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주 칼럼] 재정적자가 목에 차서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 정부를 대신해 중앙은행이 각종 통화정책 수단들을 통해 그 나라의 경제를 살려보려고 하는 '통화 액티비즘'(monetary activism)이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그리고 유럽으로 확대되고 있다.

연초 유럽의 중앙은행인 ECB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금년 3월부터 내년 9월까지 18개월에 걸쳐 매달 600억유로(미화 약 700억달러)에 달하는 채권을 시장에서 매입할 것임을 사전 공표했다. 미국 연준의 QE(양적완화)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의 월간 채권 매입 규모 850억달러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유럽은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단일 국가가 아니고 통화 단일화를 달성한 19개 나라들 사이에서도 재정통합은커녕 금융통합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여서 ECB의 통화정책은 그 시행이 결코 쉽지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막상 시장에 나가 채권매입을 하려 할 때 과연 어느 나라, 어느 회사의 채권을 사주느냐를 결정하는 것부터가 어렵다. 미국의 경우는 매입대상 채권을 미 정부발행 국채와 모기지 증권에 한정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뿐만 아니라 그 효과에 대한 의문도 벌써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이 채권 매입을 시작했던 2008년에는 장기금리의 기준이 되는 10년 만기 국채의 시장금리가 약 4%에 달했다. 채권매입은 이것을 1.5%로 끌어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는 주요국의 국채가 이미 1.5% 또는 그 이하다.

또한 미국의 경우는 이러한 양적완화 정책이 부동산과 주식의 가격을 부추김으로써 많은 기업과 가계에게 웰스 효과(wealth effect)를 가져왔고 이것이 다시 소비진작으로 이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는 위의 국채뿐 아니라 일반 금융자산 및 부동산까지도 가격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다. 미국의 저금리와 양적 완화의 파장이 이미 유럽에까지 미친 결과다.

출구 없는 통화 액티비즘

통화 액티비즘은 후일 출구전략의 시행도 어렵다. 극약은 금단현상이 더 위험한 법이다. 바로 10년 전의 경험, 즉 2004년에서 2006년에 걸친 금리 정상화(금리인상) 시도만으로도 미국의 서브 프라임 금융위기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기억이 뇌리에 생생하다.

현재 진행중인 통화 액티비즘은 저금리에 더해 노골적인 통화 증발을 그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출구전략은 세계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감수하거나 아니면 장기간 미루어질 수 밖에 없다.

프린스톤대학 대니 로드릭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때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귀신이 유럽 상공을 날아다닌 적이 있지만 이것은 그 동안 시민권의 확대 및 수정자본주의의 도입으로 물리쳤다. 그런데 지금은 인간의 노동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술문명'이라는 귀신이 전세계 상공을 떠돌고 있다.

기술발달이 가져온 생산성 향상의 과실은 기술과 자본을 소유한 계층으로 귀속되고 일반 대중은 생산현장으로부터 축출된다. 일찍이 케인즈가 우려했던 '기술요인적 실업'(technological unemployment)이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다.

이 기술문명이라는 이름의 귀신을 어떻게 퇴치하느냐에 따라 이제까지 쌓아온 시장경제 시스템,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진로가 좌우될 것이다.

기술문명이라는 이름의 귀신

"6년 사이에 통화량이 400% 증가하고 국채의 70%를 그 나라 중앙은행이 사주는 나라를 과연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금융위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통화위기가 임박했습니다. 2020년 이후까지 살아남으려면 우리의 안내를 받으셔야 합니다."

금융상품 홈쇼핑계에서 미국최대를 자부하는 스탠스베리 투자자문사의 광고는 이런 말로 시작된다.

케인즈의 말대로, 앞으로의 인류의 생존경쟁은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속도와 인간의 노동만이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분야가 생성되는 속도, 이 두 개의 속도 사이의 경쟁이 될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각 나라들의 정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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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경제 살리기라는 과분한 짐을 중앙은행에 지우고 있는 여러 나라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스탠스베리의 음성이 단지 하나의 장사꾼의 그것을 넘어, 벌거벗은 임금님의 행렬 앞에서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말을 외치는 어린이의 소리인 것 같아 매우 씁쓸하다.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이 글은 <내일신문> 2월 25일자 '김국주의 글로벌경제' 에 게재됐습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제주의소리>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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