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32) <故 김수남 특별전 - 극(極), 끝없는 기억>에 붙여

2009년 9월 30일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즉 알기 쉽게 말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에 의해 혹세무민하는 미신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해,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 깃발이 온 국토에 나부끼던 기간에는 역시 미신으로 핍박받던 한국의 무(巫), 그리고 굿. 1만 8천 신들의 고장이라는 제주, 그러한 제주문화의 정수였던 굿이 오랜 인고의 시간을 거쳐 세계적인 문화로서 인증을 받았다. 슬프게도 안에서보다 밖에서 먼저 내준 인증이었던 것이다.

이 제주도의 영등굿이 온전히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김수남의 사진집에서 시작되었다. 1983년 열화당에서 낸 기념비적인 시리즈 ‘한국의 굿’ 20권 중 제3권으로 《제주도 영등굿》이 출간되었던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 소개된 제주의 굿 중 영등굿은 최초의 것이었다. 미신이 문화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흑백사진들은 당시 새마을운동의 끝물에 여전히 휘둘린, 미신의 이미지에서 서민과 농촌공동체사회에 아직도 완강히 남아 있는 민중신앙의 일면을 여지없이 녹여내어 독특한 문화의 원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신선한 문화적 충격이기도 했다.

당시 민속학을 연구하기 위해 굿판의 현장을 누볐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의 굿판 행색은 여간의 사진쟁이들이나 보도용카메라의 시선이나 행동과는 달랐던 것 같다. 그는 굿이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어떤 날은 몇 날 며칠이고 심방들이나 단골인 주민들과 어울려 동고동락하면서 자리를 지키며 셔터를 눌러댔다고 한다. 물론 늘 술잔을 앞에 두고 말이다.

가관이었다. 사람들이 주는 술은 다 받아먹고 더 달라고 해서도 마셨다. 덕분에 굿판에 있는 마을 사람들보다 더 얼굴이 벌게져서 돌아다니는데 그 와중에서도 협조를 구하는 솜씨가 여간 아니었다. 카메라를 가슴에 안고 술 한 잔 걸친,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으면서 부탁하면 무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 할 것 없이 시키는 대로 비켜주고 포즈를 취해주고 춤을 추어주곤 했다.(관동대 황루시 교수의 회상)

그는 굿 사진을 찍기 이전에 이미 심방들과 함께 굿판의 일원이 되어 같이 마시고 굿을 하는  굿판 안에 있는 존재였다. 즉, 그에게 굿판은 앵글에 포착된 피사체이거나 카메라 앵글의 바깥이 아니라 카메라와 시선의 내부였던 것이다. 똑같은 굿판을 찍은 사진들은 여럿 있지만, 그의 사진들이 남다른 것은 그가 사진의 바깥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의 피사체가 되는 풍경의, 인물군상의, 굿판의, 축제판의, 소수민족의 의례 안의 세계에서 셔터를 눌렀기 때문이다.

제주섬사름 김. 수. 남.

김수남, 이 세 글자의 이름은 요즘 유행하는 연예인이나 한국의 위인전에 나오는 이름이 아닌 탓에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나 민속학계의 일부, 문화계 인사 일부를 빼면 낯선 이름이다. 특히 제주도민들에게는 더 낯선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이 낳은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라고 평가된다. 1980년대부터 사라져가는 한국의 굿을 촬영하는 데 집중한다. 이 작업의 결과물인 《한국의 굿》  20권 전집(열화당)은 사진작품의 예술적인 가치와 함께 사라져가는 한국의 무속신앙을 기록한 문화인류학 자료로서의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 그가 남긴 17만 컷의 사진들은 이제 김수남 개인을 넘어서서 한국의 문화유산, 또는 인류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그는 온전히 제주도 사람이다. 왜 ‘온전히’냐? 그가 발견한 예술의 원천 또는 원상이 제주섬의 저층부에서 퍼올리는 삼다수의 원수보다 더 깊은 심연의 지층에 살아 숨 쉬는 그것, 바로 ‘무속(巫俗)’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우리나라에서는 무속으로, 세계적으로는 샤머니즘으로 불리는 원초적 신앙체계의 원풍경에 정면으로 카메라를 들고 응시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80년대 제주의 굿판에서 옹골차게 시작된 그의 사진들은 나중에 시베리아에서 적도까지 아시아 샤머니즘의 궤적을 추적한 순례의 기록물이 된다. 그의 사진들은 사진으로 발굴한 아시아 민중들의 인문의 고고학이었으며, 또한 문화원형의 대하(大河)였다. 그는 앵글을 통해서 새로운 문화의 눈을 발견했으며, 그가 발견한 새로운 눈, 즉 모두가 미신이라는 미신에 빠져 있을 때, 그 누구도 건지지 못한 아시아-한국-제주의 미학과 원형의 심상을 누적된 전승의 시간 속에서 길어 올린 것이었다.

