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47) 함덕해수욕장과 서우봉은 바로 학살터

‘榮辱의 세월’을 견딘 마을주민들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3·1만세운동은 조천리를 시발로 함덕·신촌·신흥리로 확대되었다. 3차 시위는 3월 23일 함덕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위는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조천오일장터에서 백응선(白膺善)· 김년배(金年培)· 이문천(李文千)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특히 이문천은 약 100명의 시위대를 지휘하여 함덕리로 행진했다. 함덕리에서는 청년들과 주민들이 합세를 하며 시위대가 800명까지 늘어나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 시위대는 함덕국민학교에서 비석거리 일대를 행진했다. 이 시위로 이문천·백응선 등 8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이문천은 1919년 5월 29일 대국복식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때 시위대에 유일한 여성으로 신흥리 이귀동(李貴童)이 참여했다.
 
3·1운동의 영향으로 항일의식이 확산되면서, 1923년 함덕청년회가 조직되었으며, 이어 여자청년회도 조직되었다. 그들은 노동야학회를 결성하여 우리글과 역사를 부녀자에게 가르쳤다. 1926년 6월 24일 신좌면 청년연맹이 조직되어 신촌·조천·함덕·북촌·신흥창년회가 가맹하였다. 1928년 8월 21일 제주청년 함덕지부가 설립되어 고종건(高宗虔)을 위원장으로 피선하였다. 1930년 함덕청년지부에서 ‘난장이 나라’ 소인극 공연을 통해 세태를 풍자했으며, 1930년 2월 17일 ‘아리랑농촌의 설움’ 연극공연으로. 한윤섭·김명훈·현사선·김일준 4인이 검속되었다. 
 
1931년 1월 15일 일본 도오쿄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함덕리 출신 한영섭(韓永燮)이 사망하자, 청년동맹원들은 동지장(同志葬)으로 장사를 치르기로 결정하고 시신이 도착하자, 1월 21일 ‘추도 적혁(赤革) 한영섭의 영’, ‘불평등한 사회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자유를 건설하려고 그대는 죽었지만 그대의 주의 정신은 동지인 우리들에게 계승되어 분투할 것이니 고이고이 진좌하라’라는 내용의 기를 준비하고 장례식장에 세워놓았다.

장사를 지낼 때 사람들에게 혁명가를 제창시켰다. 비석 표면에 ‘동지적광한영섭기념비(同志赤光韓永燮記念碑)’, 이면에 “차디찬 흰 빛 밑에 눌린 무리들아 고함쳐 싸우라고 피 뿌린 동지였다”는 비문도 썼다. 경찰은 청년 20여 명을 검속하여, 비(碑)를 압수하고 관련자들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김두성(金斗性: 20세, 농업)은 징역 1년 6월, 고종건(21세, 농업)ㆍ김일준(金日準: 21세, 농업)ㆍ양구문(梁龜文: 25세, 농업)ㆍ김진희(金晉熙: 25세, 농업)는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되었다. 이 때 김재동(金才童: 31세, 농업)도 검거되었는데, 목포형무소에서 1932년 3월 14일 옥사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마을사람들은 또다시 역사의 회오리를 견뎌내야 했다. 제주4·3 초기 무장대가 함덕리를 장악하고, 지서는 번번이 무장대의 피습을 받았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 식량과 의복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산에 올라간 젊은이 들은 산에서 ‘레포’ 노릇을 했다. ‘레포’란 reporter에서 유래한 말로 산에서 ‘연락병’을 지칭했다. 일제시대 민족해방투쟁을 하던 때부터 쓰였던 말이다. 보초를 ‘빗개’(Picket)라고 했던 것도 같은 쓰임새이다.

함덕국민학교에는 9연대· 2연대 등 군부대 1개 대대가 주둔하였고, 해수욕장과 서우봉은 바로 학살터였다. 주민들이 서우봉 기슭이나 백사장에서 학살되었다. 조천·함덕은 물론 선흘·대흘 등 조천면 산간지역, 제주시 삼양·화북과 구좌면 주민 등이 대대본부로 불려 가면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또 2연대 3대대는 1949년 1월17일, 400명 이상의 주민을 한꺼번에 몰살시킨 북촌대학살을 주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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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백홍의 비.
한백흥(韓伯興, 1897~1948)도 안타까운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1948년 11월 1일. 토벌대는 주민들을  평사동 모래사장에 집결시키고 청년 6명을 끌고나와 “이 사람들은 폭도들과 내통한 혐의다. 앞으로 폭도와 연락하거나 식량을 제공한 사람은 이렇게 된다”며 구덩이 여섯 개를 파놓고 처형하려 했다.

