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최대 컨테이너 항구인 파이리어스와 테살로니카의 항만청이 국제시장에 매물로 나온 지 오래다. 지난 수년간 국영기업 노조의 반대에 부딪혀 매각절차가 지연되어 오다가 작년부터 협상이 구체화 되었다.

물동량으로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덴마크의 머스크 그룹, 중국의 국영해운사 코스코(China Ocean Shipping Co.)를 비롯하여 독일, 스위스, 일본, 영국, 심지어 러시아계 자본들까지 큰 관심을 가지고 입찰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이번 그리스 총선으로 새 정부에 젊은 수상이 등장하면서 판도가 변하고 있다.

2010년 그리스 구제금융의 트로이카, 즉 IMF, 유럽중앙은행 및 유럽연합 등이 그리스에 요구한 부대조건 중의 하나가 국영기업 민영화였다. 그리스의 민영화는 나라의 재산을 팔아 국가부채를 갚자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재정이 바닥나기 직전 그리스 정부는 독일로부터 도합 20억유로(우리돈 약 2조5000억원)를 들여 길이 60미터가 넘는 '214급 잠수함' 4척을 구입했다.

파이리어스와 테살로니카 두 항만청을 매각하여 받을 수 있는 금액에 그리스가 이행해야 할 또 다른 조건들, 즉 국가가 지원하고 있는 의료비의 축소, 공무원 연금 삭감 등을 통해 절약되는 정부 지출을 다 합해도 독일 잠수함 몇 척의 가격에 미치지 못한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자유시장과 경쟁논리에 입각한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는 데 앞장 서고 있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그가 최근, 착한 대출(good lending)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나섰다.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대출을 해 주는 것은 채무자를 망하게 하는 나쁜 대출이라는 것이다.

독일잠수함 값에도 못 미치는 민영화 수익

그는 시장경제의 생명은 실패한 자에게 새 출발의 기회를 주는 데 있으므로 부득이한 경우 채무를 면제해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낳을 것이라는 우려는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도덕적 해이의 위험은 오히려 불성실한 대출을 해 준 채권은행들에게 더 크다고 말한다. 회수불능 채권을 많이 취급한 불량은행들이야 말로 망해야 하는데 그 때마다 구제를 받아왔기 때문에 이들이 더 도덕적으로 방만해졌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하버드대학의 케네스 로고프 교수도 유로 존 가입 이후 그리스 정부의 채무가 급증한 원인 가운데는 프랑스와 독일 은행들의 묻지마 대출도 있었다고 지적하며 채권은행 공동책임론에 가세했다.

지난 일요일 밤 아테네 의회에서는 40세의 새 수상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몇 가지 중요한 선언을 했다. 첫째, 선거공약 중의 하나였던 그리스의 빚을 더 깎아달라는 요구는 철회하겠다. 둘째, 그러나 이 빚을 제대로 갚기 위해서는 현재의 부대조건을 재협상해야 한다. 셋째, 재협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유로화 2400억 구제금융 중 아직 인출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손을 대지 않겠다는 단호한 내용이다.

치프라스가 재협상을 통해 원하는 것은 최저임금과 근로소득세 면세점을 올리고 도로, 항만 등 국가 기간시설의 민영화는 하지 않는 것이다.

조건 재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구두약속만 하면 그럭저럭 70억유로 정도는 곧 인출할 수가 있고 ECB로부터도 단기자금을 리파이넌스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리스는 이런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재협상에 필요한 기간을 6월 말까지로 잡았는데 그 때까지 '브리지 펀드'를 조달하여 버티겠다고 한다.

그리스가 조건 재협상 카드 먼저 던져

가장 완강하게 구제금융 조건의 변경에 반대하고 있는 독일에 대해서도 "그렇다면 당신도 나치 독일 때 그리스로부터 강압적으로 받아갔던 대출금을 상환하라"고 정면 도전장을 냈다.

현지 시간으로 오늘(2월 11일) 브뤼셀에 비상 소집된 유럽연합 19개국의 재무장관급 회의는 바로 그 다음날 이들 나라들의 정상들이 만나는 자리로 이어진다. 여기에 그리스가 먼저 카드를 던진 것이다.

157709_177926_1231.jpg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오른다. 디오니소스 적인 그리스는 아폴론적인 독일과 참으로 대조적이다. 디오니소스가 정열과 자유, 그리고 뜨거운 피의 화신이라면 아폴론은 합리와 질서, 그리고 차가운 이성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이 글은 <내일신문> 2월 11일자 '김국주의 글로벌경제' 에 게재됐습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제주의소리>에 싣습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