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근대건축 산책] (19) 건축가 김태식과 제주에서의 작품

한동안 쉬었던 [제주 근대건축 산책]의 연재가 다시 시작됩니다.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해방 전후 제주에서 활동한 국내 출신의 건축가들을 다룰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한국근·현대건축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1945년 8월17일 전국공업기술협의회 창립을 시작으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건축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후 동년 8월25일 건축협의회 결성, 동년 9월1일 조선건축기술단 결성, 그리고 동년 12월에 조선건축사회이 창립됨으로서 해방 원년에 국가재건시기에 상당히 활발한 조직결성과 함께 건축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 건축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던 그룹은 일제강점기 당시 전문적인 건축교육을 받은 건축가들이었다. 국내의 경우는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 건축학과 출신과 국외의 경우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체계적인 건축교육을 받았던 건축가들이다.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 경성공업전습소(1907년)→경성공업전문학교(1916년)→경성고등공업학교(1922년)로 변경) 건축학과를 졸업한 한국인으로는 한국건축계를 이끌었던 인물이 박길용, 유상하,이천승(1956년 한국건축작가협회 창립주도. 초대회장, 이후 1959년 한국건축가협회로 개칭), 김희춘, 장기인 등이 있다. 한편 국외 유학파 건축가로는 김한섭, 김태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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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근대건축교육을 받았던 인물들의 건축 활동은 서울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이뤄졌다. 그들의 건축 활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제주지역에도 이들의 작품이 남아있다. 건축가 김태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건축가 김태식은 193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대학 전문부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기수(技手)로서 건축인 생활을 시작된다. 해방 이후에는 1945년 10월 김태식설계사무소를 개설하는데 일제강점기에 개소한 박길용 건축사무소, 박인준 건축사무소 2곳이었으나 해방이후로는 최초의 건축사무소를 개소하게 된다. 

이후 그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2월 건축가 김윤기, 유상하와 함께 창립한 조선건축사회 회장에 취임하는 등 제도권내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만 특히 1947년 10월2일 실시되었던 극장 겸용 백화점을 주제로 민간주도의 최초의 현상설계공모인 서울만물전(주관=조선건축기술협회)에 응모하여 1등으로 당선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더욱 활발한 건축활동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에는 새롭게 창립되는 한국건축가협회 4번째 회원으로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기도 한다.

그는 원래 연극지망생을 꿈꾸었지만 건축수입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건축의 길을 선택한 재미있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해방 초기 미군정 당시 미군장교와의 인연으로 김포에 미군막사를 짓는 작업을 맡게 되면서 큰 자금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건축사 창립 등 대내외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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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건축 활동의 전성기는 1950년대와 1960년대라 할 수 있는데 특히 학교건축과 사무소건축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대표작품으로는 해운대 극동호텔(1962년), 대한체육회 회관(1966년), 구 제주관광호텔(1962년),제주시민회관(1964년), 덕성여자대학교 건축물(미확인) 등이 있다. 

그러나 해방 초창기, 좌익과 우익으로 극열한 대립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협회 등 조직정비와 건축 활동을 추진하였던 점은 대단히 열정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탓에 건축가 김태식과 관련된 건축 작업 중에는 최초라는 단어가 자주 붙기도 한다. 그는 해방 이후 최초로 건축사무소를 개소하였고, 민간 주도의 최초의 현상설계에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舊) 제주관광호텔(1962년)은 최초의 제주관광호텔이고, 제주시민회관(1964년)은 제주최초의 철골조 건축물이라는 점 등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1967년 촬영된 제주시내의 항공사진을 보면 이들 건축물이 어느 정도 중요한 건축물이 있는지, 당시의 규모와 위치 등에 있어서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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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태식의 서울만물전 현상공모 당선작에서 알 수 있듯이 꼬르뷔제의 근대5원칙의 요소를 적용하면서 입면은 팔라조의 입면구성 기법을 적용하는 등 기본적으로 수직적 요소와 수평적 깔끔한 정리와 미학적 의미를 추구하였던 건축가라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제주에 남아있는 구(舊) 제주관광호텔 역시 르꼬뷔제의 근대건축5원칙(자유로운 입면, 연속적인 창, 자유로운 평면, 옥상정원, 피로티)을 연상하게 하는 수평적인 연속창과 수직적인 요소의 굴뚝이 그가 추구하는 건축미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또한 건축의 기능상 표현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제주시민회관 역시 매스의 분절과 도출, 그리고 정면 파사드 등에서 그가 추구하는 건축미가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건축가 김태식이 제주에 남긴 건축 작품들

제주시민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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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에 건축된 제주시민회관은 다양한 문화시설을 건립할 여유가 없었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시설로서 1967년 항공사진상으로도 주변 건축물과 잘 비교된다. 제주시민회관 로비에 새겨진 정초(定礎)에는 1963년 7월22일 착공하여 1964년6월30일 준공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설계자와 감독자, 시공자가 새겨져 있는데 설계자와 감독자 모두 서울특별시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설계와 공사감독 등의 지원에 대하여 서울특별시의 지원을 받았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뿐이다. 또한 공사감독자가 2명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로서 꽤나 큰 공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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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민회관은 정면과 후면은 평지붕으로 된 라멘구조가 되어 있고 주요행사가 이루어지는 중앙부분은 철골조 경사지붕으로 마무리되어 있는데 평면의 기본구성은 무대와 객석, 그리고 중앙에 경기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목적 기능을 가진 문화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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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민회관이 가진 의미는 제주 최초로 철골구조에 의한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요즈음 철골조는 일반적인 건축구조이기는 하지만 45년전 벽돌과 변변찮은 콘크리트 재료로 건축하여야 했던 당시의 건축예산과 기술을 고려한다면 혁신적인 건축기술로 지어진 공공건축물로 평가할 수 있다.