마을구장 한백흥과 송정옥이 나서 “이 청년들의 신원을 우리가 보증할 테니 죽이지 말라”며 만류했다. 한백흥은 “이 젊은 사람들은 마소를 키우는 테우리들이어서 산에 왔다갔다 하는 것이지 폭도들이 아니다”라며 “목숨만 살려주면 마을유지들이 잘 선도하겠다”고 호소했다. 토벌대는 오히려 “이 자들은 폭도의 일당이다”라며 양쪽에 구덩이 하나씩을 더 파게하고는  한백흥과 송정옥을  총살하고 청년들과 함께  파묻었다.

‘(전략)(1) 함덕리 - 경찰은 1948년 5월 13일 오후 4시 약 300명의 무리가 마을을 습격했다고 보고했다. 주택 3채와 지서 1곳이 불에 탔다. 경찰 1명이 피살되고, 1명은 부상당했으며, 5명이 실종됐다. 구경꾼 1명이 경찰 발포로 부상을 입었다. 한 경찰의 모친이 살해됐고, 버스운전사 1명이 버스에 던진 수류탄에 부상당했다. (경찰 보고) (후략) (경찰 보고)’-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5월 13일~1948년 5월 14일 (NO. 938, 1948. 5. 14. 보고)

김원근의 항일운동과 민청 활동

김원근(金元根, 1907~1948)은 함덕리 1054번지에서 김주봉(金柱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천공립보통학교 6학년 2학기 때 중퇴,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각종 공장직공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2월 김일준·부생종과 함께 혁명적 농민조합의 건설에 나서기로 하고, 그 하부조직으로서 ‘신좌혁명적농민조합위원회(新左革命赤農組合委員會)’를 조직하였다.

김일준은 신촌· 조천· 함덕· 신흥리를, 부생종은 선흘· 와흘· 대흘· 교래리를, 부영준은 북촌 ·동복· 김녕· 월정리를 담당하였다. 함덕리에서는 따로 함덕농민조합협의회를 조직하였다. 동년 4월 공산주의를 실현하고 일제를 타도하기 위하여 혁명적 제주도농민조합 창립준비를 서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1937년 4월 12일 제주도농민조합 창립준지위원회에 사건으로 김원근 등 13명은 최고 2년 6월, 최하 1년 6월까지의 징역형을 받아 복역하였다.

‘눈보라치는 엄한의 25일 조천면 민주청년대회는 오후 1시부터 조천국민학교에서 대의원 100명, 기타 방청자 300여명의 참석으로써 초만원의 성장리(盛場裡)에 김평원(金平遠)씨의 사회로써 그 막을 열었다. 다음 이어 회원 일동이 민청가와 해방의 노래를 씩씩하게 합창하여 민주청년의 의기를 울린 다음 김원근(金元根)씨의 개회사가 있었고 이어 임시 집행부 선거로 들어가 김원근씨, 김평원씨, 김대진(金大珍)씨, 김완배(金完培)씨, 김의봉(金義鳳)씨 5명의 의장단을 선출하였는데 때마침 모 의원의 긴급동의로써 박헌영(朴憲永), 허헌(許憲), 김일성(金日成), 조희영(趙喜永), 김택수(金澤銖)의 5인을 명예의장으로 추대할 것을 결의 만장일치로써 가결한 다음, 경과보고, 도대회보고, 일반정세보고가 있은 다음, 내빈축사로 들어가 인위(人委) 안세훈(安世勳)씨 외 각계인사의 격려축사가 있었고 대의원 대표로부터 이에 대한 답사가 있었다. 이어서 집행위원의 보결선거가 있은 다음 토의사항으로서 △조직문제 △계몽선전 △체련(体鍊)문제 등을 토의한 다음 기타에 있어서 조천경찰지서 주임으로부터의 열렬한 격려의 인사가 있어 끝으로 민청 만세삼창으로써 오후 6시에 이르러 드디어 폐회하였다.’-제주신보 1947년 1월 28일

제주도 조선민주청년동맹은 1947년 1월 12일 조일구락부에서 결성되었으며, 이어 1월 25일 조천면 민주청년대회가 눈이 내리는 가운데 조천국민학교에서 대의원 1백여명과 방청객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결성식에는 조천출신 좌파거물 안세훈(安世勳) 이외에도 조천지서 주임까지 임석, 축사를 하였다.

