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46)진압부대 소대장에서 주월한국군사령부 총사령관이 된 채명신 

채명신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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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명신.

‘총사령부 특명 제38호 (1948년 3월 29일) 통위부/ 조선경비대 총사령부/조선 서울 특명 제38호/ 1948년 3월 29일/ 1. 하기명 장교의 조선경비대사령부로부터 전속지명을 포고함. 1948년 4월 16일 유효.(중략)/ 제주도 제9연대로/ 소위 김영직(金泳禝) 10811/ 소위 채명신(蔡命新) 10826/ 소위 조병홍(趙秉洪) 10848/ 소위 박노구(朴魯球) 10867/ 소위 김낙헌(金洛憲) 10887/ 소위  김준교(金俊敎) 10905/ 소위  안용학(安用鶴) 10927/ 소위  박용운(朴龍雲)  11012 (후략)’-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인사명령

채명신(蔡命新, 1926. 11. 27 ~ 2013. 11. 25)은 황해남도 곡산군에서 출생했다. 제2국민병으로 일본군의 동원훈련을 받는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진남포소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일했다. “공산주의는 착취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선전에 솔깃해 공산주의를 한때 좋게 생각했지만 곧 공산주의의 폐단과 한계를 간파하고 월남한다.
 
고교 시절 친하게 지내던 소련군 대위가 술을 마시면서 “공산당에 계급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공산당에 들어가지 마라. 너도 집안도 나라도 모두 망한다”는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진남포의 소련군 부대에서 계급별로 1~6등급으로 나눠 철저히 차별해 식사를 배급하는 실상을 보고 공산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다시 생각했다. 1946년 2월 8일 군사정치학교 평양학원 개교식 때 만난 김일성이 “동무가 필요하다”며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노모를 핑계대고 뿌리칠 수 있었다.
 
소련군 주둔 이후 공산주의를 피해 1947년 월남하였다.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제5기로 졸업하고 제주도 9연대로 발령받았다. 제주4·3 발발 사흘 뒤였다. 제주도는 당시 정부수립 반대여론이 강한 곳이었고, 평소 동기들과 선배들 사이에서 ‘제주도 보내버린다’는 말이 반 협박처럼 쓰일 만큼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는 동기 8명과 함께 낯선 섬 제주도에 상륙했으며 “소대원들의 눈초리에서 공산당 소굴 한복판에 내던져졌다”고 느꼈다. 그는 경비대 장교들에게 제주도는 ‘공산당 소굴’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군 입대 전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도로 발령을 받자, 채명신은 통위부 인사참모 박진경 중령을 만나 그 이유를 물었다. 박진경은 “인사비밀인데 내가 그곳 9연대장으로 가게 됐다”면서 “9연대 사병들이 모두 제주도 출신들뿐이니 어떻게 그 폭동을 진압할 수 있겠나. 그래서 고심 끝에 내가 귀관들을 뽑았지”라고 말했다. “사방이 온통 붉게 물든 눈동자들로 둘러싸여 있었으니 토벌작전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눈에 비친 제주도는 ‘좌익의 근거지’가 아니라 ‘붉은 섬’이었다. 그는 4·3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김익렬 중령의 진압방식에 불만이 많았다. 박진경 연대장 밑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채명신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한쪽에서는 박진경 대령이 양민을 학살했다고 하는데 그는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습니다. 4‧3 초기에 경찰이 처리를 잘못해서 많은 주민들이 입산했습니다. 그런데 박 대령은 폭도들의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의 하산에 작전의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민간인 보호작전은 인도적이면서 전략적 차원의 행동입니다.”

그렇지만 박진경이 무모한 강공작전을 폈다는 주장은 그가 연대장 취임식 때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발언했다는 전임 연대장의 증언과 맞물려 더욱 증폭되었다. 특히 박진경 연대장을 직접 저격했던 손선호(孫善鎬)는 재판정에서 박진경 연대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그의 작전에 대하여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하였다. (중략) 사격연습을 한다 하고 부락의 소(牛) 기타 가축을 난살(亂殺)하였으며 폭도의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또 매일 한 사람이 한 사람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도 전연 없었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의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朝鮮中央日報』, 1948년 8월 15일.

