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48) ‘5·5수뇌회의’를 이끈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제주, 미군정 실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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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진압작전의 주역인 군정장관 딘 소장(왼쪽)과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

‘이유는 없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적막이 오듯이/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 같기도 한 것이니// 이유는 없다/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김수영의 시 ‘가다오 나가다오’

미 군정장관은 점령한 나라나 지역에서 군정을 시행하는 군정청의 장관이다. 한국의 군정법령은 1945년 9월 8일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군정장관이 내렸던 법령이다. 역대 군정장관으로 초대 아놀드(Archibold V. Arnold, 재임기간 1945.9.12∼1946.1.4) 소장, 제2대 러취 (Archer L. Lerch, 재임기간 1946.1.4∼1947.9.11) 소장, 제3대 딘(William F. Dean, 재임기간 1947.11.25∼1948.8.15) 소장이다. 

하지(John R. Hodge) 중장 지휘하의 미 육군24군단은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 9일 서울에 입성해서 38도선 이남지역에 대한 군정을 선포했고, 12일 제7보병사단장 아놀드 소장이 초대 군정장관에 취임했다. 아놀드는 2대 군정장관 러취 소장에게 군정장관직을 물려준 뒤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대표단 초대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다. 그는 취임 후 “남한에는 미군정 이외의 다른 정부가 있을 수 없다”는 강경성명을 발표하여 좌익이 우세한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화하였다. 중국 충칭(重慶)에서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부 자격 역시 부인했다.  

러취 소장이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45년 가을, 그가 미육군 헌병사령관으로 방한했을 때였다. 그는 당시 아놀드의 후임을 찾고 있던 하지로부터 군정장관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승낙하여, 동년 12월 다시 서울에 왔다. 그는 기본적으로 남한에서는 우익이 권좌에 올라야 하고, 국내정치에 관한 한 우익에게 모든 책임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 

미군정은 1947년 6월 과도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한국인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우는 간접통치를 실시하였지만 실권은 여전히 미군정 고위관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러취 소장은 1947년 9월 대동맥관상폐쇄증으로 쓰러져서, 그 해 9월 11일 서울에서 향년 53세로 사망하였다. 러취 사망 후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한국문제를 국제연합(UN)으로 이관했고, 3대 군정장관으로 딘 소장이 부임하였다. 이후 1948년 8월까지 딘 소장이 군정장관 직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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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무효를 선언한 미군정청 관보.

미 군정청 법령94호로 ‘제주도제’ 실시

1945년 11월 10일  미군20연대 59군정중대가 입도(入島)하고, 스타우드(Thurman A.Stout) 소령이 본격적인 군정업무를 실시했다.  1946년 2월 박경훈(朴景勳)이 제주도사(島司)로 부임하면서 스타우트와 박경훈은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한 사무실에 근무하였다. 제주도는 미군들에게는 사실상 휴가캠프와 같은 곳이었다. 스타우트를 위한 화려한 연회와 여자의 알선 등이 있었다. 스타우트 명령에 따라 수감자들은 유죄판결 여부에 관계없이 노동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일제의 관리와 경찰을 그대로 등용. 친일파가 오히려 큰소리치는 세상이 되었다. 부패모리배가 창궐했다. 스타우트가 모리문제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1946년 8월 1일 미 군정청 법령94호로 ‘제주도제’를 실시했다. 제주도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하나의 섬인 도(島)에서 남한 아홉 번째의 도(道)로 승격되었다. 제9연대가 1946년 11월 16일 제주도 모슬포에서 창설됐다. 제주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모병활동을 통하여 400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경찰 조직도 전남 경찰청 산하의 경찰서에서 제주감찰청으로 승격됐다. 

미군정 본부는 일제시대의 제주도청(濟州島廳)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미군정은 1947년 ‘3·1기념대회’를 기회로 도민들을 군정법령위반이란 죄명으로 소위 ‘The Third Degree, 1. 체포 2.투옥 3. 심문’을 적용하여 군정재판을 벌여나갔다. 미군정청은 1947년 3월 8일 카스티어(James A. Casteel) 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다. 미군보고서는 파업원인을 ‘경찰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고 분석했다. 또한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 ”라고 기술했다. 카스티어가 제주를 떠난 다음날인 3월 14일 조병옥 경무부장은 응원경찰 421명을 급파됐다(당시 제주경찰은 330명). 

