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주의 어·부·가](2) 아이들 먹거리 고민할 때…제주에 공자학당 같은 공간 필요

 인류 역사 속의 성인(聖人)들은 한결같이 어린이는 곧 어른의 거울이라고 가르쳤다. 어린이가 갖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그 부모가 갖고 있는 문제점일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 어른 중심의 세계에서 어린이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있는 불안한 존재이고, 그 가족은 마음의 길을 잃어 방황하기 일쑤다. 지난 2013년 [제주의소리]에 ‘오승주의 책놀이책 Q&A’를 연재했던 오승주 씨가 다시 매주 한차례 ‘오승주의 어·부·가’ 코너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기로 했다. 최고(最古)의 고전 <논어>를 통해 어린이와 부모가 함께 부르는 배움의 노래가 될 것이다. 이번 연재코너가 어린이·청소년을 둔 가족들의 마음 길을 내는데 작은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편집자]  


언제부터 아이들은 어른들을 존경하지 않았을까

공부방에 있으면 아이를 무척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 됩니다. 하루는 한 아이가 엄마와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화를 내면서 집을 나왔나 봅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엄마는 사정조로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부탁했고, 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저보다 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있었지만, 아이의 마음을 참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오래 지내다 보면 오히려 모를 수 있죠. 그 친구는 들어주기만 하면 훌륭히 자신을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수학 문제를 푸는 데 틀린 것이 많아서 하나씩 고쳐주었습니다. 아이는 화를 내면서 집에서라면 당장 문을 잠그고 하루 종일 나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항변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틀렸다고 했을 때 화가 나지만 아이들은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집에서 아이들과 부모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아이들이 처한 상황과 마음을 살펴보는 것을 게을리 합니다. 하루하루 사는 데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

그 결과 존경 받는 어른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존경은커녕 어른은 경멸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남긴 업적은 조롱거리로 둔갑하기도 하죠. 많은 목숨을 흩뿌리며 일궈낸 ‘민주화’라는 이름이 어떤 사이트에서는 ‘반대’의 버튼으로 사용하기도 하죠. 봐주지 못할 만큼 수준의 글을 쓴 사람에게 주는 의견 표시를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반대한다는 사실은 참 충격적이죠. 어른들, 선배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이들을 어떻게 먹고살게 만들 것인가 하는 질문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사회 운동을 열정적으로 한 어른들임에도 아이들의 먹거리에 대해서는 대단히 소극적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지금 사회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40대, 50대 어른들은 젊었을 때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지금처럼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하루 온종일 먹고살 걱정만 해도 부족합니다. “10억 원이 생긴다면 죄를 짓고 1년 정도 감옥에 가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고등학생 응답자 47%가 갈 수 있다고 답했다는 뉴스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어른이 얼마나 될까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갈수록 외로워질 수밖에요. 어른과 어린이의 사이가 이렇게 끊겨 있는데 사랑과 존경이 자라날 틈이 없겠죠. 옛날의 어른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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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어떻게 먹고살게 만들 것인가?

공자는 평생 훌륭한 인재가 될 만한 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을 좋아했죠. 어떤 제자는 공자와 50세 가까이 차이가 나기도 했습니다. 공자를 배우는 게 소원이라는 맹자가 쓴 책 <맹자>에서 한 제자가 스승에게 이렇게 질문하죠. “공자께서는 진나라에 계실 때 노나라의 미친 듯이 씩씩한 사람들을 그리워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맹자는 “공자께서는 ‘도에 딱 맞는 사람을 얻어 함께 하지 못하면 미친 듯이 씩씩한 사람과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하셨지.”라고 대답합니다.(<맹자>, 「진심 하」편) <논어> 책에는 젊은이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가득합니다. 공자는 제자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어느 날 재밌는 칭찬을 남깁니다.

공자가 자천에 대해서 말했다. “군자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노나라에 그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군자가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겠는가? ‘이 사람이 어떻게 이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라는 옛말처럼.
- <논어>, 「공야장」 편

공자는 제자뿐 아니라 제자를 길러낸 마을의 분위기와 어른들을 함께 칭찬했습니다. 이렇게 세대 전체가 움직이고, 그 움직임을 이해하고 칭찬할 수 있는 분위기가 멋져 보입니다. 공자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은 이유를 단적으로 설명하면 아이들을 먹고살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요즘 말로 하면 새로운 산업을 일으켰고 수많은 제자가 혜택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귀족 사회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공무원이 되려면 연줄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공자 이후에는 사(士)라는 전문가 계층이 두각을 보이며 제후국의 행정과 정치를 담당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에서 소피스트들이 학생들에게 수사학(대중연설법)을 가르친 것과 비슷한 일이 동양에서 일어났죠. 알다시피 공자는 사(士) 계층을 대표하는 사람이죠. 지금 말로 하면 돈도 ‘빽’도 없이 자수성가한 사람이었죠. 학문을 일으키고 예법을 세움으로써 전국적인 명성, 즉 ‘공자’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냅니다. 공자학당이라고 불리는 사학(私學)의 모델은 공자가 최초라고 평가합니다. 공자의 제자가 3천명이었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먹여 살렸을까요?

숙달된 예법 노하우를 가지고 전국의 현장을 누비며 일종의 대행업을 했죠. 동양의 관혼상제(冠婚喪祭) 예식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한 학자는 ‘공자상조’라는 표현을 썼는데, 절묘한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사마천은 공자의 마을과 생가를 정밀 취재한 끝에 논어의 첫 구절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는 공자의 집 마당에서 때를 정해서 예법을 연습했던 것을 말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마천이 현장을 방문했을 때도 공자의 집 마당에서는 일정한 시간에 예법 연습이 행해지고 있었거든요. 공자 학당에 입학한 젊은이는 ‘예법 알바’(?)를 뛰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고, 열심히 공부하면 공자의 추천을 받아서 제후국의 공무원으로 취직할 수 있습니다. 염구(冉求)라는 제자처럼 스승보다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었죠.

공자학당은 당시 젊은이의 로망이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어른들이 공자가 했던 방식을 깊이 고민해 벤치마킹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자신의 끼를 발견하고 실험할 수 있도록 조그만 장을 만들어주는 게 저의 꿈입니다. 사면이 바다인 고립된 섬 제주도이기 때문에 그런 공간이 더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140자 Q & A 상담코너]

2. 너무 멀어져 버린 아이와 부모
Q = 중학생 아들 키우는 엄마입니다. 아이와 관계가 좋지 못합니다. 백약이 무효하네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A = 많은 부모가 이 문제로 괴로워하지만, 아이 역시 아프다는 것을 알아준다면 고통이 반으로 줄어들 거예요. 아이가 부모에게 저항하려는 것은 아직 건강함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죠. 아이를 위한다고 하는 행동 중에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솎아내 보세요.

 * 독서지도사 오승주 씨에게 자녀들의 학습방법과 독서 등에 관한 궁금한 점을 이메일로 상담할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 dajak9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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