그의 사진은 오로지 한국과 아시아의 샤머니즘 그리고 그 주변의 문화상들을 다룬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피사체 중에서 그는 지구의 문명과 인간의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굿을 택했다. 민속학의 범주이든 사진학의 범주이든 어떤 범주에서 걸러도 한 곳에만 걸쳐지지 않는 복합다의적인 문화의 원형인 굿에서 그는 인류의 본질, 문화의 본질, 자연에 적응해 온 아시아 민중들의 정신적 세계를 발견했고, 그들의 심성과 표정의 의미심장함을 발견했던 것이다.

1만 8천 신들의 섬, 설문대할망이 만들어 놓은 대지 위에서 삼승할망의 복덕으로 태어난 섬의 아들인 그의 카메라와 시선은, 당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무-굿-샤머니즘의 세계를 세계적 차원의 인문적 지평 위에 올려놓았다. 필자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섬의 아들로서 누대에 걸쳐 그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고 전승된 제주굿의 가락과 본풀이가 그의 영혼의 근저에 항상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온전히’ 제주인의 내력에 닿아 있는 것이다.

김수남의 일생

김수남은 4․3사건 와중인 1949년 제주도 한림읍 한림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했는데, 그의 성장기는 대부분 서울에서 이루어진다. 성장기를 거친 그는 연세대에 진학하여 지질학을 전공한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그 시절부터 민족문화나 민중예술에 대해 관심을 갖고 김지하나 채희완 등과 어울려 다녔다. 동료들이 문학과 춤으로 전통문화의 리얼리즘적 법고창신을 이야기할 때, 그는 카메라라는 미디어에 주목했다. 그는 사진반인 ‘인영회’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대학학보사인 <연세춘추>에서 사진기자를 맡았고, 나중에 편집장을 지낸다. 그 인연으로 졸업 후에도 전공과는 상관없는 언론계로 나가는데, 월간 《세대》를 거쳐 1975년 동아일보사 출판사진부에 들어가 사진기자로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의 그의 사진들은 소위 보도사진 또는 사회사진류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로, 언론사 사진기자면 누구든 찍을 만한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예술적 끼가 다분했던 김수남은 이들 사진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곧 굿의 미학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굿판을 찾는 시간이 점차 늘어 간다. 하지만 처음부터 굿을 찍는 일의 의미를 깊이 있게 깨닫거나 사명감을 가지고 찍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청년기인 70년대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인 때여서, 유신정권에 의해 철저히 낙인찍혀 ‘미신타파’라는 명목으로 무속이 집중적인 탄압을 받을 때였다. 김수남은 후에 회고하기를 “우리 것을 지키자는 반항심 비슷한 것에다가, 언젠가는 굿이 다 없어질 것 같으니, 내가 다 기록으로 남기자는 욕심으로 카메라 들고 전국의 굿판을 찾아 다녔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굿에 대한 깊은 인식은 아직 숙성되지 않을 때였다.

그때 나는 좋은 무당이 뭔지도 몰랐고, 가치 있는 굿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그 속에 문화가 있고 예술이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내 눈에는 몽땅 같은 것으로 보였는데 그걸 사진적인 감각만 신경 써서 표현하려고, 희한한 장면이나 찍으려고 하니까 무당들 눈에 더 형편없는 놈으로 보였겠지. 결국 한계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내 평생 필요에 의해서 공부하기 시작한 건 굿이 처음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한국의 굿’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앞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는 굿을 굿판의 밖에서 이방의 시선, 즉 관찰자의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교감과 이해를 통해 앵글에 담으려 했다. 수년간 무속의 사제인 굿판을 기웃거리고 죽치고 다니면서 이제 굿판에서는 그를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면서 무당․심방들이나 신앙민 또는 단골들이 가장 신뢰하는 작가가 되어갔고, 또한 당시 현장연구 중이던 민속학자들과의 학문적․인간적 교류도 이때에 이루어진다. 김인회(한국굿학회 회장), 문무병(제주 민속학자), 황루시(관동대 교수), 채희완(부산대 교수), 이두현(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그들이다. 몇몇은 한국의 굿 시리즈의 글쟁이 파트너로서 함께하기도 한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현장의 실제성뿐만 아니라 굿에 대한 이해 역시 이론적으로 더욱 깊어 갔다. 

