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주의 어·부·가](14) 최고의 맛은 절제와 균형 속에 있는 것

 인류 역사 속의 성인(聖人)들은 한결같이 어린이는 곧 어른의 거울이라고 가르쳤다. 어린이가 갖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그 부모가 갖고 있는 문제점일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 어른 중심의 세계에서 어린이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있는 불안한 존재이고, 그 가족은 마음의 길을 잃어 방황하기 일쑤다. 지난 2013년 [제주의소리]에 ‘오승주의 책놀이책 Q&A’를 연재했던 오승주 씨가 다시 매주 한차례 ‘오승주의 어·부·가’ 코너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기로 했다. 최고(最古)의 고전 <논어>를 통해 어린이와 부모가 함께 부르는 배움의 노래가 될 것이다. 이번 연재코너가 어린이·청소년을 둔 가족들의 마음 길을 내는데 작은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편집자]  

계란으로 바위를 친 역사

공자가 말한 ‘공부’는 지금 세대에 적용하기에는 혁명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집에서 효도하고 윗사람을 잘 따르고 공경하며 절제로 신뢰를 쌓고 많은 사람과 우애를 맺으면서도 특히 가족 챙기는 일을 잊지 않는 것”(「학이」 편)이 글공부에 앞서서 해야 한다는 요구는 감당이 안 됩니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옛날 공부하는 사람들은 상식처럼 알고 있었던 “물청소 빗자루청소와 어른 접대하는 법,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논어』「자장」 편, 『대학』「서문」)조차도 지금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 같습니다. 물론 공자가 살던 당시에도 “자신을 한 공부가 아니라 남을 위한 공부”(「헌문」 편)가 근심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사라진 공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가르친 걸까요? 공부가 무너진 시대에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는 걸까요? 아이들은 어른보다 낫습니다. “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나요?” “수업시간에는 왜 장난치면 안 되나요?” “선생님은 왜 다섯 번 참지 않나요?” 같은 질문들은 당돌하지만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대화를 하고 싶어서 초등학생들을 만납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12년 동안 건너야 하는 제도교육의 터널 끝자락에서 고3 수험생을 상대했었거든요.

그들이 종이 한 장에 남긴 논술문을 읽으면서 비참했습니다. 100장의 논술문 중에서 거의 90장 정도의 논술문이 비슷한 패턴이었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도 아니었는데 글에 ‘영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그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저는 그 당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교육에 다시 발을 집어넣게 된다면 그때는 터널의 반대편으로 가자! 12년의 기간이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시작되는 지점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자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른 논에 물을 댄다는 측면에서는 달라진 게 없습니다. 무엇을 가르치기보다는 함께 아파하고 견뎌야 하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공부를 위한 중요한 습관들을 알려주더라도 그것이 몸에 배지는 않을 것이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군자가 일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안다.
- 『논어』, 「미자」 편

공자는 자기가 배운 것을 온전히 전달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물론 그것이 귀족의 입장을 반영했고 현실개혁보다는 현상유지에 가깝기는 하지만 공자가 보고 배운 것을 충실히 전했다는 점만큼은 탓할 수 없습니다. 『논어』의 「미자」 편에는 세상을 버리고 은둔한 인물들이 많이 나와서 공자를 비판하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그리고 공자의 비판자들에게 공자는 계란으로 바위를 친 어리석은 사람이었지만, 우리의 자유와 성장을 가로막은 바위의 역사만큼이나 거기에 도전한 계란의 역사도 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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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오승주 ⓒ 제주의소리

의도한 실패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아이들이 ‘공간’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나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현재 무절제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절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간 한시적으로 절제의 방을 운영했습니다.

물건의 절제, 행동의 절제, 시간의 절제 등을 부각시켰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습니다. 절제가 그냥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아이들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절제를 배울 것입니다. 개중에는 끝내 절제를 배우지 못하는 아이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사막의 신기루처럼, 혹은 신화처럼 절제의 공간에서 보고 느꼈던 절제의 시도와 기억, 그리고 실패의 순간들이 떠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초등 3학년 한 아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따져 물었습니다. 절제의 방 같은 걸 왜 만들었냐고. 저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절제의 방에서는 떠들 수도 장난칠 수도 없고 얌전히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화가 났나봅니다. 「미자」 편의 은둔자들이 공자를 조롱했듯 절제도 절제의 방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러 절제의 방에서 떠들고 책상 위에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이들이 했던 ‘복수’의 행위들로 인해서 절제의 방은 무너졌습니다. 짓밟혔다고 해야 적절한 표현이 되겠군요. 아이들의 심기를 건드린 죄값을 치러야 하니까요. ‘절제의 방’은 간판만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있어서 조만간 떼어버릴 생각입니다. 마음의 각오도 돼 있었고, 명백히 예상된 일이기도 했지만 실패는 언제나 쓰라립니다.

그래도 얻은 것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우리 공부방의 모든 아이들이 ‘절제’에 대해서 알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절제가 주는 달콤한 꿀맛을 보지는 못했지만요. 최고의 맛은 절제와 균형 속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간’을 교육의 소재로 이용했다는 점도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앞으로 연필이나 지우개, 책 같은 사물의 영역으로 확대를 해볼 생각입니다.

[140자 Q & A 상담코너]

14. 공부를 열심히 하지만 시험을 못 보는 아이

Q = 중학교 2학년 딸을 둔 부모입니다.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시험만 보면 점수가 잘 안 나와요. 공부의 요령이 없는 건가요? 어떻게 공부를 시켜야 할까요?

A =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공부 머리가 있어서 욕구만 해소시켜주면 알아서 찾아갑니다. 하지만 얌전한 아이들, 욕구가 억눌린 아이들은 공부 머리가 닫힌 상태로 있습니다. 오랫동안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문제를 발견했다면 문학, 예술 등을 집중적으로 채워줘야 합니다. 

 * dajak97@hanmail.net 앞으로 육아고민을 보내주세요. 자녀와 본인의 나이와 성별을 써주시면 가명으로 처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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