김원근의 개회사가 있었고 이어 집행부 선거로 들어가 김원근·김평원·김대진(金大珍)·김완배(金完培)·김의봉(金義鳳)씨 5명의 의장단을 선출하였으며, 박헌영(朴憲永)·허헌(許憲)·김일성(金日成)·조희영(趙喜永)· 김택수(金澤銖)의 5인을 명예의장으로 추대할 것을 결의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1월 30일 구좌면 민청이, 2월 9일 서귀면 민청과 한림면 민청이, 2월 13일 성산면 민청이 2월 16일 남원면 민청이 2월 22일 애월면 민청이 각각 결성되었다. 김원근은 1948년 6월 13일 서비행장에서 총살당하고 다른 한사람과 함께  함덕리 마을길에서 효수(梟首)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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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풀과 소마무 가지로 임시거처를 만든 주민들.

지식인 김양근 체포되다

‘[제주도에서 본사특파원 김영진 발] 이번 제주도 4월 3일 소란사건을 야기하고 조직적으로 지휘한 폭도측 수령 내지 간부들은 금년 1월부터 3월 말까지에 걸친 국군의 일대 섬멸작전으로 인하여 혹은 전사 혹은 생금(生擒)되어 이른바 그들의 제주도구국투쟁위원회 조직체계는 여지없이 붕괴되고 말았는데 그들 조직체계의 최고 지도자 4인 중 김용관(金龍寬․제주도인민위원회 도책임자) 이덕구(李德九․반도 총사령관) 김대진(金大鎭․반도 부사령관) 3인은 전사하였고 그 중의 하나인 김민성(金民星․본명 김양근․25세․남로당 제주도당부 조직부장 겸 작전참모장)은 방금 제주도 포로수용소에 1,000명의 포로와 함께 수감되어 있다. 그들의 4․3사건 전후에 걸친 조직 계획과 수용 후의 포로로서의 심경을 알고자 당지 2연대장 함병선(咸炳善) 대령의 알선으로 19일 아침 8시 제2연대 부연대 소장실에서 김양근(金良根)을 위시한 인테리, 전국군속, 괴뢰군 등 8명의 포로와 10분간 좌담회를 열 기회를 얻었다. 양민살상은 거북한 일 / 감정적 동기였고 이젠 꿈에서 깬 것 같다 / 4․3사건의 막후 배문(背聞) △기자=이번 제주도 4․3소란사건의 동기는 무엇인가.

△김양근(金良根)=이번의 반란동기는 작년 4월 3일경 민간의 충돌을 발단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봉기된 제주도 인민의 항쟁이다. 이러한 인민항쟁은 외래 ××××의 침략을 받고 있는 세계 약소민족국가 전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고 그 현상의 하나가 바로 이번의 제주도 인민항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기자=전투준비는 언제부터인가.

△김양근=조직적․계획적 항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투준비는 4․3사건 충돌 후부터였다.

△기자=4․3사건 전후에 걸쳐 중앙당부로부터의 지령을 받은 적은 없는가.

△이두수(李斗秀)=사건 발생 전에는 전혀 없었고 전투가 치열화 하여 감에 따라 여러번 중앙으로부터의 지시를 받았다.

△기자 : 어떠한 성질의 지시었던가.