동아일보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시간을 쪼개어 굿을 기록하던 그가 1980년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고 만다. 뇌 모세혈관 출혈 때문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3년만 더 살게 해 달라. 그러면 내 작업을 마칠 수 있다.”라고 기원했다고 한다.(사진작가 이상엽의 글에서) 어쨌든 그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고, 퇴원한 후 1985년 동아일보를 사직하고 같은 회사 객원편집위원으로 위촉되자 그 해에 고향 제주도에 정착하며 본격적으로 굿 사진에 매달린다. 이때에 제주도 영등굿, 무혼굿, 신굿이 촬영된다. 그리고 1981년 ‘신영연구기금’의 지원으로 그간 찍었던 방대한 사진을 정리하고 프린트를 하게 되는데, 정리된 사진의 프린트만 1천 장에 달했다. 그간 매달린 그의 초기 굿 사진들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0대 중반이었으니 그 나이에 이룬 성취만으로도 주변의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였고, 급기야 유명 출판사인 <열화당>의 이기웅 사장이 그의 집까지 찾아와 이 사진을 보고는 과감하게 제안을 했다고 한다. “책을 만듭시다. 한 20권이면 될까요?” 이렇게 시작된 《한국의 굿》(열화당, 전 20권) 시리즈는 이후 1983부터 1993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이루어지게 된다. 지금의 출판계의 상황에서 보아도 기념비적인 작업이었다. 사진계뿐만 아니라 출판계 역시 더없이 소중한 자산을 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사진집 시리즈로 그는 한국의 굿을 대부분 섭렵하게 된다.

이 《한국의 굿》 시리즈는 사진계와 출판계만의 사건이 아니었다. 미신이라는 낙인으로 천한 업으로 취급받았던 익명의 무당, 심방들에게 실명과 제 얼굴을 찾게 해준다. 대표적인 무당이 바로 황해도 ‘만수대탁굿’의 만신 김금화와 제주의 큰심방이었던 안사인이다. 나라만신으로도 불리는 김금화의 일대기는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져 무당의 생애와 문화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신선한 문화적 파장을 던졌는데, 그 당시 미신이라는 굴레 속에 익명의 무당, 심방으로 불리던 ‘천한 것들’이 유구한 민중문화의 담지자로, 민족문화 전승의 주역으로 기록되었고, 무속 또는 굿은 이제 문화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은 후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되는데, 2005년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국제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주빈국이 되었을 때다. 기왕에 발간되었던 열화당의 김수남의 《한국의 굿》 20권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책의 하나로 한 권짜리 《굿(Gut), 영혼을 부르는 소리》으로 다시 제작되어 출품된다. 미신으로 취급하던 정부가 한 세대가 지날 때쯤 한국문화의 정수로 굿을 대접한 것이다. 그에게는 격세지감이었을 것이나, 이는 바로 그의 지난한 굿판의 시간들과 열정의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그가 굿판을 기웃거렸던 최초의 이유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기도 했다.

