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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여성계와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이효재 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가 15일 열린 2015설문대할망제에서 특별초대제관으로 참여해 화제다. 이효재 선생은 2013년부터 제주에서 살고 있다. ⓒ제주의소리
[인터뷰] 설문대할망제 특별초대제관 맡은 이효재 전 이화여대 교수

“내가 설문대할망이 된 것 같아. 황홀해서 말이 안 나와.”

제주의 하늘 아래 앉아있는 노구(老軀)의 여성 학자는 분명 “황홀하다”고 말했다. 귀도 어둡고 부축 없이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지만 제주 자연과 마주한 노인은, 92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기쁜 표정으로 감격했다.

서슬 퍼런 유신시절부터 군사정권의 군홧발에도 굴하지 않은 지식인이자, 여성학을 넘어 민주화, 언론, 지역사회, 통일 등 대한민국 사회의 모순에 맞선 이효재(92) 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현 한국여성단체연합후원회장)가 제주섬의 어머니, 설문대할망 앞에 섰다.

자녀를 먹여 살리고자 스스로를 던진 설문대할망의 희생이 “한반도와 지구에 사는 인류가 본받아야 할 생명존중 정신”이라는 이효재 선생의 말은, ‘부(富)의 축적’이란 매몰된 욕망 앞에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뒷전에 던져둔 이 시대에 잔잔한 경종을 울린다.

5월 15일 오전 10시 제주돌문화공원에서 열린 2015설문대할망제에는 특별한 손님이 참석했다. 

그 ‘특별한 분’의 나이는 올해로 92세, 백발이 성성하고 깊은 주름이 새겨진 모습은 한 눈에 봐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할머니다.

그렇지만 사회자가 이름 세 글자가 소개하자 마치 팬클럽을 연상시키는 환호성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쏟아진다.

열렬한 성원을 받으며 돌문화공원에 온 주인공은 한국 여성계와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이효재 선생이다. 그는 올해 설문대할망제에서 9명의 여성제관 가운데 특별초대제관으로 초청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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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여성계와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이효재 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가 15일 열린 2015설문대할망제에서 특별초대제관으로 참여해 화제다. 이 선생은 2013년부터 제주에서 살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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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여성계와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이효재 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가 15일 열린 2015설문대할망제에서 특별초대제관으로 참여해 화제다. 이 선생은 2013년부터 제주에서 살고 있다. 사진 가운데가 이효재 선생, 왼쪽은 이덕희 하와이 이민연구소장, 오른쪽은 김영화 경북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두 사람 모두 이 선생의 제자다.ⓒ제주의소리
불편한 걸음이지만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앉은 이 선생은 한낮의 뜨거운 햇빛에도 지친 기색 없이 설문대할망제의 모든 과정을 함께 했다. 

가뭄으로 힘겨워 하는 자식들을 살리고자 죽 솥에 몸을 던졌다는 설문대할망에게 바쳐진 메밀죽을 비롯해 준비한 음식도 흔쾌히 맛봤고, 공연도 흥겹게 즐기며 건강함을 뽐냈다.

이효재 선생이 걸어온 길은 곧 한국 여성학의 길이자, 한국사회가 진일보(進一步)하는 길이었다.

1958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박정희 유신정권과 신군부 시절을 겪으면서 민주화운동에 힘썼다. 

1970년대 이화여대 학생운동의 시작을 알린 ‘새얼’의 지도교수를 맡아 당국에 쫓기는 학생을 동료 교수들과 함께 돌봐준 일화는, 제자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일화다.

신군부 당시 시국선언에 나선 지식인들과 함께 학교에서 해직되자, 1983년 힘을 합쳐 해직교수협의회를 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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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환경오염문제 상담기구인 '녹색의 전화' 개통식 모습. 맨 왼쪽부터 이효재 선생, 박영숙 전 국회의원, 이희호 여사. 사진출처=국회보. ⓒ제주의소리
이후 <한겨레> 창간위원, 한국여성민우회 초대회장, 한국여성단체연합 고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등을 맡았다.

한명숙 전 총리, 지은희 전 여성가족부 장관, 장하진 전 여성가족부 장관, 김상희 국회의원, 최영희 전 국회의원, 이경숙 전 국회의원 등 국내 여성 정치인들 가운데 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이 꼽기 힘들 정도다.

