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 나의 허운데기 공주

꽃피는 춘삼월을 하루 앞둔 2월 28일 오후 다섯시 사십오분. 사무실에서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딸에게 전화했다. 학원 수업 후 씩씩하게 집으로 걸어가던 딸이 용건을 묻는다.

"떡볶이 먹고 가자. 그냥 거기서 기다려."
서둘러 가긴 했지만 워낙 차가 밀리는 시간이라 이십 여 분 늦었다.
우리의 약속장소는 떡볶이 가게 앞. 딸이 나를 기다리며 꽤 매서웠던 겨울바람을 이겨내게 한 큰 힘은 공중을 떠도는 와이파이였다.
지난 겨울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집안의 와이파이를 끊어버리자 우리 딸의 '와이파이 찾아 삼만리'는 꽤나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스마트폰 탐구를 집중적으로 하는 울 딸에게 월정액 요금으로 제공되는 데이터는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되니, 늘 와이파이를 목말라했다.
그래서 '엄마 찾아 삼만리' 하면 "그게 뭔데?" 할 것 같지만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서라면  매서운 겨울바람도 얼마든지 견디어내는 딸은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학기 초가 되니 여러 가지 가정통신문이 집안 곳곳에 날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잘 작성해서 내야 하는 것도 몇 장 있었다. 그 날도 그랬다. 생업 때문에 늘 시간이 부족한 나는 '반드시 작성하고 자라'는 딸의 말을 무시하고 잠들었다가 아침부터 잔소리를 들으며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나는 나중에 써서 학교로 갖다 주겠다고 했다가 도리어 잔소리 한마디 더 얹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빈칸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뭐, 시작은 무난했다. 여러 가지 연락처 적고, 관심 분야, 동물까지는 일사천리. 다음 칸은 취미. 지난 두 달여간의 긴 겨울방학동안을 떠올리곤 자신만만하게 '뒹굴뒹굴 하기'로 적었다. 내가 지켜 본 바로는 우리 딸의 겨울방학은 먹고 자다가 남은 시간에 오른쪽 왼쪽 방향 틀며 누워 스마트폰을 탐색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뒹굴뒹굴 하기'로 적은 것인데, 딸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엄마, 이거 학교에 낼 건데 이렇게 쓰면 어떵 허나."
이렇게... 딸의 말에서 부정적인 어감이 느껴지는 '뒹굴뒹굴 하기'는 내 평생소원의 하나인데 그게 나쁜 건가?
어쨌든 화이트로 깨끗하게 지워 공란이 된 취미 난은 뜨개질로 채워졌다.
다음은 생활 습관 적기.
취미란에서 한 발 물러난 나는 다시 공격자세로 전환.
어쩌고 저쩌고... 우리 아이는 자기 방을 깨끗하게 정리 정돈하는 것이 많이 부족합니다.. 라고 했다. 결과는 다시 딸의 조언에 따라 ‘많이 부족'이 '약간 부족'으로 수정 되었다. 이날 아침 우리 아이는 자기 방을 정리 정돈하는 것이 약간 부족한 아이로 정리 되었다. (약간이라 쓰고 많이 라고 읽으면 된다.)

우리 딸과 내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함께 요가를 가면서 오가는 차안에서다.
대화의 대부분은 딸이 전달해주는 유익한 정보로 채워진다.
오랜 시간 공들여 스마트폰 탐색을 하면서 건져낸 그 정보들은 이런 것들이다.
우리나라 3대 연예기획사의 특징과 장단점. 각 소속사에서 일하는 가수들이 누군가? 누구는 노래를 잘하고 누구는 실력은 없는데 기획의 힘으로 가수가 됐다. 심지어 '다된 걸스데이 땡땡 뿌리기'라는 어려운 문구의 속사정과 의미까지 자세히 들려준다.
이러한 강의들은 대부분 실시간 음악프로와 함께 진행된다. 스마트폰 음악 어플로 딸이 선곡하고 나는 듣고.
몇 달을 이리 보냈더니 내게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어느 날 커피 한잔 마시러 들어간 카페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들이 '알 수 없는 시끄러운 소리'에서 '누구의 노래'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영어공부를 할 때 시끄러운 소음에서 몇 마디 알아듣는 영어단어가 들려오는 것과 같은 신기한 느낌. 심지어 그 노래를 들으면서 어떤 노래는  함께 따라 흥얼거리기까지 하게 되다니. 놀라운 변화다. 이제 딸과 내가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간극은 이 정도 뿐이다.
붉은 노을하면 나는 이문세를 떠올리지만 딸은 빅뱅을, 너의 의미 하면 난 김창완을 떠올리지만 딸은 아이유가 먼저 생각난다는 것 정도.