△김서옥(金瑞玉)=그 때 그 때의 전투방법의 지시었다. 주로 인민살상을 회피하라는 것이었다. △기자=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무자비한 양민의 살상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김양근=거기 대하여는 무어라 변명할 여지가 없다. 전투가 확대되어감에 따라 우리가 뜻하지 않던 방향, 즉 인민살상이라는 처참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게 된 것은 상상 이외의 일이었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기자=지난번 유엔위원단이 제주도로 왔을 때 동 위원단 대표와 만나서 이론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이창희(李昌熙)=얘기도 해보았으나 아무 흥미가 없었다. 도대체 유엔은 본래의 사명과 나무나 동떨어진 방향으로 걸어나가는 것 같다.

△기자=당신은(김기호에게) 어떠한 동기로 국군장교의 몸으로서 폭도군에 가담케 되었는가.

△김기호(金基浩)=작년 10월 13일 제9연대에 입대하여 약 2주일 복무하다가 기대에 어긋나는 조국의 걸음걸이에 실망한 나머지 때마침 연대 내에 잠복하고 있던 동료의 사주로 남로당에 가입케 되어 그들의 세포운동에 참가하였다.

△기자=그 때 남로당의 이념에 공명하였는가.

△김기호=아니다. 내가 그들과 합작케 된 것은 이론 파악에서라기보다 감정적 불만으로 유인되었다고 볼 수 있고 지금 그런 과오를 뉘우치고 있다.

△기자=지금 전향할 의사가 있는가. 또 만약 석방되면 어떠한 소신을 따라 나가겠는가.

△김양근=전향할 의사도 없고 석방될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김완배(金完培)․이두옥(李斗玉)․김서옥(金瑞玉)=전향할 의사 없다.

△김두봉(金斗奉)․김창환(金昌煥)․김기호(金基浩)=잘못했다고 보기에 바른 길로 전향하고 싶다. 꿈에서 깨인 것같다.

출석한 포로 성명 ①김양근(金良根․25) 제주출생. 별명 김민성(金民星). 남로당 제주도당부 조직부장. 경성고상(京城高商) 출신. ②김완배(金完培․37) 도당부 농민부장. ③이두옥(李斗玉․39) 별명 양(梁)동무. 전 남로당 인천책임자. 작년 8월 중앙에서의 파견지도원. 입명관대학(立命館大學) 출신. ④김서옥(金瑞玉․46) 별명 좌(左)올구. 전 여수지구 책임자. 작년 9월 중앙에서의 파견지도원. ⑤이창희(李昌熙․39) 별명 남(南)동무. 전 광주남로당 간부. ⑥김두봉(金斗奉․37) 제주출생. 제주남로당 총무부장. ⑦김창흥(金昌興․26) 별명 맹호(猛虎). 인민군 제1중대장. 전 국군 제9연대 2등중사. ⑧김기호(金基浩․27) 인민군 교육대 교관. 전 국군 제9연대 육군소위. 별명 김소위.’ -경향신문 1949년 6월 25일

함덕리 출신 가운데, 해방 직후의 활동가 가운데는 일제하에서 옥고를 치렀거나 항일운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중 김양근(金良根, 1907~1949)을 들 수 있다. 그의 가명은  김민성(金民星)이다. 제주농업학교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서울상대 전신인 경성고상(京城高商)을 졸업하고, 함덕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독서회 사건’과 ‘운동가연구회’ 사건으로 1937년 투옥되었다.

해방이후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비밀의 베일에 가려있던  남로당 조직이 전면적으로 노출되면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1월 22일 하룻동안에 미CIC와 군정경찰은 조천면에서 모두 106명을 검거하였다. 1월 26일까지 전도에 걸쳐 115명을 추가로 붙잡혀 들어 왔다. 이때 검거된 사람들 가운데 남로당 안세훈 위원장을 비롯하여 김유환· 김은환· 김용관· 이좌구· 이덕구· 김양근· 김대근 등 거물급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이른바 ‘1·22 검거사건’이라 부른다. 

‘총 221명의 연행자 중 63명은 경찰의 심문을 받고 풀려났다. ’그 방면자들은 공산주의자인 남로당원이었다.’(Those released were members of the communist SOUTH KOREA LABOR PARTY)- 미 24군단 G-2 일일보고서, 1948.2.7.

