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이 땅은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아이들은 개구리를 잡아 물이 펄펄 끓는 냄비 속에 떨어뜨린다. 개구리는 예상치 못한 환경에 놀라 냄비 밖으로 뛰쳐나온다. 약간 데었을 뿐, 무사히 살아난다. 그러자 아이들은 이번엔 찬물이 가득한 냄비에 개구리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난로 위에 놓고 가열한다. “여기는 내게 익숙한 곳이구나.” 개구리는 찬물이 든 냄비 속을 헤엄친다. 물이 약간 데워지자 그 개구리는 생각한다. “훨씬 좋아지는구나.” 물이 따뜻해지자 그 개구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좋아지는구나.” 물이 조금씩 뜨거워지자 그 개구리는 꾸벅꾸벅 졸다가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마침내 죽는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제주의 밭. 사진은 저작권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함. ⓒ 제주의소리 DB

착각의 비극

누구나 알고 있는 ‘냄비 속 개구리 이야기’입니다. 한 생태학자는 그걸 빗대어 ‘환경문제의 인식의 장벽’이라고 했습니다. 착각의 비극입니다. 이 비유는 주로 ‘환경오염 문제’에 인용되지만, 우리의 ‘땅 문제’에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입니다. 그래서 실제에 대한 인식작용에 그대로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물음에는 칼날 같은 섬뜩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끝없이 이어질 우리들의 후손을 위해 어떠한 세계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떠한 인간이 되려고 하는가?” 제가 오늘 이처럼 ‘진부한 비유’를 들어 말머리로 잡는 것은 ‘개구리 실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그 메시지가 의미심장하기 때문입니다.

‘인식의 장벽’이라고 했지만, 그 인식은 주관에 의해 왜곡된 이미지들의 집적일 뿐입니다. 거기엔 우리의 감정적 편향, 자연에 대한 왜곡된 태도의 흔적이 묻어 있습니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여기저기 땅을 파헤치고, 도심지에 한라산을 가로막는 초고층빌딩이 들어서고, 그걸 발전이라고 좋아하고…. 자신이 딛고선 토대가 흔들리는 줄도 모르고 땅을 마구 팔아넘기고…. 개구리가 뜨거워지는 냄비 속에서 좋아하듯,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왜곡된 이미지가 구축해 놓은 환상의 세계에서 좋아라고 헤엄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땅(=자연과 환경)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의 장벽입니다.

주인 바뀌는 땅

왜곡된 이미지는 단편적인 사고(思考)를 초래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단편적인 사고에 따라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고장의 자연을 그렇게 만들어갑니다. 제주의 땅을 ‘돈 몇 푼에 팔아넘기는’ 단편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한, 지난 ‘제주포럼’에서 소설가 조정래씨가 강조했듯, “가운데가 잘린 공책 위 한라산 그림”처럼(제주의소리 5월22일 보도) 우리고장의 자연을 조각내는 일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듭니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환상의 세계에 화답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편승해서 살아갑니다. ‘냄비 속 개구리의 착각’처럼…. 어쩌면 우리는 이미 무지와 무관심 속에 우리의 왜곡된 이미지처럼 우리고장의 자연을 조각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 땅은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성한 임무’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잠시 망설여집니다. 제주 땅의 주인이 바뀌고, ‘땅을 지키자’는 노력 자체가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과연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언감생심 말발이 설 일인지, 참으로 곤혹스럽습니다. 곤혹스러운 것은 무지 탓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태도여하에 따라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쓰다가 조각낸 파편을 줍는 일’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우리 정신의 상품화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이 땅은 우리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의 근원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물건’이거나 단순한 ‘터’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순전히 공리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물질적 효용가치로만 재단하는 것 또한 잘못되기는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그것은 그만큼 우리의 정서가 황폐돼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을 상품으로만 취급될 경우, 그건 급기야 우리의 정신까지 그렇게 만듭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단편화시킵니다. 지역의 자연과 문화를 더 많은 성장의 도구로 여기는 파괴적 개발을 경계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저 빛나는 한라산도, 그리고 한라산이 거느리고 있는 이 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쪽에 가깝다고 하여, 저는 신비주의자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이 땅을 잘 지키고, 그리하여 이 자연을 잘 보존하면, 그것도 똑같이 우리를 돌본다는 것을 상상할 뿐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오름 자락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작은 들꽃도, 우리로 하여금, 존재하고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입니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제주도. ⓒ 제주의소리DB

땅의 위기

더러는 이야기가 뜬구름 잡는 것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뜬구름 같다고 하더라도 그 줄기는 하나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땅의 근거성’을 재강조하고, 땅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과 함께, 자연의 유기적 체계 내에서 우리가 딛고선 자리를 재확인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땅에 근거한 정신적 물리적 위치를 주장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주사람’과, 저 노루와, 재선충병에 시달리는 저 소나무와, 작은 들꽃까지 포함하여 그 밖의 모든 생물체를 다시금 가슴으로 끌어당기는 땅의 중력적 매력은 여전합니다. 이 중력의 상실은 곧 우리들 존재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땅을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땅의 실용적 가치를 외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딛고선 땅의 내재적 가치를 무시할 경우, 경제적 궁핍보다 더한 정신적 공황을 초래한다는 사실도 역시 외면하지 못합니다. 땅의 내재적 가치에는 우리의 환경으로서의 미학적 가치와 함께, 훗날 우리 후손들에게 유용하게 쓰이리라는 기대감까지 포함돼 있습니다. 그럴진대 어찌 땅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단순히 ‘땅의 위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들 자신의 막다른 삶의 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두렵습니다.

왜곡된 그림자

우리고장의 땅값이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땅값의 비정상화는 왜곡된 개발정책이 빚은 부작용일 뿐, 실제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건 우리들의 ‘왜곡된 그림자’입니다. 거품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서두의 ‘냄비 속 개구리의 착각’으로 돌아갑니다. 땅을 마구 파헤치는 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하고, 땅값 상승을 자신의 재산증식으로 착각하고…. 많은 착각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직면한 장벽입니다. 그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착각하고 있다는 것은 현실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그런 상황에선 합리적 행동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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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제주의 땅’이 우리에게 주는 심오한 이치를 모른 채, 그저 입으로만 생태학적 지적사고를 운위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어쩌면 저의 주제넘은 ‘또 다른 이야기’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땅이 상호 협력적으로 우리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할 때, 우리의 머리와 손으로 저질러지는 파괴로부터 우리의 땅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자연을 지배하거나 또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는 그 어떤 기도도 자연계의 틀 안에서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인간들의 오만일 뿐입니다. 어쩌면 그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우리의 땅을 지키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 강정홍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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