조병옥은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틀 사이 200명이 연행됐다.  본토에서
파견된 수사요원들에 의해 연행자에 대한 고문이 시작됐다. 검속자가 500명으로 늘어났다. 수감자들은 유치장 안이 비좁아 앉지도 못한 채 서서 수감생활을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이에 대해 미군 감찰보고서는 “10×12피트(약 3.3평)의 한 방에 35명이 수감됐다”고 기록했다.중문 발포사건(3월 17일), 종달리 6 ·6사건(6월 6일), 북촌 발포사건(8월 13일)과 1948년 2·7사건 등 민중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잦아지면서 검속자들은 계속 늘어났다. 3·1 발포사건 이후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검속자가 무려 2,500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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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미군이 진주하여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1947년 3월 시점에서 제주도정과 치안은 미국인인 제주도 군정관(공식직함은 ‘수석민정관’)과 경찰고문관, 한국인인 제주도지사와 제주경찰감찰청장 등 4자의 영향 아래 있었다. 모슬포에 경비대 제9연대장이 있었지만, 당시는 부대 창설 초창기여서 제주도 지역문제에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1947년 4월 2일 스타우트에 이어 베로스(Russel D. Barros) 중령이 부임했다. 베로스는 1946년 11월 모슬포에 창설되는 제9연대 초대 연대장인 장창국 부위가 인사차 경비대사령관 방에 들렀을 때, 제주도에는 좌익세력이 강하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던 인물이다. 1947년 12월 3일 베로스는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과 교체될 때까지 8개월 동안 제주의 군정업무를 총괄했다. 

한편 미군정 당국은 초대지사 박경훈(朴景勳)의 사표를 수리하고, 1947년 4월 10일 그 후임에 극우파인 한독당 농림부장 유해진(柳海辰)을 전격 임명했다. 그는  '극우주의자(an extreme rightist)'이며 좌익분자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6척 장신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그를 암살하자는 삐라까지 나돌았다. 권총을 늘 옆에 끼고 잤다. 

유해진이 재임하던 시기, 제주도가 삐라부착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심했다. 마을마다 삐라부착과 무허가 집회가 성행했다. 삐라내용을 보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강탈하려는 미군을 몰아내자‘ 등 미군을 공격하라는 선동적인 삐라가 제주도 곳곳에 뿌려졌다. 제주CIC는 “극우파 제주도지사는 좌익분자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그의 암살을 요구하는 삐라가 여러 장 뿌려졌다”고 보고하였다. 여기서 극우파는 유해진 도지사를 말한다. 

베로스와 유해진은 민심 동향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좌익 척결에만 비중을 두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제주도는 섬으로서의 소국(小國)이나 다름없었다. 경찰 최고위직은 모두 본토에서 모집된 경찰관들로 채워졌다. 1947년 10월 21일 미CIC 제주사무소의 개입으로 대동청년단 제주도단부 결성이 있었으며, 11월 2일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 결성대회도 있었다. 미CIC 제주사무소는 서청 제주도단장이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말해왔다고 상부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기보한 바 베로스 중좌의 귀국에 따라 후임 본도 군정장관에는 맨스필드 중좌가 거(去) 3일 정식 취임하였는데 동 장관은 익(翌) 4일 방문한 기자와 첫 회견을 하고 대략 여좌한 행정포부를 피력하였다. “금반 본도 군정장관으로 취임한데 대해서는 도민 여러분의 절대한 협력과 후원이 있음으로써만 본관의 책임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관은 앞으로 미국의 조선 완전 자주독립 달성을 위한 일관한 시책하 베로스 중좌의 업적을 계승하여 본관의 책임을 완수해 나갈 생각이다. 일언(一言)하고 싶은 것은 본도는 자원이 풍부하므로 시책을 산업 개발에 치중함으로써 도민과 손을 잡고 민생 문제 해결에 기여하려고 생각한다.” (맨스필드 중좌 약력) 13년간 군대 근무. 종전 후 진주군과 함께 조선에 상륙. 조선경비대 고문(부산). 강릉시장 고문 등을 역임’-제주신보 1947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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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4월 22일 김익렬 연대장이 경비행기를 타고 뿌린 전단 내용.

