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학생문예작품 '대상' - 아라중 강나영

▲ 始原 ⓒ 강요배 화백. 동백꽃 지다
  수학여행이 3주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엄마와 함께 달력을 앞에 세워놓고 여행 가기 전에 챙길 물건, 날짜와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에 몇 가지 살 것도 있고 전 날 쇼핑을 했으면 하는 생각에 엄마에게 졸랐습니다. 엄마는 “그러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4월 3일에다가 크게 동그라미를 하고, 계획들을 적어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엄마기 혹 잊을까

  "엄마, 4월 3일이에요! 그날은 꼭 다른 약속 잡으면 안돼요."라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마음이 부풀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는데 엄마가 "아참, 엄마가 잊었구나. 나영아, 엄마가 저번 주에 말 안했니? 4월 3일에는 이모가 가입한 단체에서 4.3기행이 있다고 같이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가자고 했는데…."하시면서 약속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막상 4.3기행을 갈 것을 생각하니 긴 한 숨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심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일주일에서 가장 행복한 날인 일요일에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창 수학 여행을 갈 생각에 설레고 부풀었던 즐거운 마음을 싹 날려 버리는 엄마의 제안에 '하고 많은 날들 중에 왜 꼭 일요일?'하며 속으로는 매우 심통을 부렸습니다. 엄마도 내 얼굴을 보셔서 아셨는지 "가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이모한테 전화해서 말해. 엄마는 다 널 위해서 가는 것만 명심해라."

이모한테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쇼핑 가야한다고  4.3 기행을 못 간다고 할 수도 없어 고민에 빠졌습니다. 결국 특별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삐쭉 내민 채 차에 올라탔습니다.

  그 날은 유난히도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날이었습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창문을 내려 봄의 기운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얘들아, 저기 보이는 오름 있지? 저 오름이 바로 '다랑쉬 오름'이란다. 4ㆍ3기행의 첫 번째 목적지가 바로 저기야."하시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셨습니다.

 '저 오름이 4ㆍ3의 흔적을 담고 있다고? 뭐 다른 오름들이랑 똑같은 평범한 오름인데….'
차 안과는 달리 밖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습니다. 휘날리는 머리를 잡고 오름 앞에 곧게 서서 오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바람 부는 날의 나무 한 그루 없는 다랑쉬 오름은 마치 추운 겨울 외투를 안 입은 사람 같아 외롭고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 당시 빨갱이라고 내몰리던 사람들이 몸을 피해 숨어 지내던 동굴이 있는 오름, 큰 차에 실려가던 주민들이 살고 있던 마을 ,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푸른바다…. 그 아름다운 모습들을 본 순간 언젠가 본 것 같은 낯익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제주’하면 떠올리는 작고 아담한 마을의 풍경이 바로 제 눈앞에 펼쳐져 있었는데,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아 너무도 고요해 새들의 날개 짓 소리까지 들렸습니다. 다정다감하게 느껴지는 낮은 돌담과 집들.  돌담 사이사이에서 피어난 유채꽃의 향기를 만끽하고 있었는데 엄마의 부름이 들려왔습니다. 너무 향기에 흠뻑 취해 있어서 시간이 가는지, 내가 배가 고픈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영아, 어떠니? 여기 오기를 잘했지?"
  "좋은데요, 너무 삭막해서 그런지 왠지 나와는 거리감이 있다고 느껴져요."
내가 4ㆍ3에 대해서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입에 익숙하지는 않았습니다.
  엄마가 그것을 아셨는지, "나영아, 4.3은 모든 제주인이 알고 있는 너무나 슬픈 이야기란다. 엄마의 집도 4.3을 피해갈 수 없었던 슬픈 사연이 있단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엄마와 이모는 고모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실타래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고모할머니라? 과연 어떤 분이셨을까? 인자하고 넓은 아량을 갖고 계신 분이시겠지?'
 고모할머니께서는 나와 동생이 어렸을 때 보시고는 착하다고 칭찬해주시면서 아주 예뻐하셨다고 합니다. 그 때는 한 5살 쯤 때라서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할머니께서는 한평생을 시골에서 사십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만해도 건강하셔서 버스를 타고 외할아버지 댁에도 자주 들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몸이 편찮으셔서 제사 때라도 시내로 오기가 힘이 드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까지 모르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모할머니께서 한 분 더 계신다는 말을 듣고 엄마에게 할머니에 대해 여쭤보았습니다. 물론 어렸을 때 본적은 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 처음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모할머니께서는 지금 연세가 80이 넘는다고 하십니다. 머지않아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 고모할아버지께서는 4.3 때 돌아가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4.3사건이 일어나던 때,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는 젊은 나이에 시골에서 오순도순 살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한 밤중에 탕탕탕, 총소리가 들리고 온 동네가 어수선했어요. 여기저기 서 "불이야!" "불이 났다!"하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동네 사람들의 소리에 깨어나 보니 마을의 남자들은 다 잡혀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의 노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남자면 모조리 '빨갱이'로 내몰려 끌려갔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신학문을 배우신 장래가 촉망된 청년이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식인들을 더욱 경계하는 분위기여서 혹, 할아버지께서도 끌려가실까봐 그 날 밤 할머니와 뱃속에 있던 나의 육촌 삼촌을 뒤로한 채 산으로 도망가셨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산이라고는 섬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한라산 밖에 없으니 아마 거기로 가셨을 겁니다. 할아버지 댁과 한라산은 꽤 거리가 멀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총소리와 훨훨 타오르는 불길에 덜덜 떨며 잠도 못 이룬 채 밤을 지샜습니다. 꼬끼오, 아침을 알리는 수탉이 울 때까지 할아버지께서는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할아버지께서는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에는 산에까지 쫓아가서 총으로 쏘아 시체들을 한 곳에 모아 안보이게 묻었다고 하니, 아마 60여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시지 않는 할아버지께서도…. 할머니께서도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할아버지를 찾아 주변의 산이며, 오름이며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도 행여나 할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오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 당시에 살던 곳에 살고 계십니다. 지푸라기로 엮은 낡은 초가지붕에, 흙으로 된 벽, 돌로 쌓은 담. 지금은 보기 드문 옛날의 정겨움이 묻어나는 고향집입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오시지 않으신 후 할머니서는 단 하루도 그 집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육촌 삼촌이 할머니보다 먼저 돌아가셔서 의지할 곳 없이 혼자 살고 계십니다. 엄마의 말씀을 들으면서 할머니가 살아온 세월의 고통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일요일은 하루가 정말 짧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4.3기행을 통해 지금은 평화롭기 만한 제주의 슬픈 역사를 알게 되었고, 제주인으로서 4.3의 아픔을 딛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하루가 더 새롭고 의미 깊은 하루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엄마, 이모 덕분에 오늘 4.3의 역사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지만 제 친구들 중에는 4.3에 대해 잘 모르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삼일절, 광복절, 현충일 같은 날은 공휴일이기도 해서 친구들이 빼먹지 않고 기억하는데, 4.3은 그렇지 않기에 더 그런지 모릅니다. 또 4.3에 대해 진상규명과 역사에 대해서도 우리 학생들에게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4.3의 역사를 모른다고 말하지 말고, 4.3을 알려줌으로써 제주의 역사에 관심을 갖도록 해주었으면 합니다.

  4월도 채 안 되었는데 유채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걸 보니 지금도 그 때 보았던 유채꽃, 초가집, 돌담의 돌멩이들이 머릿속에서 맴돕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