내가 전혀 몰랐던 새로운 신세계에 대한 정보도 알려주면서 딸은 간혹 학교생활에 대한 얘기도 양념처럼 몇 마디 얹어준다. 나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들이기에 귀를 쫑긋 세우지만 아쉽게도 그 이야기는 자주 나오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기획사 정보와는 달리 학교생활에 대한 정보는 몇 개  일들이 한데 묶여 뭉뚱그려 전달되는 것이 많다. 그나마 내가 쓸데없이 자주 질문을 하면 금방 끊겨버리기에 요령껏 듣고 꼭 필요한 것만 질문해야 말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얻어낸 이야기들로는 이런 것이다. 만우절날 3학년 언니들과 모의해 2학년은 계단 밑에 숨고 2학년 교실에 언니들이 대신 수업 들어갔다는 내용. 어느 날 급식에서 미니 피자가 나왔는데 한 번 먹고 다시 한 번 먹기 위해 늘어선 줄이 얼마나 길었는가 하는 이야기, 벚꽃 화사하게 핀 날엔 모두가 점심시간에 나와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 체육시간에 수행평가를 하는데 꼭 엄마처럼(치사하게!) 걷는 듯 달리는 애가 있었다는 이야기. 말하는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야 그저 일상의 얘기겠지만 나이 오십의 엄마에게는 모두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나날들이다.

그래서 난 매일 비굴모드로 아부해가며 한 줌이라도 더 그 발랄하고 생생한 얘기를 듣고자 애쓰고 있다,  물론 그 이야기 속에는 힘들고 괴로운 상황도 있다. 그러면 난 '엄마'의 자세로 돌아가 들어주고 토닥여준다. 참 요즘은 어른들도 힘들지만 애들도 힘들다.

학교생활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집에서는 거의 자유 여학생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딸이다. 여전히 뒹굴뒹굴 하며 스마트폰도 탐색하고 음악도 듣고 고양이랑도 놀고.. 그러면서 집안도 약간 더럽히고. 가끔 내가 뭐라 잔소리하면 고개를 살짝(45도 각도 정도) 돌리며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고 "엄마 사랑해 하트 뿅뿅"하며 넘어가려 한다. 물론 나는 잘 넘어가지 않는다. 백발백중 넘어가는 이는 아빠다. 매주 일요일 아침, 내가 잔소리를 하며 교복 와이셔츠를 빨라고 딸에게 시킨다. 마지못해 옷에 물을 묻히고 빨기 시작한다. 그리고 몇 분 후. 분명 시작은 딸이 했는데 열심히 마무리는 아빠가 하고 있다. "아빠, 사랑해 하트 뿅뿅" 에 넘어간 것이다.

(나도 하루는 혹시나 해서 딸의 하트 뿅뿅 코스프레를 하면서 남편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결과는? 부탁한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런 충고가 뒤따랐다. "어울리지 않는 짓 하지 마, 거북하다")

학교 가기 전 거울 앞에서 긴긴 시간 머리를 빗고 정리하는 딸에게 이젠 감히 허운데기 공주라는 별칭을 붙일 수 없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고 울 딸은 쑥쑥 커가고 있는 것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중2 사춘기 소녀와 나날이 체력이 떨어져 가는 갱년기 엄마는 이렇게 봄날을 보내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가뭄에 콩 나듯 가끔 이런 생각도 하긴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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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게 잘 커줘서 고맙다. 우리 딸!
물론 이는 내 컨디션이 아주 좋을 때고 대부분은 온갖 희망사항만 떠오른다.
설거지를 좀 더 자주 해주었으면. 옷 입고 나서 제자리 놓으면 좋은데, 기껏 두 달 다니고 그만 둔 수학학원을 다시 다니면 좋은데. 전교 1등 친구 자랑만 하지 말고 자기도 좀 공부를 잘했으면. 내가 이러거나 말거나 우리 딸은 여전히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며 잘 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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