맨스필드의 귀순공작과 김익렬· 김달삼 회담

“제주도의 여론은 만일 경찰이 빠른 시일 내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모든 조직들이 제주경찰감찰청을 공격하리라 한다.” -미군 CIC 보고서, 1947년 12월 13일  

‘1948년 4월 17일/ 국방경비대의 제주도 작전 준비/ 발신: 통위부 장관 고문관 테릴 프라이스(TERRILL E. PRICE) 대령/ 수신: 제11미디엄 포트(11th Medium Port) 사령관/전달: 국방경비대 제3여단 고문관 클라렌스 데리우스(CLARENCE D DEREUS) 대위/1948년 4월 16일 18시에 하달된 군정장관의 구두 명령에 따라 한국 해안경비대와국방경비대의 합동작전이 1948년 4월 19일에 경상남도 진해(Chinhae)에서 시행될 것이다.

해안경비대는 1948년 4월 20일 아침 밀물 때까지 제주도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국방경비대 1개 대대를 진해로부터 제주항까지 수송할 것이다. (중략) 국방경비대는 최근 그들에게 지급된 무기류와 더불어 카빈과 소총용 탄약 90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관총 1정 당 500발의 탄약이 지급될 것이다. 추가적인 탄약은 국방경비대가 제주도에 가담하거나 제주도에 도착한 후에 추가 수송에 의해서 지급될 것이다...

(중략)... 특별히 제주도 토산의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야채가 부족하기 때문에 추가적인 식량은 국방경비대를 제주도에 가담시키기 위해서 다른 운송 편으로 보내질 것이다. 부대의 취사 장비가 운반될 것이고 부대들은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각 중대의 숙영지, 취사장, 지휘소를 만들기 위해서 준비할 것이다. 회계 장교는 특별히 제주도 지방의 장작을 구입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대대를 동행할 것이다. 그러나 국방경비대 부대들은 장작을 제외하고 제주도에서 어떤 것(필수품)도 마련하지 않을 것이다. 국방경비대는 15일 동안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준비한 채 진해를 출발할 것이다. 제주도에서 짐을 내릴 수 있는 설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떠한 운송도 이번 선적과 함께 취해지지 않을 것이다.

군의관 파견대가 이용할 수 있는 15일분의 필요한 의약품을 소지하고 대대를 동행할 것이다. 추가적인 군의관 요원과 의약품은 다른 운송편으로 제주도에 보내질 것이다. 경상남도 부산에 있는 제3여단의 미국인 고문관인 클래런스 독 드루스(CLAREN -CE DOG DEREUS) 대위는 고문관 자격으로 이번 기동에 동참할 것이다. 제주도 민정관인 존 슈가 맨스필드(JOHN SUGAR MANSFIELD) 중령은 그가 미 군정장관에게서 명령을 받았듯이 제주도에 도착한 이 국방경비대 대대에게 그러한 명령을 내릴 것이다. 미 군정장관은 맨스필드 중령이 제주도에 도착한 대대의 모든 작전 활동에 대해 그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릴 것을 결정했다.’-주한미육군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FIK) 일반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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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이날 제주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과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다(1948. 5. 5.).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딘 군정장관은 4월 17일 경비대 제9연대가 진압작전에 나설 것을 명령하면서 맨스필드 중령에게 “대규모 공격에 앞서 항복을 유도하라 ”고 지시했다.  제주도 군정관이 베로스에 이어 맨스필드로 교체되면서, 미군정 수뇌부는 경찰력만으로 한계를 느끼자 맨스필드 중령을 통해 경비대 9연대에게 진압작전에 참여토록 명령했다.  딘 군정장관은 맨스필드 중령에게 “제주도의 폭도들을 진압하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데 군부대를 이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딘 군정장관은 이어 4월 18일 맨스필드 중령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귀관은 제주도의 상황에 정통하다. 2. 4월 18일 제주도에 도착한 두 대의 L-5 연락기는 귀관의 지휘 하에 있다. 3. 한국 국방경비대 추가병력이 4월 20일 제주도에 도착할 것이다. 도착 즉시 이 대대도 현재의 다른 한국 경비대와 같이 귀관의 작전통제 하에 놓일 것이다. 4. 귀관은 귀관의 배치에 따라 제주도의 폭도들을 진압하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데 군 부대를 이용하라. 5. 대규모의 공격에 임하기 전에 귀관은 소요집단의 지도자와 접촉해서 그들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는데 모든 노력을 다 하라. 6. 경비대의 작전에 의해 붙잡힌 포로들은 경찰에게 인계하지 말라. 그들을 경비대에 의하여 준비되고 보호된 막사에 두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본토로 후송하도록 조치하라. 7. 일일 상황보고를 무선통신으로 본부에 보고하라.’

