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㉕>

우리나라 국민 개개인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100점 만점에 59점으로 팔레스타인, 가봉, 아르메니아와 함께 세계 143개국 중 118위다. 지구 최빈국 아이티(61점)보다 낮다.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걸까?

어느 시인은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고 대답할 것이다. 모든 동화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주인공이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난다. 특히 한국인의 의식구조 속에는 해피엔딩 신드롬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연애와 결혼, 성공과 출세, 권세와 재물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도 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행복이 인생의 최상·최종 목표다. 행복의 수많은 조건 가운데 둘만 꼽으라면 남자 입장에선 미인 마누라에 부자로 사는 거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다. “미인을 아내로 맞으면 3개월, 착한 여자는 3년, 지혜로운 여자는 3대가 행복하다” 천하일색 양귀비도 3개월이 지나면 그냥 무덤덤해진다는 것이다. ‘세기의 미녀’라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열 번이나 이혼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20세 연하의 트럭 운전사와 결혼했을 때였을까?)

내 여친은 “돈 많은 남자, 정력 좋은 남자, 맘씨 착한 남자와 세 다리-양다리가 아니라-를 놓고 어장관리(?)를 했는데, 결국은 맘씨 착한 남자와 결혼하게 되드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돈과 섹스, 권력과 지위도 행복의 필요조건이 될 수 있을지언정 충분조건은 아니다. 행복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므로 어떤 기준을 정해서 가타부타할 성질은 아니란 말이다.

희랍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의 2大 조건’을 제시했다. ①부족한 듯, 모자란 듯 살아. 넘치면 실증·권태·교만이 찾아온다. ‘넘치면 넘어진다’ 이게 세상 이치다. 모자란 남편·아내·자녀가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② 절반(1/2)만 성공해. 삼성 이병철 회장이 “과장으로 있으면 행복할 사람을 임원으로 승진시키면 회사나 부하, 심지어 그 자신도 불행해진다”고 했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떨어질 일만 남았다. 절반의 성공에 만족해서 살자.

법정 스님은 행복해지기 위해선 “남과 비교하지 말고, 오래된 것을 아름답게 여기며, 가끔 기도하고, 남을 도우라”고 한다. 파리의 정신과 의사 꾸베씨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은 ①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 ②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 ③다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라 ④행복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달렸다 ⑤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젠가는 행복한 날이 오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앞만 보고 달린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이게 아닌데…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살아왔지?)”하고 각성의 눈을 뜨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우리는 때때로 돌이킬 수 없는 것조차 사랑해야만 한다.(그게 내 운명이니까) 카알 붓세의 詩 「저 山너머」나 메테르링크의 동화 「파랑새」는 행복에 대한 은유요, 알레고리다. 이들은 모두 행복이 ‘요 다음에,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걸 넌지시 일깨워준다. 눈 먼 우리가 포켓 속에 든 행복이라는 이름의 빛나는 보석을 발견하지 못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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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일홍 극작가.

아니, 어쩌면 「여자의 일생」(모파상)의 끄트머리에 나오는 대사-마님, 인생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랍니다-가 인생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신에게 귀의한 신앙인이리라. 그러나 신을 믿는다는 건 지상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기 위함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 돼지보다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알프레드 디 수자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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