4·3발발 직전에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가 급진적인 세력으로 교체되었다. 이들은 1948년 2월 신촌회의를 열었고,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 모였다. 무장투쟁 결행방침은 1948년 3월 15일께 남로당 제주도상위(島常委)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인민들의 대중적 투쟁을 가일층 활발하게 전개키 위하여 각 읍‧면과 행정단위로 강력한 자위대(自衛隊)도 조직하였다. 무장대 구성을 무장봉기 직후 시점에서 정리하면, △본격적으로 입산해 활동을 하는 정예의 ‘인민유격대’(人民遊擊隊) △각 행정단위에서 활동하는 ‘자위대’(10명) △정찰 임무를 하는 ‘특공대’ △각 지방 상황을 감시하는 ‘특경대’ △유격대 사상교육을 하는 ‘정치 소조원’등으로 요약된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직후에는 “무장대를 일층 강화 발전키 위해 ‘자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서 열렬한 혁명정신과 전투경험의 소유자 30명씩을 선발하여 ‘인민유격대(속칭 인민군)’를 조직하였다. 인민유격대는 연대와 소대로 구분 편성하였다. 연대는  △제1연대=조천‧제주‧구좌면-3‧1지대(이덕구) △제2연대=애월‧한림‧대정‧안덕‧중문면-2‧7지대(김봉천) △제3연대=서귀‧남원‧성산‧표선면-4‧3지대(?)로 구분하였다.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는 도 당부 간부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도 당부’책임=안요검, 조몽구, 김유환, 강기찬, 김용관 △‘도당 군사부’책임=김달삼(본명 이승진), 김대진, 이덕구 △총무부=이좌구, 김두봉 △조직부=이종우, 고칠종, 김민생, 김양근 △농민부=김완배 △경리부=현복유 △선전부=김은한, 김석환 △보급부=김귀한 △정보부=김대진 △부인부=고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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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당시 군인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서우봉.

무장대의 피습과 주민 집단희생

‘(1) 함덕/ 1947년 8월 13일 - 폭도 약 200명이 제주도 함덕지서를 공격해 여자 1명을 우연히 부상입히고, 경찰관 2명을 폭행했다. 증원된 경찰이 폭도들을 해산시켰다. (6사단) (2) 조천면/ 1947년 8월 13일 - 북촌과 함덕에서 경찰과 좌익인사들 간에 벌어진 총격전으로 여자 2명과 남자 1명이 빗나간 총탄에 맞아 부상당했다. 충돌은 경찰이 북촌마을 담벼락에서 좌익인사들의 부친 불법 포스터를 찢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폭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증원경찰이 요구되었다. (방첩대 정보요약) 2. 곡물수집 과정의 소요/ 1947년 8월 9일 - 제주에서 곡물을 수집하던 공무원 3명이 한밤 중에 약 50명의 폭도들에게 폭행당했다. 관리들은 몽둥이로 맞았다.’-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주간정보요약(G-2 Weekly Summary)1947년 8월 17일~1947년 8월 24일 (No. 102, 1947. 8. 28. 보고)

‘1947년 8월 18일~1947년 8월 19일 (No. 611, 1947. 8. 19. 보고) 함덕지서 피습/ 경찰 2명 구타 당하다/지난 주 군중 약 200명이 함덕지서를 공격했다. 경찰 2명이 구타 당하고, 우발적으로 여인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증원경찰이 질서를 회복했다. (제6사단 일일정보보고 제665호)’-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5.9.9~1949.6.17  

‘1948년 3월 26~1948년 3월 27일 (No. 794, 1948. 3. 27. 보고) 제주도 경찰, 고문치사로 체포/ 1. 경찰, 폭동 분쇄 (추가보고) 3월 2일 일단의 폭도들이 함덕지서를 공격했다. 경찰은 공포를 쏘아 폭도들을 격퇴했다. 사상자나 체포자에 관한 보고는 없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74호. 경찰보고) 2. 경찰, 불법행위로 체포/3월 14일 경찰 2명이 모슬포에서 죄수 1명을 구타하여 치사시킨 혐의로 동료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74호 및 경찰보고)’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5.9.9~1949.6.17

‘민간인 소요/ 확인되지 않은 한 경찰보고에 따르면 1948년 6월 2일 약 40명으로 조직된 3개 무리가 조천리와 함덕리, 김녕리를 공격했다. 사상자는 보고되지 않았다. (B-2)’-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6월 2일~1948년 6월 3일 (NO. 958, 1948. 6. 3. 보고)
 