맨스필드는 귀순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유해진 지사, 김정호 제주비상경비사령관,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그리고 제주도 민족청년단장에게 책임자로 나서 줄 것을 요청했으나,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익렬은 맨스필드 중령이 다섯 번째로 요청하게 된 사람이다. 그리고  경비대가 처음으로 토벌전에 나선 것은 4월 22일 밤부터이다. 

미 6사단 일일보고서는 “48년 4월 22일~23일 밤중에 경찰과 경비대는 합동작전으로 최근의 소요에 참여한 혐의가 있는 60명의 좌익을 체포했다. 경찰은 유격대원들이 은신했을 것으로 혐의가 가는 집들을 계속해서 습격했고, 경비대는 그 마을의 일정한 지역을 방어하는 것으로 지원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맨스필드는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에게 무장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김익렬 연대장은 4월 28일 정오 모슬포 연대본부에서 장병들을 사열한 다음 무장대와 협상을 위해 지프에 올랐다. 회담장에는 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정보주임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측 총책 김달삼과 참모 1명 등 모두 4명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자리를 같이 했다. 4자의 협상은 주로 김익렬과 김달삼의 대담형식으로 진행됐다.

여기서 3가지 조건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그것은 ①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약속행위의 배신행위로 본다. ②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장장 네 시간에 걸친 진땀나는 담판이었다. 밤늦게 제주읍에 건너와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에게 회담결과를 보고하였다. 원만한 성격의 맨스필드는 김익렬의 보고결과에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수용,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김익렬· 김달삼의 회담 다음날인 4월 29일  딘 소장이 극비리에 제주에 다녀간 다음, 미군정의 태도도 변화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차에 「 5․1 오라리 사건」과 「 5․3 기습사건」이 발생, 평화협상의 진로에 찬물을 끼얹었다. 오라리사건은 5월 1일 대낮에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청년들이 마을에서 좌익으로 지목된 민가들을 방화한 사건이고,  5․3 기습사건은 5월 3일 미군과 경비대의 인솔아래 귀순의 성격을 띠고 하산하던 주민들을 정체불명의 자들이 공격한 사건이었다. 

사건 직후 경찰측에서는 ‘경찰과 경비대를 이간시키기 위한 폭도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경비대측에서는 ‘평화협상 진행을 훼방시키기 위한 경찰과 우익단체의 소행’이라고 상반된 주장을 하였다.  이에 대해 미군정은 경찰쪽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오라리사건 직후 직접  현장조사를 마친  김익렬 연대장과 이윤락 정보주임은 방화사건이 우익단체의 소행이란 근거를 확보, 미 CIC책임자에게 보고했으나, CIC장교는 이를 일축하는 한편 앞으로 해안부락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 토벌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뒤에 전개된 상황, 즉 딘장군의 극비 제주방문→오라리사건의 조작→CIC 장교의 초토작전 지시→최고수뇌회의 제주 개최→김 연대장의 해임→토벌작전 전개 등에서 반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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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 정찰기에 의해 촬영된 제주시가지 모습. 이 사진을 찍은 정찰기 그림자(점선 안)가 보인다 (1948. 5)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젊은이는 거의 없었으며 눈에 띄지 않았다” 

‘1948년 4월 29일/제주도에서의 활동 보고/작전계획/발신 : 작전참모부 슈(M. W. Schewe) 중령/ 수신 : 작전참모 타이센(A. C. Tychsen) 대령/

1. 24군단 G-3 타이센(Tychsen)대령의 지시에 따라 슈(Schewe) 중령은 48년 4월 27일 항공편으로 제주도로 향하였다. 그의 임무는 제주도 주둔 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John Mansfield) 중령을 만나서 섬의 상황을 평가하고 활동을 관찰하며 제주도의 민간인에 대한 통제와 게릴라 활동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맨스필드 중령이 제안한 계획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결과보고가 사령부에 제출될 것이다. 