진압부대 소대장 채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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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사단 참모장 시절 사단을 방문한 박정희와 함께한 채명신.
‘그 골육지정의 통솔법 덕분에 나는 제주에서 살아남았다. 당시에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암살을 지시한 이는 나의 직속상관 문상길 중위였고, 하수인은 양회천 일등병이었다. 영내가 온통 공산주의지들로 득실거렸던 것이다. 나 역시 일촉즉발의 위기를 겪었다. 첫 번째는 부대 인근의 웅덩이에서 목욕을 할 때였다. 「탕」하는 총소리가 들리더니 총알이 겨드랑이 옆을  스쳤다. 그 즉시 반대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응사한 것이다. 소대원들이었다. 나도 몰래 뒤를 미행하며 나를 보호해 준 부하를, 전쟁터에서 부하를 살리기 위한 골육지정의 통솔법이 오히려 나를 살렸다.’-『참군인 채명신 장군』 회고록에서 발췌(경향신문 1996.6.25.)

제주4·3 무장대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주민 3만여 명(당시 제주인구의 10%)을 학살하였으며, 그 중심에 박진경 연대장이 있었다. 그 휘하부대 소대장이 바로 채명신이다. 그는 총사령부에서 훈련 중 제주도로 보낸다는 이야길 귀가 아프게 들었다. 군번이 10826번이었는데, 400명중에 임관 성적이 26등을 했기에 제주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제주도로 발령이 난걸 알고, 당시 연대장 박진경 중령을 만났더니, 성적은 좋은데 하여간 발령이 났다고 하면서, ‘채 소위가 간다면 나도 가겠다’고 해서 함께 제주도에 도착했다.

“나는 오늘부로 너희의 소대장으로 부임한 육군 소위 채명신이다.” 소대원은 모두 42명. 84개 눈동자가 살기등등했다. 적의와 증오에 찬 눈초리를 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채명신이 부임하자 어느새 “이북에서 김일성 장군을 배신하고 남하한 반동분자”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4·3의 진상은 참담했다. 제주도내 15개 경찰서 가운데 14개가 폭도들에게 피습됐다. 남로당은 폭력을 통해 조직을 확대하면서 1948년 5·10 총선거를 방해했다. 

어느 날 개울에서 목욕을 할 때였다. ‘탕’하고 총소리가 들리더니 총알이 우측 겨드랑이를 비켜갔다. 고개를 숙였다. 그 즉시 등 뒤에서 총소리가 났다. 소대원들이 암살 정보를 알고서는 소대장을 보호하려고 지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소대장님 괜찮습니까?” 소대원들은 조를 짜서 채명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또 무장대원들은 미인계를 쓰서 채명신을 자기편으로 포섭하려고 했다. 어느 날 시내구경을 다녀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모슬포에서 여학생을 만났는데 얼굴이 빼어났다. 상을 차려놓고는 여학생이 유혹을 하던 중 갑자기 인민항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는 순간, 정신이 바짝 들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는 1948년 8월 제주 9연대의 해체로 수원 11연대로 전속됐다가 개성 송악산 전투를 겪고 6·25로 참전했다.

“초토화 진압작전을 명령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4·3초토화 작전에 참여한 예비역장성 채명신, 4·3희생자 전원을 폭동가담자로 매도한 이선교 목사 등이 제주4.3특별법이 인정한 희생자 1만3564명 중 1540명이 남로당 간부이거나 폭동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다며 제기한 헌법소원·행정소송은 조사활동의 총체인 4·3진상보고서를 부정하는 것...(중략)...4·3으로 억울한 죽임을 당한 희생자의 가족들은 빨갱이의 자식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져 연좌제의 굴레 속에서 숨죽이며 인고의 세월을 보낸 반면 민간인 신분으로 제주도민에게 온갖 악행을 자행해 온 서청을 비롯한 우익단체원 희생자 639명은 국가유공자로 정부의 보훈대상이 됐다.”-강창일 국회의원 성명서 중에서(2009년 3월 17일)

2009년 3월 9일. 소위 ‘제주4·3사건역사바로세우기대책위원회’ 소속 회원들은 ‘제주4·3사건 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폭도와 유족을 같은 희생자로 인정했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어 4·3특별법 일부개정 법률안이 일부 의원들에 의해 국회에 제출되었다. 동년 3월 17일. 제주출신 강창일 국회의원이 극우보수세력의 헌법소원 취하와 4·3특별법 개정안 폐기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특히 이승만의 양아들 이인수, 예비역장성 채명신, 4.3희생자 전원을 폭동가담자로 매도한 이선교 목사 등 12명이 제기한 헌법소원·행정소송은 조사활동의 총체인 제주4·3진상보고서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간 채명신, 과연 그는 누구인가? 민족의 영웅인가? 아니면 동족 학살자인가? 그는 어느 날  KBS뉴스에 출연하였고 “한국의 기본 전략이 뭐냐면,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거야”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1965년 초대 주월사령관에 임명돼 단독작전권을 행사하며 4년 가까이 한국군을 지휘하였다.