1997년 은퇴 후에는 고향인 진해로 돌아가 어린이도서관 ‘기적의 도서관’ 운영위원장과 사회복지법인 경신재단 부설 사회복지 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며 풀뿌리운동에 매진하는 열정을 보였다. 그리고 2013년 제주로 이주해 현재 아라동에서 거처를 두고 있다. 

제자들은 이 선생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큰 산이자, 생각만으로 눈물을 자아내는 고마운 스승으로 가슴에 품고 있다. 

최근 제주 서귀포로 이주한 여성학자 오한숙희(56) 씨는 1979년에 이화여대에 입학해 가르침을 받았다.

그녀는 “한국사회의 여성, 가족, 어린이, 역사 등의 문제에 두루 관심을 가지며 몸소 실천해온 분”이라며 “한 인간이 태어나서 시대와 역사를 어떻게 살다가 가야하는지 몸으로 여실히 보여준 진정한 스승”이라고 눈물 어린 찬사를 보냈다.

1973년 이화여대에 입학한 김영화(61) 경북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소외당했던 영역에 대해 언제나 소명감으로 대했던 선구적인 사회학자”라고 칭했다.

김 교수는 “선생님의 발자취는 제자로서 따라가기 벅찰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도 곧 퇴임을 앞두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제 나이 때 활동하던 모습과 비교하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며 “그렇지만 이런 스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말 영광이고 축복”이라고 밝혔다.

15일 [제주의소리]와 만난 이 선생은 제주도민을 대표해 설문대할망 앞에선 이 순간이 너무나 황홀하다고 말했다. 비록 고령으로 짧게 말을 이어가지만 눈빛과 말투 속에서는 한 시대를 고뇌한 학자의 기운이 여전했다.

“완전히 환상 속에 있는 것 같아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 온 세계인이 자연 속에서 즐기고, 또 남북이 상생하는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 온 세계가 춤추고 즐기는 그림 속에 (내가) 지금 있어. 평화와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이 모여서 춤추고 기원하니 너무 아름다워. 내가 살아서 참여한다는 것이 즐겁고 복 받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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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여성계와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이효재 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가 15일 열린 2015설문대할망제에서 특별초대제관으로 참여해 화제다. 이 선생은 2013년부터 제주에서 살고 있다. 자신의 제자 오한숙희(왼쪽)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 전 교수. ⓒ제주의소리
마침 설문대할망제단 앞 무대에서는 5개 종교 성직자들의 축원식이 끝나고, 기타와 건반, 북이 만들어내는 흥겨운 명상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생명의 신화인 설문대할망을 구현하는 돌문화공원의 자연과 명상음악이 한데 어우러진 현장에서, 노교수는 마음만큼 푸르렀던 청년 시절로 돌아갔다.

이 선생 스스로에게도 설문대할망제 특별초대제관은 특별한 경험이다. 신화의 주인공이자 신화여신을 기리는 제관도 여성이다. 여성학에 매진해온 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설문대할망은 우주의 원리가 담겨있고 생명을 살리고 창조하는 역할이야. 여신이 생명을 살리기 위한 사랑으로 희생하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섬나라로 창조됐다는 신화, 이건 이 시대의, 이 땅의 주인들이 이념과 정신을 살려서 실현해야 해.”

이 선생이 제주에 와서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는 평화 그리고 생태다. 90이 넘는 나이지만 지금도 찾아오는 제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독서에 매진하며 스스로를 갈고 닦기에, ‘평화·생태’라는 제주다운 화두를 잡아낸 것이리라. 

이효재 선생은 제주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겼다. 비록 제주에서의 삶은 아직 2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생애 대부분을 보낸 ‘뭍’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놀라운 에너지를 얻으며 달라진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 와서 아주 매 순간 마다 내 생명이 소생하고 있어. 하늘과 땅과 바다가 하나가 되서 제주자연이 내 삶에 힘을 넣어줘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야. 제주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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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여성계와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이효재 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가 15일 열린 2015설문대할망제에서 특별초대제관으로 참여해 화제다. 이효재 선생은 2013년부터 제주에서 살고 있다. 제자들의 요청에 활짝 웃으며 하트 모양을 손으로 그리는 이효재 선생.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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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여성계와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이효재 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가 15일 열린 2015설문대할망제에서 특별초대제관으로 참여해 화제다. 이효재 선생은 2013년부터 제주에서 살고 있다. 이 선생(오른쪽에서 네번째)을 비롯한 9명의 여성제관들과 강윤형 제주도지사 부인(가운데 평상복)이 설문대할망제단에서 기념촬영 중이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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