결실은 더 있었다. 2005년 <강릉단오제>가, 2009년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이 각각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된다. 그의 한국의 굿 시리즈에 나오는 두 개의 굿이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의 눈이 빨랐다. 적어도 한 세대 이상 그는 굿이 지닌 세계적 가치와 의미에 미리 주목했던 것이고, 이러한 그의 시선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그는 예지몽을 가진 심방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굿》 시리즈를 끝마친 그의 시선은 이제 아시아를 향한다. 한국의 샤머니즘을 중심에 두고 아시아 전역의 샤머니즘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생계를 위한 직업으로서의 사진기자와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이 교직하면서 더 이상 이 일이 병행될 수 없음을 감지한 그는 1985년 동아일보사에 사표를 내고 국내에선 낯설기만 했던 소위 ‘프리랜서’를 선언한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때마침 일본의 국제교류기금의 지원을 받아 일본 오키나와의 류큐대학교 사회학과 객원연구원으로 1988년부터 1년간 활동하면서 오키나와와 열도의 샤머니즘과 마쯔리를 촬영하게 된다. 이때가 그의 사진연대기에서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야기되는데, 그동안 국내의 굿 사진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흑백 모노톤의 사진이 총천연색의 컬러사진으로 바뀌었다는 점과 그의 화면에 강렬하게 생동하는 힘 있는 컬러구현이다. 이런 특징은 최후까지 그의 사진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데, 지금도 그의 사진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색의 강렬한 색조들은 그의 컬러사진 작품들이 김수남표임을 인식시키는 특징이기도 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듬해인 1990년에는 죽의 장막으로 불리던 중국의 소수민족들로 발길을 옮긴다. 대륙이 아직 오랜 잠에서 깨지 않은 시기였다. 냉전시스템이 여전한 시대였고 지금처럼 개방되고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였으니 사진작업의 고충은 컸다. 그는 중국의 소수민족의 민속을 취재하면서 사진을 찍다가 “미개방 지구에 들어가 촬영을 했다.”라는 이유로 공안으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게 된다. 공식국교가 성립되지 않은 시절이었으므로 그는 애써 찍은 필름을 통째로 빼앗기고 벌금까지 낸 뒤 귀국해야 했다.

이런 우여곡절이 담긴 그의 아시아 샤머니즘 탐구의 여정은 1995년에 개최된 <아시아의 하늘과 땅>전에 고스란히 담긴다. 전시 직전인 그해 8월 김수남은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사진상 가운데 하나인 홋카이도의 히가시가와마을이 제정한 ‘히가시가와(東川) 국제사진 페스티벌’의 제11회 해외작가상을 수상하면서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는 아시아의 사진가로 거듭나 있었다. 또한 개인전과 같은 제목의 사진집은 그 해 출판대상을 받으며 김수남의 주가를 올려놓으면서 대중적으로도 그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의 열정은 멈추지 않아 2003년에는 독립프러덕션과 협업으로 시베리아의 샤먼을 촬영하기 위한 장도에 올랐으나,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위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게 되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때 그의 프로젝트가 실현되었다면 우리는 또 다른 김수남의 앵글에 잡힌 시베리아 샤먼들의 인류학적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 일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생애는 길지 않았다. 신들의 질투였는지 2006년 2월 4일 태국의 치앙라이에서 원주민 신년축제 촬영 중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지인들은 망연했다. 57세였다. 그의 아시아 샤머니즘의 순례가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1970년대부터 카메라를 손에 든 이후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시베리아에서 적도까지 그가 다닌 30여 년의 순례의 기록들은 그를 아시아의 대표적 사진가로 기억하며, 샤먼 굿의 기록자로서는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명성을 얻게 했다. 

김수남이 만난 것 또는 만든 것

분명 김수남은 자기가 좋아서 샤머니즘에 매달렸다. 샤머니즘에 내재된 어떤 정신성, 영혼과 교류하는 문화의 신령스러움에 끌리어 한반도 남부의 민중들의 삶 속으로, 더 나아가 아시아촌의 저개발국가나 도시화의 이기나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밀려난 음지의 또는 낮은 곳의 사라져가는 문화들에 대한 애틋함이 굿판을 떠돌게 했고, 아시아의 대지와 섬들을 방랑하게 했다. 17만 점에 이르는 그의 작품들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특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누구든 다다르기 어려운 성취이다. 그는 사진미학을 논하기 이전에 어떤 문명의 소멸을 예견하는 위기감에서 한 장면이라도 더 사진으로 남기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그의 예상은 적중해서 그런 그의 사진들과 사진 찍기가 남긴 유산들은 이제는 다시는 기록하기 힘든 것들이 되었거나, 이미 흔적도 남지 않은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이제는 선각자적인 의미까지 획득하게 된다.