‘남로당 상임위 조직 / 제주도 게릴라 활동/ 경유: 극동미국육군사령부 사령관/ 수신: 미국 국방부 육군성 참모본부 정보국장/참고: 보안단(방첩대 지부장)

(1) 남한공산당 상임위원회 현황 ▶총비서: 박헌영.......(중략).......  ③ 1948년 9월 18일 조천면 함덕리 주민 30여 명이 폭도들에 의해 강제동원 되어 봉홧불을 올렸다. (C-2).......(중략)....... ⑮ 1948년 10월 7일 제주도 대부분의 마을이 좌익 삐라와 유인물, 북한기로 홍수를 이뤘다. 제주도 동쪽 끝에 있는 최소 5개 마을에서 삐라와 깃발이 소규모 시위에 이용됐다. (A-1)  ⑯ 1948년 10월 7일 밤 좌익폭도 200여 명이 조천지서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공포를 쏘아 이들을 해산했다. 사상자나 체포자는 없었다. (C-3) (방첩대 <일일정보보고> 제225호, 제227호, 제229호, 제234호, 제238호, 제239호)’ - 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월간정보보고((CIC Monthly Report)1948년 9월 16일~1948년 10월 15일 (NO. 5, 1948. 10. 18.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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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덕국민학교 옛터 : 9연대. 2연대 등 토벌대의 1개 대대가 주둔했던 곳.
1948년 4월 3일 함덕지서에는 5명이 경찰관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2명이 그날 무장대에 의해 납치됐다. 그 뒤 경찰관이 증원됐다. 5·10선거 무렵에는 10명으로 늘어났다. 토벌작전이 본격적으로 착수된 1948년 5월 13일 무장대의 역습이 있었다. 바로 함덕지서 습격사건이다. 한낮에 경찰관 인명피해가 7명에 이른 사건이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무렵 경찰후원회장이 삶은 돼지고기를 들고 함덕지서로 찾아왔다. 지서에서는 곧바로 조촐한 술잔치가 벌어졌다. 무장대의 지서습격은 후원회장이 지서 밖으로 나간 직후에 일어났다. 무장대는 지서의 담벽마다 붙어 있었으며 경찰관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었다. 
 
오후 4시께 무장대의 집중사격으로 지서주임 강봉현(康鳳現, 성산면 수산 출신) 경사가 그 자리서 숨졌다. 무장대의 손에 생포된 경찰관 3명은 대흘 지경으로 끌려가 피살됐다. 또 경찰관 2명은 지서 건물 속에 숨어 있다가 지서 건물이 불타는 바람에 질식사했다. 이런 와중에 지서 앞에서 경찰관 가족도 살해당했다.

이날 함덕지서를 점령한 무장대는 주민들을 지서 앞으로 모이도록 했다. 그리고 지서주임 사체와 함께 지서를 불태웠다. 밤늦게까지 무장부대와 ‘왓샤부대’의 시위소리가 진동했다. 때로는 “만세, 만세”의 소리도 터져 나왔다. 토벌대의 출동은 없었다. 한편 경찰은 이 사건 이후함덕에 응원경찰대 30명을 배치했다. 이 육지경찰대는 옛 국민학교 터에 주둔, 인근지역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토벌전을 전개했다.
 
1948년 여름께부터 군․경의 강경작전이 벌어지자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은신생활에 들어갔다.  11월 1일 토벌대는 주민들을 모아놓고 무장대지원 혐의자를 총살하면서 이를 만류하는 마을 유지를 학살했다. 11월 4일 오후, 군인들이 함덕리와 신흥리를 덮쳤다. 군인들이 집집마다 들이닥쳤다. 남자들만 보이면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 11월 6일 함덕 주둔군은 조천리 청년들을 잡아다 함덕리 모래밭에서 총살했다. 모두 8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밤에 몰래 내려온 무장대는 “이제 곧 통일된다. 며칠 있으면 해방된다.”고 선전하며 여전히 기세를 올렸다. 11월 11일에 또 학살극이 벌어졌다. 군인들은 야간에 동쪽마을인 ‘평사동’을 덮쳤다. 잠자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주민들이그 자리에서 총살됐다. 군인들은 여자들과 어린이들에게도 개머리판을 휘둘러 마을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이쯤 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된 주민들은 산으로 도피하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이들은 거의가 산에 올랐다. 속칭 ‘궤못’에 숨었던 주민들은 11월 25일 토벌대에게 들켜 즉결처형됐다. 이밖에 산으로 도피한 대부분의 주민들이 중산간 여기저기를 헤매다 토벌대에게 잡혀 총살됐다.  12월 말께부터 다시 위기가 닥쳐왔다. 12월 23일 토벌대는 주민들을 총살했다.
 