그렇다면, 4.3 때는 어떠했는가? 소위 빨갱이 한 명을 잡기 위해 백여 명의 양민을 희생시켰는데 이는 토벌군의 기본 전략이었을까? 수만 명의 무고한 양민을 희생시킨, 그 가해자는 누구인가? 채명신은 조선경비사관학교 졸업 후 4월 10일 9연대로 배치 받았는데, 모슬포 자대까지 가는 동안 경찰관의 사체를 보며 놀랐다. 자대에 가니 부대원들이 더 놀랐다. 이북 출신 신입 장교가 좋게 보였을 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6월 18일에 연대장이 암살을 당한다. 그 다음 차례가 자신이었다.

연대장 암살 때는 오히려 소대원들이 공격을 막아 줘서 살게 되었다. 이 때 separate&destroy라는 개념을 가지게 된다. 일단 적을 철저히 분리한 후에 섬멸하는 개념이다. 월남전에서도 잘 먹혀서 미국 지휘관들이 격찬을 하게 된 전술이다.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모토로 강력한 대민지원을 펼친다.

‘정부에서는 2000년 1월 12일 제주4·3특별법을 통과시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를 하도록 하였는데, 이 보고서가 황당하게 서술되었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찾아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였는데 폭도까지 희생자로 결정한 것은 크게 잘못 되었다. 나는 제주4·3사건 때 소대장으로 진압에 참여 4·3사건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제주4·3폭동진압소대장 채명신 장군(이선교 저 『제주4·3사건의 진상』 추천사 중에서) 

‘제주4·3폭동을 진압하면서 전사한 9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비롯한 186명의 장병과 153명의 경찰관, 1673명의 우익, 그리고 14연대 반란을 진압하면서 순직한 12연대 백인기 연대장 이하 전사한 많은 장병들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지 않고 오늘의 한국이 있게 되어 이 분들께 감사와 명복을 빌며, 이 작은 책이 유가족 여러분들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이선교 저 『제주4·3사건의 진상』 머리말 중에서 

참으로 황당한 주장이며 논리이다. 채명신은 자신을 “나는 제주4·3사건 때 소대장으로 진압에 참여 4·3사건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이선교는 “9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비롯한 186명의 장병과 153명의 경찰관, 1673명의 우익, 그리고 14연대 반란을 진압하면서 순직한 12연대 백인기 연대장 이하 전사한 많은 장병들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지 않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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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 희생자 지도. 출처=제주4.3위원회 백서 2008

채명신과 박정희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다/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자유통일 위해서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 가리까/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용사들아/ 남북으로 갈린 땅 월남의 하늘아래/ 화랑도의 높은 기상 우리들이 보여주자/ 화랑도의 높은 기상 우리들이 보여주자// 보내는 가슴에도 떠나는 가슴에도/ 대한의 한마음이 뭉치고 뭉쳤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태극깃발 가는 곳 적이야 다를 소냐/ 무찌르고 싸워 이겨 그 이름을 떨치리라/ 무찌르고 싸워 이겨 그 이름을 떨치리라’-맹호들은 간다(작사/유호, 작곡/이희목)

1944년 4월 일본육사를 졸업한 박정희는 만주군 제5관구 보병 제8단에서 근무하다 해방을 맞이하고, 1946년 6월 귀국하여 역시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로 들어간다. 그후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있으면서 육사 5기생들을 가르쳤다. 육사 5기는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모집했으며, 3분의2가 이북 출신이다. 이들은 훗날 5·16쿠데타의 주역이 된다. 김재춘·채명신·박치옥·문재준 등이 모두 5기생들이다.