그의 사진들이 건져 낸 미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피지배자의 문화적 언어를 발굴하고, 곧 밀어 닥칠 자본주의의 쓰나미에 밀려 사라져 갈 또는 이미 사라져 버린 아시아인들의 문화상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발품을 팔았다는 것이다. 남들이 간 길을 다시 가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스스로 길을 내면서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의 사진이 추적하고 포착한 그의 사진세계의 궤적은 사진사적으로도 문화사적으로도 소중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가치는 점점 증대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했지만,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나 소수민족들은 주류사회의 변방이거나 열악한 삶의 여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회적․경제적 하층민들이 대부분이며, 이들의 신앙은 대부분 샤머니즘이다. 각 지역별로 공동체별로 무엇으로 불리건 간에 통칭해서 샤머니즘의 범주에서 기층의 신앙체제는 오랜 기간 전승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의 궤적은 고스란히 아시아 민중들의 삶과 미학을 담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서구시각에서 포착된 이미지가 아니라, 샤머니즘의 섬에서 태어난 유전자를 가지고 아시아의 대륙과 섬을 누빈 그의 사진들은 이제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는 지구의 마지막 풍경들이기도 하다.

그는 비록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사진들은 이제 인류의 유산이며, 아시아 문화사의 기억의 자산이다. 물질숭배와 욕망이 폭주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특히 글로벌리즘이라는 서구 중심의 세계주의의 대척점에 서서 그의 사진들은 “이봐, 이 세상은 너희들 것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야!”라거나, “세상은 여러 개가 존재하는 법이야! 알아?”라며 딴지를 건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가 이 세계를,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이 세계의 문화상이 얼마나 다양한 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함에 있어서 이러한 다양성과 포용성, 보편적이지만 특수한 문화의 상을 눈으로 보게 해주는 것. 그러므로 그의 사진들은 문화민주주의와 문화종다양성에 기여한다. 그의 사진에서 만나는 고유한 공동체별 상황 속에서의 인간의 모습들은 지구상 곳곳에 “아! 사람들이 살고 있었네!”라는 인식의 확장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그 존재들은 현재의 세계적 자본주의가 쓰나미처럼 당도하기 이전의 원상으로 남아 있다. 이미 그의 사진 속의 현장과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졌거나 변질 또는 변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의 그의 술회는 그가 사진들을 기록하고 있던 시기에도 여전히 그런 위기와 변질의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가난하고 초라한 마을이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하고 눈부신 모습으로 변신하는 현장에서 내 눈을 의심하며 셔터를 눌러대곤 했습니다. 꾀죄죄한 남방이나 티셔츠 그리고 낡은 바지가 전통의상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이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이들의 문명이나 문화가 서구의 꺼풀 속에 가려져 있었던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꽤 오랜 시간 경험하고 여러 번 마음 세척을 한 후에야 나는 그들의 겉모습만을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마음으로 그들의 모습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예술가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장기지속의 문화로서 남아 있는 “이들의 문명이나 문화가 서구의 꺼풀 속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 여전히 있을 것이라는 믿음 또한 던져준다.

그가 기록한 사진 한 컷 한 컷들은 아름답다. 그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하는 장면인지 굳이 알지 못하더라도 그의 사진 속 피사체들은 다 그 나름대로 독자적인 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으로 존재한다. 바로 이 아름다움은 하나의 잣대로 측정 불가능한 인간의 심성, 인간 문명이 쌓아온 지식과 지식 이전의 무의식적 감수성과 연동되어 우리에 새로운 감동을 전달하는 인간의 힘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사진은 이러한 인간의 가능성과 모자이크 같은 삶의 모습들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진들을 보노라면 아름다움을 공감하는 데에는 지식의 도구에 빚지지 않아도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사진들은 바로 이런 원형적 감수성의 세계, 인류 공통의 감수성의 전달체계가 존재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1995년 <아시아의 하늘과 땅> 전시회 때 사진집의 디자인을 맡아줬던 일본 최고의 북 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杉浦康平)는 그의 사진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예술과 상황이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세계로 녹아든 김수남의 독자적인 세계. 이것이 바로 그가 찍은 거의 모든 사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아닐까. 김수남은 한국의 샤머니즘을 중심에 놓고, 그와 아시아 각지의 샤머니즘과의 사이에 있는 공통성과 차이성을 찾아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 시점과는 반대로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가슴 깊숙한 곳의 풍경을 하나의 통로로 해서, 아시아 각지의 민간신앙의 다채로움과 생활문화의 독자성을 생생하게 투시하게 된 것이다. 김수남의 사진이 한국인들에게뿐 아니라 아시아 각지의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과 감명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바로 이 역전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김수남사진박물관이 보고 싶다

그동안 제주도정이 추진한 일들 중에는 참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들이 제법 있었는데, 미술관의 영구소장작가들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 집 자식은 건사하지 못하고 자꾸 양자만 들이는 형국이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니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물론 제 자식부터 건사하고 남의 자식까지 돌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이런 경우는 어찌 해석해야 하나.

