들 머릿속 세계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자연을 순전히 개발의 대상으로만 보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의 자연을 조각조각 파편덩어리로 날려 버리기 위한 ‘음모’에 별로 놀라지 않게 됩니다. 음모는 결코 밀실에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집단적 정서라는 ‘깊은 늪’에서도 만들어집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들 머릿속에 조각난 파편들에 갇혀서 그 이미지대로 우리 고장의 이 아름다운 자연을 조각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자연은 우리의 생명의 원천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기 위해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다른 방식의 이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 자신의 감성과 지성을 온전히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고장의 자연적 진화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종(種)들의 사회적 역사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럴진대 오름 자락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 하나라도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한 시인이 노래하듯, 하나의 나뭇잎, 하나의 물방울, 한순간 어느 것이든, 우리들 전체와 관련돼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의 완성에 관여합니다.

 그것을 지키는데 필요하다면, 그 주위에 철조망을 치는 것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좀 고집스러워야 합니다. 그것의 득과 실을 따지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음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쇠퇴와 소멸의 어두운 그림자가 덮칠 때쯤 철이 들기 시작하지만 그땐 이미 늦는다”고…. 우리가 우리의 자연을 지키는데 소홀하다가는 자칫 우리 후손들은 ‘우리들이 조각낸 파편을 줍는 일’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게 될지 모릅니다. 그건 ‘땅이 꺼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또한 얼마나 우울한 전망입니까.

 ‘원희룡 도정’이 들어선 이후 ‘중산간 개발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입으로만 중산간 보호를 운위하는 건 부질없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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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것은 논리를 구사하는 솜씨와 상상력에 관계된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게 환경정책으로 이어지고, 개발현장에 곧바로 적용돼야 합니다. 툭하면 자연보존을 강조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예 개발 쪽에 서고 마는 정책당국의 이중성을 너무나 자주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개발에 신음하는 제주 중산간, 지켜낼 수 있습니까” ‘제주의 소리’의 물음에 ‘대답할 책임이 있는 사람’은 새로운 정책으로 반드시 답해야 합니다. /언론인 강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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