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인문학 기자단 '와랑'] '4.3비극의 현장' 해원상생굿에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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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1일에 서귀포 정방폭포 일대에서 해원상생굿이 있었다. 해원상생굿은 2002년 다랑쉬굴을 시작으로 해마다 4·3 영령들을 위로하고 평화를 지향하기 위해 열리고 있다. 이번에는 정방폭포, 소남머리, 서복전시관 야외 공연장 등지에서 진행됐다.

청소년 인문학 기자단 '와랑'은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오후 3시까지 진행되는 해원상생 굿이 열리는 서복전시관 야외공연장 잔디밭에 앉아 관람을 했다. 이번 굿은 제주큰굿보존회의 서순실 심방이 집전했다.

최근 4.3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오전에 도착한 서복전시관 주차장에도 청소년들이 행렬을 이루어 4·3 교육을 받고 있었다. 와랑 기자단과 친구인 학생 몇도 보였다. 서귀포여고에서는 진행하고 있는 과제수행을 역사탐방으로 정한 친구들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과제수행이란 1년 동안 스스로 정한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해서 논문을 쓰는 것이다. 와랑 기자단 학생 중에는 민예총에서 주관하는 4·3 유적지 순례에 신청을 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학생도 있었다.

굿을 하면서 하는 말이 외국어로 들릴 정도로 우리 학생들에게는 낯설었다. 4·3에 대해 배경지식이 많은 학생도 있었고 전혀 없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굿을 관람하는 동안 서복전시관 입구에서 나눠 준 ‘찾아가는 현장 위령제 정방폭포 해원 상생굿’ 안내책자를 읽어서인지 4·3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모두 진지했다.

굿을 보고서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어떤 4·3 행사들이 있었으며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이야기 나누었다. 청소년들은 대부분 4·3에 관심이 없거나 전혀 모르는 친구들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 그리고 앞으로 청소년들이 어떤 방법으로 4·3을 배우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4·3과 관련한 자신의 생각들을 이야기 했다. - 김신숙 제주문화포럼 청소년사업팀장

#. 그들은 왜 죽었을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씻을 수 없는 큰 죄악을 저질러서가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선량한 시민들이었다. 4·3을 이해하려면 1947년 3월 1일 관덕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날 3·1절 기념식 가두시위 중 기마경찰관이 탄 말이 아이를 밟고도 그냥 모른 채 지나가면서 소동이 일어났다. 이에 분노한 사람들은 경찰들에게 돌을 던졌고 그것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인 발포하여 6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3월 10일 도지사를 포함해 제주 전 지역의 공직자 직장인들이 총파업을 벌이고 이 사건 이후로 미군정은 경찰과 서청을 증원시킨다.

서청은 제주에서 온갖 행패를 벌였고 제주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한편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의 노출로 궁지에 몰리고 이에 1948년 4월 3일 제주 전 지역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사태 진압을 위해 9연대가 보내졌고 9연대장 김익렬은 선협상후진압의 원칙을 세우고 김달삼과 협상을 하였다. 4월 28일 평화협상을 맺는다. 그러나 이는 서청의 오라리방화사건으로 인해 깨진다. 그 뒤 9연대장은 송요찬으로 바뀌었고, 그는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내로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폭도배 지역으로 간주한다고 포고한다. 그 뒤 중산간 지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이 때 정방폭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무장대가 아니라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때 죽은 247명을 되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해원상생굿을 지켜보며 정방폭포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었다. 4·3을 책으로 읽었을 때는 화가 났지만 굿을 관람하면서 화가 나는 것보다는 앞으로 4·3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강민범(중문중 3학년)

#.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갈 때 나는 서복전시관을 자주 본다. 하지만 그곳에서 해원상생 굿을 할 줄을 몰랐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신하를 보낸 곳으로만 알고 있던 서복전시관의 비밀을 하나 알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도 4·3의 끔찍한 학살이 일어난 곳이라니.