현재 제주도에는 공공미술관으로서 빚내면서 지어진 제주도립미술관 안방에 ‘장리석 화백’의 전용전시관이, 시군자치 시절 당시 북제주군에서 추진한 저지예술인 마을의 제주현대미술관에는 ‘김흥수 화백’과 ‘박광진 화백’의 특별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남제주군에서 추진해 서귀포시가 운영하는 이중섭미술관의 경우,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라 할지라도 타관 사람이다. 장리석 화백과 이중섭 화백은 피난시절 제주에 왔던 인연이라도 있지만, 김흥수와 박광진의 경우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들의 작품들은 제주도에 여러 경로를 통해서 기증되어 현재 보금자리처럼 하나씩 꿰차고 앉아 있다. 그런데 공공미술관에 이렇게 타 지역 출신의 작가들이 둥지를 튼 모습이 썩 자연스럽지는 않아 보인다.

또한 여기에 더해 지난 우근민 도정 때 총 사업비 92억의 예산으로 속전속결로 추진된 김창렬미술관도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2016년 개관을 목표로 공사 중이다. 향후 유지관리까지 포함하면 100억대의 미술관이다. 김창렬미술관은 공사비도 공사비려니와 별도의 독립미술관이 지어진다는 데서 더 파격적이다. 물론 그 역시 한국전쟁 당시 제주에 피난 왔던 이력이 제주와의 인연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세계적이고 인연이 있다고 해도 대규모 지방비를 써가면서 이루어지는 미술관들의 중심에 들어앉은 이들이 하나같이 타 지역 작가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그들보다 더한 명망과 예술성을 평가받는 소위 제주출신 작가들은 여전히 전시관도 없이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세상을 떠난, 제주가 낳은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화가인 ‘고 변시지 화백’의 작품들은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제주성(濟州性) 또는 풍토성의 실현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만 그의 작품들은 타계한지 햇수로 3년차에 접어들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제주지역미술의 태동기부터 한 획을 그은 ‘양창보 화백’의 작품들이나, 빼어난 제주의 원형적 풍광을 특유의 필치로 그려 내어 이름 높았던 ‘김택화 화백’의 작품들 역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들의 작품들은 제주의 가치를 말하는 이 시대에 더욱 소중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동네심방 알아주지 않는 탓인지 여전히 공공적 관심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어, 앞의 작가들에 비하면 역차별 당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셈이다.

여기에 더해 바로 이 김수남의 사진들, 예술성을 떠나 문화인류학적 자산이라고까지 불리는 그의 사진 17만 컷은 결국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의 작품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한 인터넷포털의 ‘네이버문화재단’은 일찍부터 그의 작품을 디지털화하는 사업에 돌입해 이미 이 작업을 마쳤고, 인터넷에서 그의 작품의 일부를 디지털 콘텐츠로 만나게 해주고 있다. 네이버는 그의 사진들을 “한민족 및 아시아의 역사의 기록이자 고급문화 콘텐츠로서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큰 작품”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를 포털을 통해 서비스할 수 있는 것을 매우 고무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문화인류학적으로 가치가 큰 고전 콘텐츠의 발굴과 디지털화에 투자를 아끼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제주출신으로서 제주의 미학과 영상을 제대로 포착해낸 작가들과 사진가의 작품들은 도리어 방치되어 가거나 외방에 빼앗기는 형국인 것이다.