2. 27일 12시에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슈 중령은 맨스필드 중령을 그의 본부로 찾아가서 함께 공항으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20연대장 브라운 대령, 제주도 주둔 20연대 병력을 책임지고 있는 게이스트(Geist) 소령, 그리고 한국 5연대 고문관 드루스(De Reus) 대위 등과 상황을 논의하였다. 브라운 대령은 맨스필드 중령에게 제주도 상황의 처리에 관하여 주한미군사령관의 지시사항을 고지하였다.  지시사항: a. 경비대는 즉시 임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b. 모든 종류의 시민 무질서는 종식되어야 한다. c. 게릴라 활동을 신속히 약화시키기 위하여 경비대와 경찰사이에 확실한 결속이 이루어져야 한다. d. 미군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브라운 대령은 맨스필드에게 현재 가용한 한국군으로 상황을 장악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질문하였고 맨스필드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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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0선거가 제주에서 보이코트된 후, 제주군정장관의 요청으로 제주 해안에 나타난 미구축함 「크레이그」호 해안 봉쇄작전이 전개되었다(1948 5. 12.).

3. 첨부된 지도는 현지 진행중이거나 계획된 활동을 나타낸다. 

a. 제주도의 한국 5연대 전 병력은 4월 27일 12시 30분에 시작하여 마을을 휩쓸었다. 항공관측자들(6사단 소속 조종사 포인덱스터(Poindexter) 중위, 미군정 소속 번즈(Burns) 대위)은 통위부 부대가 매우 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즉, 바다로 향한 모든 출구와 모든 도로는 봉쇄되었고 경비부대들은 질서정연하게 거리를 행진하여 가옥과 건물로 들어갔다. 이 보고는 자동차로 마을에 들어간 한국 5연대 고문관 드루스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슈 중령은 드루스와 동행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맨스필드와 드루스가 작전하는 동안에 많은 숫자의 미군이 함께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권고 때문이었다. 작전은 마을로 통하는 모든 출구를 봉쇄하고 가옥을 수색하여 숨겨진 무기, 삽, 곡괭이, 도끼, 전선절단기 등을 찾아내고 또 용의자, 단체 조직가,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경찰은 군대의 감독 하에 작전에 참가해서 민간인 인사들을 수색하는 것이었다. 모든 작전은 5연대장 김 대령의 진두지휘 하에서 이루어졌다. 마을을 휩쓴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마을에 젊은이는 거의 없었으며 밖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경찰이 마을 여인들에게 마을 젊은이들이 모두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 그들은 세 종류의 대답을  하였다. (1) 나의 남편은 죽었다. (2) 나의 남편은 본토에 있다. (3) 나의 남편은 일본으로 갔다.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이러한 진술은 대개 거짓이었는데 더 자세한 질문을 하면 “모른다”고 대답을 바꿔버렸다. 메모 : 위의 진술은 4월 27일 제주에서 김 대령(통역을 통하여), 드루스 대위, 메리트(Merritt) 씨(군정 CID) 등이 슈 중령에게 한 내용이다.  

b. 4월 28일에 행해질 2번 작전계획은 경비대의 김 대령, 문 소령, 드루스 대위, 한국경찰 고문관 번즈 대위, 그리고 메리트씨 등에 의하여 철저히 논의되었다. 슈 중령은 시종일관 그 논의에 참석하였지만 오직 참관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한미군사령관은 제주도에서 작전은 성공하여야 하고 더 나아가서 제주도에서 한국안보를 책임진 군대의 성패에 대하여 남한인민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김 대령에게 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김 대령은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되었다. 김 대령은 정확히 이해하였으며 경비대는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c. 2번 작전, 4월 28일/ 제주의 5연대 병력은 오전 10시에 트럭과 행군으로 야영지로 이동해서 마을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슈 중령은 L-5기 안에서 공중으로부터 작전의 시작을 참관하였다. 행군은 질서정연하였고 잘 훈련되어 있었으며 부대원들은 신속히 트럭에서 내려서 진영을 갖춘 다음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민간인들은 도로에서 정지당했으며, 도로상과 마을에 있었던 민간인들은 모두 행군을 하여 한군데 중앙집결지로 모여졌다. 이러한 작전은 6, 7, 8, 9번의 네 개 마을에서 실시되었고 질서정연히 이루어졌다. 경비대 병력이 가옥과 건물들로 진입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공중에서 더 이상의 관찰은 불가능했다. 슈 중령은 오전 11시 50분에 59군정중대 본부로 되돌아 왔으나 작전에 관한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오후 12시 40분에 중대본부를 출발하여 비행장으로 떠나서 사령부로 복귀하였다.