소남머리라고 불리는 그곳은 정방폭포 위쪽을 속칭하는 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전분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소남머리는 정보과에서 취조를 받은 주민들 중 즉결처형 대상자들이 희생된 곳으로서 이곳에서만 250여 명의 희생자가 있었다고 한다. 정방폭포 절벽에 세워 놓고 총을 쏘아 폭포가 피범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정방폭포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제주도 곳곳 유명한 관광지마다 이러한 4·3의 아픔이 비밀처럼 들어있을 것 같다. 굿을 하면 빙의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굿을 보면서 정말 귀신이 나타날 것 같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버스를 타고가다 서복전시관이 보이면 조금 무서울 것 같다. 하지만 해원상생 굿을 본 것을 계기로 앞으로 내가 잘 모르던 4·3을 조금씩 공부하며 알아 갈 것이다. -한란(서귀여중 3학년)

#. 며칠 전 서귀포여고에서 4·3유족회장으로부터 4·3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유족회장은 4·3 당시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자신이 세 살 때 아버지는 육지수용소에 가서 죽었고 어머니는 산사람에게 물자를 대주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강의를 듣기 전까지 우리 반 친구들은 절반 이상이 4·3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친구들은 정방폭포를 관광지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 전에 4·3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학교에서 A4용지를 나눠 주며 4·3에 관한 이야기를 쓰라고 할 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쓰라고 강요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정방폭포에서 열리는 해원상생 굿을 지켜 보며 내 고장, 내 고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해원상생굿이 열리는 곳 주차장에서 학교친구들을 보았다. 역사탐방을 하는 것 같았다. 역사는 여러 과목 중에서 직접 탐방을 할 수 있어서 좋은 과목인 것 같다. 학교에서도 이런 행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면 더 많은 학생들이 굿을 보러 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서민성(서귀여고 1학년)

#. 접화군생이라는 안내 책자를 받았다. ‘뭇 생명 꽃으로 피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안내책자로 햇빛을 가리며 정방폭포 해원상생굿을 지켜보니 67년 간 숨죽인 채 억울하게 숨어 있었을 것 같은 247명의 억울한 희생자들이 햇살 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눈빛을 상상하며 굿을 보았다. 희생자들과 눈빛을 교환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 고민했다. 예전에 학교에서 <순이 삼촌>을 쓴 현기영작가를 만나 본 적이 있다. 무지막지에 대해서 말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무지하면 막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4·3 사건에 대해 무지하면 앞으로 일어날 위험한 일들도 막지 못할 것이다.

서복전시관은 연못과 잔디가 잘 정비되어 있다. 가끔 이곳을 찾아와 놀았던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이 지역에서 이런 비극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런 때 4·3학살터라는 안내 표지가 있었다면 서복전시관에 대해서만 알지 않고 4·3에 대해 미리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4·3 교육을 시켜 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알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문학작품이나 연극 같은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4·3 문학작품을 보거나 영화를 보고 청소년 스스로 감동을 받으면 자연스레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해 나갈 것 이다. -서연주(서귀중앙여중 3학년)

#. 해원상생굿이란 4·3 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굿이다. 요즘 시대에 굿을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 굿을 본다는 것은 행사로 글짓기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글짓기를 쓴다고 4·3 사건 때 죽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마음이 생길까 의문이 든다. 억지로 하는 것 같다. 굿이나 글짓기나 정말 필요해서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4.3에 대해 청소년들은 꼭 교육을 받으면 좋겠다. 필기를 하며 교과서처럼 배우는 것이 아니라 4·3이 되면 동영상을 통해서도 느끼게 하면 좋겠다. 확실하게 동영상을 보여 주면 수업을 듣지 않는 친구들도 집중한다. 학교에서 4·3 교육을 할 때 다양한 동영상을 보여 주며 지루하지 않게 가르쳐 주었으면 한다. 혹시 지루하게 4·3 교육을 하면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되는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경석(서귀중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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