박정희는 채명신의 아홉 살 연상이다. 채명신은 당시 박정희를 이렇게 회고했다. “작달막한 키지만 곧은 자세와 근엄한 표정으로 후보생들 모두를 위엄으로 압도했다. 나는 늘 먼 발치에서 박정희 대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때부터 채명신은 박정희의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한국전쟁 중 백골병단을 이끌고 적지에서 유격전을 벌였던 채명신은 천신만고 끝에 남하, 강릉9사단사령부에서 사단 참모장이던 박정희 대령과 재회했다. 채명신은 박정희와의 재회를 “여전히 까무잡잡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그를 보자 눈물을 글썽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50년대 후반 백골병단 생존자들과 강릉을 찾았다. 당시 9사단 참모장이 박정희 대령이었다. 박 대령은 ‘죽을 줄 알면서도 이북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하니 대단하다’며 고깃집으로 데려가 위로해 주었다. 피 묻은 채명신의 점퍼를 자신의 털 달린 좋은 점퍼와 바꿔주기도 했다. 

채명신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5년 충남 논산의 육군훈련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육군훈련소는 군내 비리 때문에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고, 부유층 자제들은 입대조차 하지 않아 ‘거지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이를 ‘진짜 군대’로 만든 사람이 채명신이라는 평가가 있다. 채명신은 “육군훈련소 사정을 선배였던 박정희 장군에게 말했더니 ‘상부에 항의할 것’이라며 부들부들 떨더라”고 이야기했다. 

실제 1960년 1월 부산에 있던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한 박정희 소장은 거드름 피우며 미군이 공여한 물자나 빼돌리던 기존 장성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당시 부산 군수기지는 미군의 공여물자가 들어오는 곳으로 군수품을 빼돌리려는 군 관계자와 업자들이 모두 모이는 ‘복마전’이었다. 박정희 당시 사령관은 이를 원천차단 하겠다고 나섰다.

‘5·16 군사정변 때 채명신은 철원의 5사단장이었다. 그는 서울에 인접한 사단 병력을 완전히 장악해 쿠데타 진압 작전의 여지를 일찌감치 차단했다. 하지만 그가 쿠데타에 가담한 건 박정희에 대한 신뢰와 우국충정 때문이었지, 정치적 야심은 없었다. 그게 두 사람의 차이였다. 군사정변 직후 혁명 5인위원회 멤버로 선임되었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면서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으로 발탁했다.  

1963년 소장으로 진급,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을 거쳐 1964년 미국 유학,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을 수료하고 귀국한다. 귀국 후 육군 제3관구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결국 박정희의 구심력과 채명신의 원심력이 마찰을 일으킨 건 1972년이다. 유신헌법을 추진하던 박정희에게 채명신은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집권 연장을 하면 각하 생명을 끊는 것”이라며 ‘돌직구’를 날린 것이다.

베트남전에서 국군이 성공하였던 가장 주요한 요소는 주장(主將) 채명신 장군이 탁월하였기 때문이다. 채명신 장군의 전술은 중대전술기지로 집약된다. 어디에도 있고, 아무 데에도 없는 베트콩을 찾아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베트콩이 모여들도록 유도하여 잘 준비된 기지에서 소모되도록 하는 중대기지 전술은 베트콩을 찾아 격파한다는(seek and destroy) 미군의 전술과 완전히 다른 전술이었다. 또한 잘 방호된 기지를 중심으로 하여 민사심리전으로 주민 마음을 산다는 것은 대유격전의 진수였다. 채명신을 맹호 사단장으로 선정한 것은 통수권자로서 박정희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채명신은 이후 대장 진급에서 탈락해 예편한다. 박정희로서는 경계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끝까지 그를 내치지 않고 예우하고 후원했다. 그 이후 시해될 때까지 10년 여 동안 채명신에게 대사직을 부여하고 챙긴 것도 박정희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채명신 역시 단 한 번도 박정희를 원망하지 않았다. 스스로 계급장을 떼고 전우들과 함께 있길 원한 채명신 은 이제 사병묘역에서 저 멀리에 자리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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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꽝응아이성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 

베트남의 ‘한국군 증오비’

‘차라리 총을 쏴서 깨끗하게 죽이지, 차라리 날 선 칼날로 심장을 찔러 한 방에 죽였으면 그래도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한국군 총검은 날이 무뎠다오. 그러니 네 살 배기 나는 아홉 방을 찔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흘 밤낮을 피를 흘리면서도 물 한 방울 못 먹고, 고통으로 온몸을 뒹굴면서 그렇게 죽어갔다고요.’-구수정의 페이스북, 베트남 푸옌성에서 만난 생존자 ‘크엉’의 구술기록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용사들아...... ‘맹호들은 간다’를 부르며 뛰어 놀던 사람들은 베트남 빈호아(Binh Hoa)에서 처연한 자장가를 들어야 한다. “아가야 아가야, 너는 기억하거라. 한국군이 우리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마을 초입에는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쓴 낡은 ‘증오비’가 서있다. 빈호아 마을은 베트남 중부 지방에 흩어져 있는 80여 곳, 90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는 마을이다. 