김수남 사진작가 타계한 이듬해 제주에서 1주기 추모전때는 김태환 도정 당시였는데,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그의 작품들을 여건이 맞으면 제주에 기증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히고 접촉을 했는데, 결국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김수남 사진작가는 생전에 나이가 들면 고향땅에 자그마한 사진박물관을 짓고 싶어했다고 한다. 이제 그는 가고 그의 작은 소망만이 이루질 수 없는 꿈처럼 남아 있다. 이제 그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다행히 그렇지 않다. 17만 점의 필름은 국립민속박물관에 영구 기증되지만, 그가 남긴 유품들은 아직 생전의 작업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제주도가 관심을 기울이면, 30여 년 동안 아시아의 현장을 누볐던 그의 땀이 밴 카메라나 취재수첩 등과 작가가 직접 남긴 친필사인이 들어있는 54점의 원판프린트 등은 충분히 유족들에게서 기증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또한 그의 장르가 사진이기에 이미 네이버에서 디지타이징해 놓은 사진을 프린팅하면 얼마든지 박물관 전시용 작품은 내걸 수 있다. 이들 사진들은 원화와의 차이가 없다. 사진작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도정에서 조금만 신경 쓰면 될 일이다. 굳이 김창렬미술관처럼 100억씩 들일 필요도 없다. 원도심의 옛 건물이나 유휴공공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작게나마 그의 사진박물관을 조성한다면 제주도민들의 문화교양과 청소년들의 교육콘텐츠로서,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며, 네이버가 평가했던 “고급문화 콘텐츠”로서의 가치는 새로운 문화관광콘텐츠에 목마른 관광객들에게는 매혹적인 문화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사진들은 제주의 기층신앙과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기에, 문화관광의 시대성과 지역문화정체성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 제주출신의 사진작가라는 점들이 중첩되면서 시너지효과를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박물관이 꼭 있었으면 하는 이유들이기도 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그를 제주섬땅에 품는 일이.

마치며

이제 그는 가고 그의 사진이 남았다. 오는 2월 13일(금) 도립미술관에서 올해 첫 기획전(오후 3시 개관)으로 열리는 그의 전시 <김수남 특별전-극(極), 끝없는 기억>전은 제주도에서 열리는 통산 세 번째의 전시다. 첫 번째는 오래 전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전시였으며, 두 번째는 그의 타계 이후 1주년 전으로 제주도문예회관 전시실에서 열렸다. 하지만 이 두 전시 모두 사진가들이나 일부 문화계 인사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 온전하게 김수남을 만나게 하지 못했다. 특히 사진매체에 대한 민도가 낮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으며, 홍보문제나 굿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한계 등이 그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그의 사진들이 작가의 고향을 찾아온다. 반갑고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끔 우리는 우리를 너무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김수남의 경우가 그러하다. 정치인이거나 연예인들의 경우 그 대중적 명망으로 인하여 쉽게 기억하지만, 기억 이전에 김수남에 대한 애초의 기초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문화행정과 관계된 공무원이나 도의원들은 물론이고 그나마 문화계 인사들이나 심지어 문화부 기자들까지도 요즘의 현역들은 그를 알지 못한다. 필자는 이를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 이곳은 그가 세상에 태어난 태손땅이기 때문이다. 그런 태손땅의 주민들이 아시아 민중문화의 정수인 샤머니즘의 세계적인 사진작가이자 예술가로 인정받는 그에 대해 “김수남이 누게라?”라는 뻘쭘한 물음을 던지는 상황을 보면, 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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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 그의 10주기이다.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도립미술관을 찾아보면 어떨까? 오랜만에 귀향한 그의 작품들을 찾아가 보아주고 그를 기억하는 것, 그의 사진이 품은 정경들과 그의 시선이 머물렀던 사진 속의 사람들과 문화상들을 함께 나누는 것은 그에 대한 추모이자 따뜻한 고향의 환대일 것이며, 분명 그의 사진들은 우리에게 또 다른 신선한 감동을 던져 줄 것이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故 김수남 작가 연보