1949년에 들어서면서도 희생은 계속됐다. 1월 1일 마을에 ‘대(竹)삐라’가 뿌려지자 토벌대는 혐의자 한명을 잡아 동조자를 말하라며 취조했다. 혐의자는 고문에 못이겨 생각나는대로 아무런 이름이나 댔다. 모두 47명이 끌려왔다. 토벌대는 계속되는 취조과정에서 혐의자가 허위로 이름을 댄 것을 알게됐다. 그러나 이미 12명이나 총살한 후였다. 이후에도 가족 중에 젊은이가 산으로 오르는 바람에 수용소에 갇혀 지내던 사람들이 잇따라 총살됐다. 주로 노인과 여자들이 희생됐다. 그중에는 한 살에서 다섯 살 사이의 유아들도 다수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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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덕해수욕장은 총살이 집행되었던 현장.

투표를 거부하고 산으로

‘북제주군 갑을 선거구는 동도의 소요관계로 갑구의 73투표구 중 31투표구만이 선거를 실시하였고 을구의 61 투표구 중에서는 32 투표구 만이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에 국회 선거위원회에서는 18일 제주도 선거위원 홍순재씨 보고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토의한 결과 선거법 제144조에 의거하여 갑구에서 최고득점자 양귀진, 을구에서 최고득접자인 양병직 양씨의 당선은 무효로 인정하고 19일 이를 군정장관에게 건의하였다. 북제주 갑구는 2만 7,560면 중 등록자 1만 1,912명이 투표하렸고 동  을구는 2만 917명의 등록자 중 9724명이 투표하였던 것이다.’-우리신문 1948년 5월 21일

1948년 5월 10일 투표 당일에는 비가 내렸다. 주민들은 투표소로 가지 않고 인민자위대가 있는 산악으로 올라갔다. 갈대를 엮어 임시로 지붕을 삼고 그 밑에 수십 명씩 모여 비를 피했다. 자위대 선전대원들이 내려와 ‘왜 우리는 단선단정을 반드시 분쇄하여야 하며 남북통일 자주독립을 전취하여야 하느냐 또는 인민과 조국을 위하여 싸우는 우리 인민자위대란 어떤 것이냐’를 해설하였다.

각 투표소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특히 함덕리를 포함한 조천면인 경우 한 표의 투표도 없었다. 선거 전날에 제출된 선거위원들의 총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 선거위원들은 투표 당일에 한사람도 출동하지 않았다. 만일 투표하면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미군정의 요인이 투표소의 설비상황을 순회시찰차로 왔다. 그는 면사무소에 ‘투표상상’이 그대로 쌓여 있는 것을 보자 그 이유를 물었다. “가져간댔자 받을 사람도 없고 또 가져갈 사람도 없다”는 것이 면사무원의 대답이다. “그래도 지정장소까지 갖다 두어야 한다”고 맗하자 부득이 그 자는 소사를 시켰으나 거부되고 할 수 없이 외지사람을 400원에 사서 들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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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행방불명인 표석.
동리사람들이 투표상을 가져온 자에게 “그것이 무엇인데 가지고 다니느냐”고 질타하였다. 제3차로서 청원 4명에게 지어 보냈는데 그자들은 짐을 지고 나간 채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경비대는 주민들에게 어서 나와서 투표하러 가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못나가겠다!” 주민의 대답이다.  투표당일 주민들은 낮에는 산으로 올라가 자위대와 같이 지내고 밤에는 부락으로 내려왔다. 이날 산봉우리마다 봉화가 올랐으며 주민들은 시위하였다. / 김관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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