박정희는 18년의 통치기간 중 9년간 ‘전쟁’을 했다. 1964년 9월 태권도 교관단과 의료단 파견을 시작으로, 73년 봄까지 연인원 32만 명의 병력이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1972년에는 파병 한국군의 수가 미국군의 수를 넘어섰다. 그 결과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5천명의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1만6천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만 명이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렸다.   

고엽제 피해자의 고통이나 라이따이한 문제도 있었지만, 역시 가장 뜨거운 이슈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었다. 그것은 2001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의 사과로까지 이어졌다.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상대는 한국을 방문했던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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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곳곳에 세워진 ‘한국인 증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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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옌성 붕따우 마을에 있는 한국군증오비. 베트남전 종전 이듬해인 1976년 마을 주민에 의해 건립.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 청룡여단 1개 대대가 이곳으로 행군을 해왔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제국주의와 남조선 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동토록 할 것이다. 그들은 비단 양민학살 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우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건강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모지로 만들었다.” -베트남의 ‘한국군 증오비’  중에서 

베트남 꽝응아이(Quang Ngai)성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만행을 기록한 비문이 여러 개 있다. 퐁니·퐁넛 학살 사건(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은 1968년 2월 12일 퐁니, 퐁넛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학살당하여 70여명이 죽은 전쟁범죄이다. 퐁니·퐁넛 학살 이외에도 하미 학살사건, 빈호아 학살 등이 있다. 

퐁니·퐁넛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벌어지자,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에 강력히 항의하였고 미군은 독자적인 조사를 벌였다.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는 조사결과를 주월미군사령관 및 군부 고위장성에게 보고하였다. 감찰부는 한국군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잔혹 행위를 저지르고 사람들을 학살하였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는 기밀문서로 분류되어 비공개로 있다가 30년이 지난 후, 2000년 6월1일 비밀이 해제되었다. 미군 감찰부의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은 미 해병 연합 행동소대 Delta-2 소속 본(J. Vaughn) 상병이 촬영한 것이다. 본(J. Vaughn) 상병은 한국군 철수 이후 민간인 부상자 치료를 위해 마을로 들어갔다. 보고서는 퐁니·퐁넛 학살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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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꽝응아이(Quang Ngai)성에는 한국군의 만행을 기록한 비문이 여러 개 있다.

‘1968년 2월 12일 사건/  장소 : 꽝남 성(Quang Nam) 디엔반(Dien Ban)현 퐁니(Phong Nhi)·퐁넛(Phong Nut) 마을/ 작전부대 : 한국 해병 2여단 1대대 1중대(일명 괴룡1호 작전)/ 희생과 손실 : 6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음. 한국 해병 1명 부상’

베트남 아이들은 지금도 이렇게 외친다. “싫어요, 한국사람이잖아요.” 그 베트남 전쟁 중심에 바로 채명신이 있다. 미제국의 패권전쟁에 꼭두각시가 되었던 월남파병, 1964년 국회의 파병 결정으로 참전한 결과, 1973년의 종전까지 8년 6개월 동안 연 31만2853명이 파병되어 전사자는 4624명, 부상자는 1만5000명이다

베트남에서는 전쟁범죄조사위원회를 꾸려 끊임없이 전쟁범죄를 발굴, 조사해 왔다. 그 대부분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다. 한국군의 특징은 아무런 심의과정 없이, 설명 없이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빈딩(Nghia Binh)성에는 15개의 위령비가 있다. 그 중 380명의 민간인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고자이(Go Day) 마을은 학살의 한 지점일 뿐이다. 이는 참혹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함이다. 베트남에는 최소 30개 이상의 이른바 ‘한국군 증오비’가 있다.

‘베트남에 '따이한(大韓, 한국)제사'라는 것이 있다. 이름도 생소한 이 제사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을 위한 제사다. 베트남 인민들의 따이한제사는 그래서 마을별로, 지역별로 한날한시에 열린다. 죽은 날이 같으니 온 동네가 집집마다 동시다발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제사를 지낼 사람이 남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온 가족이 몰살당한 집은 제사를 지낼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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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군 학살을 기록한 베트남정부의 공식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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