-1949년 제주도 한림읍 출생 
-1967년 연세대학교 입학, 연세춘추(학교신문)사 입사, 인영회(사진반) 입회
-1975년 동아일보사 출판사진부 입사, 결혼
-1977년 장남(유족 대표, 김상훈) 출생
-1979년 차남(김재훈) 출생
-1980년 뇌 모세혈관 출혈로 입원, 퇴원 후 죽음을 의식 <한국의 굿> 촬영에 몰두(장산도 씻김굿, 김금화 만수대탁굿, 동해안 오귀굿 등)
-1981년 《공간》지에 <전통의 현장> 연재 시작(봉산탈춤, 북청사자놀음, 황해도 내림굿, 제주 배연신굿, 함경도 망묵굿 등)
-1982년 <한국의 굿> 사진 제작, 이 때 프린트한 사진을 보고 열화당에서 출판 제의(전 20권)
-1983년 《한국의 굿》 출간(《황해도 내림굿》, 《경기도 도당굿》, 《제주도 영등굿》) 및 기념 사진전 개최
-1985년 동아일보 사직, 동아일보사 객원편집위원으로 위촉
-1985년 제주도에 거주하며 제주도 촬영, 《수용포 수망굿》, 《평안도 다리굿》, 《전라도 씻김굿》, 《제주도 무혼굿》, 《함경도 망묵굿》 출간
-1986년 《한국의 굿》으로 제 13회 <오늘의 책> 수상, 《한국인의 놀이와 제의》 3권 출간(평민사, 《풍물굿》 1권, 《호미씻이》 2권, 《장승제》 3권), 《옹진 배연신굿》 출간
-1987년 《강릉 단오굿》(열화당) 출간, 《제주바다와 잠수의 사계》(한길사) 출간
-1988년 《韓國心の美》 출간(일본 도쿄), 《한국의 탈․탈춤》(행림출판) 출간,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수상, 일본 촬영(日本の山と海祭り) 시작
-1989년 《강사리 범굿》, 《제주도 신굿》, 《양주 경사굿 소놀이굿》, 《통영 오귀새남굿》, 《서울 당굿》 출간, 《빛깔있는 책들, 팔도굿》(대원사) 출간
-1989년 중국 촬영 시작
-1990년 중국에서 간첩으로 잡혀 조사, 재판에서 벌금형으로 모든 필름 몰수 후 섣달 그믐날밤 풀려남
-1990년 《조상제례》, 《전통상례》(대원사) 출간, 연세대학교 강사 <사진촬영과 감상> 강의(1990~1997)
-1992년 《안동하회마을》(대원사) 출간
-1993년 《황해도 거제도 별신굿》, 《위도 띠배굿》, 《지노귀굿》, 《서울 진오귀굿》(열화당 출간), <한국 현대사진, 관점․중재> 그룹전, 사진집 《濟州道》 3권 출간(國書刊行會, 일본 도쿄)
-1995년 <히가시가와(東川) 사진상> 해외작가상 수상, 수상 기념 사진전 <한국의 무속> 개최, 김수남 사진전 <아시아의 하늘과 땅> 개최 및 사진집 《아시아의 하늘과 땅》(타임스페이스) 출간
-1996년 《아시아의 하늘과 땅》으로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사진부문 수상
-1997년 김수남 아시아 문화탐험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 된다》(석필) 출간, <삶의 경계> 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참가
-1998년 <Schamaninnen in Korea>전 참가(함부르크 박물관, 독일)
-1999년 김수남 사진전 <살아 있는 신화 ASIA> 개최, 《살아 있는 신화 ASIA》(연세대 박물관) 출간, 상명대학교 예술․디자인 대학원 강사(1999~2000)
-2002년 경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특별연구원 역임, 방송통신대학교 교재 《여가와 삶》 사진부문 <사진찍기와 자기표현 또는 자기발언> 저술
-2003년 시베리아 이루쿠츠크에서 위출혈로 수술
-2004년 《아름다움을 훔치다》(디새집) 출간, 《한국의 굿》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출품될 ‘한국의 책 100’에 선정, 2004 아시아 전통예술 페스티벌 <신의 얼굴> 전시 개최
-2005년 <빛과 소리의 아시아> 전시회 개최(인사아트센터), <Schamaninnen in Korea> 개인전 개최(베를린 Werkstatt Der Kulturen), 사진집 《굿-영혼을 부르는 소리》(열화당) 출간, 영문판 사진집 《Gut-Shamanic Ritual Ceremony》(열화당) 출간, <한국의 굿-만신들 1978~1997> 전시 개최 및 사진집 《한국의 굿-만신들 1978~1997》 출간
-2006년 태국 치앙라이에서 별세, 김수남기념사업회 창립, 옥관문화훈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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