4. 장래의 작전  a. 3번 작전-맨스필드 중령은 4월 28일 12시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4월 29일의 작전은 5연대와 9연대가 제주와 모슬포에서 시작하여 노루악을 향하여 휩쓸 것인데 그 이유는 무장대들이 그 쪽 오름에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b. 4번 작전-4월 30일. 5연대는 4번지역의 마을들을 휩쓴다.   c. 5번 작전-5연대와 9연대는 교래리쪽의 오름들을 휩쓴다. (임시 작전일, 5월 1일)   d. 장래의 작전은 진행중인 작전에서 얻어진 결과에 달려있다. 5. 슈 중령의 제주도 상황에 대한 평가/ a. 59미군 군정중대장이 현재 제주도에 있는 병력을 확실히 통솔한다면 제주도에 있는 현재의 병력만으로도 상황을 진정시키는데 충분하다.   b. 공산주의자들과 게릴라 세력이 오름들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활발한 작전이 요구된다. c. 경찰과 대동청년단원들이 너무나 정력적으로 행동해왔기 때문에 양민들은 반경찰적이고 따라서 그들은 경찰에게 협력하지 않을 것이며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공포심 때문이다.  d. 현재 게릴라의 숫자는 1,000명에서 2,000명 사이로 추정되며 소단위로 넓게 산재해 있다.  e. 제주도에서 작전을 하고 있는 부대들 간에 원활한 통신을 위하여 양질의 라디오 통신장비가 필요하다.  f. 1948년 4월 28일 이전의 작전은 상황이 공격적인 작전을 정당화시킴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24군단 작전참모부소속 중령 슈(M. W. Schewe)’-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공한(公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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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 조사차 제주에 온 통위부 고문관 로버츠(왼쪽) 준장이 연대 본부를 나서며 받들어 총에 답례를 하고 있다(1948.6.18.) <웨솔로스키 소장>.

제주에서 '5·5 최고수뇌회의'

‘[서울 5일 발 합동]딘 군정장관·안 민정장관·조 경무부장 일행은 제주도 지방의 소요사건의 실정을 시찰하고자 5일 상오 7시  김포비행장을 출발하였는데 동일 오후 5시경에 귀임할 예정이라고 한다.’ -동광신문 1948년 5월 7일

1948년 5월 5일 딘 군정장관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등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개최했다. 조병옥은 일제시대 천황폐하를 위하여 조선청년 자원입대를 선동·선전하던 친일파이다. 1941년 8월 25일 부민관강당. 삼천리사 주최 대동아성전 임전대책협의회 회의장.

“조선민중은 아무 요구도 없이 무조건으로 협동하여 전승해서 동아공영권 건설에 매진함으로써 위정자에게 안심을 줄 것입니다.” 해방이후에는 “제주도민은 모두 빨갱이다. 모조리 죽여도 좋다!”는 발언을 일삼았다. 딘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포로였으며, 안재홍은 마지막까지 변절하지 않은 민족주의자이며, 송호성은 한강인도교 폭파로 인해 납북되어, 인민군해방전사여단장을 지냈다. 

‘5·5 최고수뇌회의’는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제주도지사 유해진, 제9연대장 김익렬, 제주경찰감찰청장 최천, 딘 장관 전속통역관 등 모두 9명.  회의의 사회는 맨스필드. 맨스필드는 회의 벽두에 "이 회의는 딘 장군의 명에 의하여 참석자 누구든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으며 이 회의의 내용은 극비이다. 누설자는 군정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선언. 

조병옥 경무부장은 4 ·3사건을 ‘계획된 공산폭동 ’으로 규정하며 강경작전을 주장. 김익렬은 입산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경찰의 실책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키고 무력위압과 선무공작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 조병옥과 몸싸움을 벌였다. 미군정은 회의 다음날인 5월 6일, 김익렬을 전격 해임하고 후임에 박진경 중령을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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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의 지도는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에 대비하여 1945년 8월 11일 미국 전략정책단에서 건의하여 전쟁성 작전국에서 38도선을 획정할 때 참조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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