지붕의 주요 부분을 철골트러스로 처리하여 무대와 객석부분, 경기장 부분이 요구하는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형태구성에 있어서도 철골조 경사지붕으로 처리된 주요부분과는 달리 건축물의 전면(前面) 부분은 대칭적인 강한 이미지의 단순한 파사드를 하고 있고 사무실 공간으로 계획된 점도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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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건축적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년 전부터 철거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어 걱정스럽기도 하다. 제주시민회관은 말 그대로 시민을 위한 회관이었기에 제주시민들이 각종 행사를 통해 즐겨 찾았던 대표적인 지역 문화공간이었고 또한 대표적인 공공시설물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공적 가치뿐만 아니라 제주시민회관이 갖는 또 다른 가치는 건립될 당시의 건축물로서의 가치도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제주시민회관은 그저 낡고 볼품없는 건축물이 아니라 당시 최고기술에 의해 구축된 건축물이며 제주건축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는 갖는  대표적인 공공문화시설이다.

건축물은 마치 생명체와 같다. 탄생하고(건축되고) 성장하고(잘 활용되고), 쇠퇴, 소멸하는(철거되는) 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문화재적 가치를 갖는 건조물들을 적극적으로 보존하고 활용하려하며 그런 노력들로 인해 유럽의 도시들은 고풍스럽고  문화적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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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민회관 역시 그 생명력이 소진되어 철거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제주시민회관은 건축적으로도 사회적 기능으로도 아주 의미 있는 근대건조물의 문화재적 가치를 갖는 건축물이었기에 간단히 철거된다면 카사 델 아구아 철거와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상징인 마천루와 같은 초현대적인 건축물만으로 가득한 도시는 삶의 넉넉한 도시공간이 될 수 없거니와 역사와 문화적 깊이를 느낄 수도 없다. 도시의 일상적인 생활공간 곳곳에 과거와 현대의 흔적들이 혼재되어 있으면서도 적절히 조화되어 있을 때  도시공간의 역사성과 문화성은 더욱 빛나는 것이며 시민들의 삶의 질도 높아지는 법이다. 그리고 이런 도시가 매력적인 문화도시이자 관광도시이기 때문에 근대건축물을 존중하고 배려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舊) 제주관광호텔

제주지역에서의 호텔 건립은  1960년대부터 추진된 관광개발 정책에 따라 호텔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는데, 구 제주관광호텔은 민간자본에 의하여 제주지역에 건립된 최초의 민간호텔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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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에 기공, 1963년에 개관하였는데, 당시에는 객실 33실 규모에 커피숍, 바, 한국관 등이 갖추어진 고급호텔이었다. 구(舊) 제주관광호텔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주개발계획 구상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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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신보 1963년1월4일 기사에 실린 제주개발계획관련 삽화에 제주개발의 종합적인 밑그림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제주시지역에 제주관광호텔건립이 표시되어 있다. 구(舊) 제주관광호텔은 박 전 대통령이 제주방문시 숙박하였던 호텔이라는 점에서도 특이지만 5․16군사정부 이후 박 전 대통령이 제주를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한 구상을 수립할 때 이미 관광호텔 건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으며 이를 토대로 제주에 최초로 민간 관광호텔 건립이 실현될 수 있도록 지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인 배치는 L자를 하고 있는데 객실 1개의 폭을 기준으로 하여 기둥간격 설정하여 설계된 지극히 경제적인 철근콘크리트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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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의 매스는 복잡한 건축적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단순한 직방체로 구성된 간결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층은 서비스관련 공간, 2~3층은 객실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과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안쪽의 중정(中庭)은 현관홀에서 쉽게 인지되어지지 않는 다소 폐쇄적인 공간이지만, 커피숍, 식당 등의 서비스 공간에서는 시각적으로 공유(共有)되어 아늑하게 느껴지게 된다.

입면의 창은 르꼬르뷔제의 근대건축5원칙을 따르는 듯하면서도 1층의 저층부는 상층부의 큰 매스를 시각적으로 안정감 있게 받쳐주기에는 약간 부족해 보이는 낮은 층고를 하고 있고 정면 왼쪽의 굴뚝은 연통이라는 본래의 기능뿐만 아니라 매스의 볼륨과는 다소 과장되게 우둑 솟아 지배적인 조형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상호도 여러번변경되어 「제주관광호텔」에서「파라다이스 제주호텔」(1978년), 「하니관광호텔」(1992년)로 변경되는 등 40년이라는 세월의 변화를 보여주는 듯하다.

참고문헌
김태일, 제주건축의 맥, 제주대학교출판부, 2005년
박길룡, 한국현대건축 평전, (주)CNB미디어, 2015년
99건축문화의 해 조직위원회. 국립현대미술관, 한국건축100년, 도서출판 피아, 1999년
한국건축가협회, 한국의 현대건축(한국현대건축총람1), 기문당,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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