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우리 고장의 이른바 ‘지식인’들이 그 역할을 담당해 나서야 합니다

지역사회의 다양성

지역사회 내부에는 다양한 사회계층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갖습니다. 그 어떤 논리를 거기에 대입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욕구와 염원을 단 하나의 입장으로 대표될 수는 없습니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이해관계의 대립이 심해지고, 사회변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역주민들의 가치관에도 차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지역사회가 한 가지 인식체계로 고정될 경우, 그곳엔 발전이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입니다. 우리 고장의 크고 작은 갈등도 따지고 보면, 지역사회의 다양성을 무시한 그 획일적 사고(思考)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든 지역사회든, 어떤 하나의 견해에 빠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시계(視界)는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필연적으로 우리를 실재로부터 차단하는 가리개 역할을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새 그것에 사로잡히게 되고, 심지어 그런 견해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모두 색안경을 끼고, 급기야 색안경을 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합니다. 환각에 빠져 있는 한, 그것이 환각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이제 한걸음 비켜서서 ‘우리의 입장’에 도사리고 있는 내부적 결함과 그 틈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낱낱이 드러내야 합니다. 익숙한 것, 정상적인 것으로부터 일탈하지 않고서는 결코 ‘다른 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고정된 어떤 견해만을 오로지 하는 것은 그 지역사회가 화석처럼 굳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특정한 관점’만을 강요하는 사회

따지고 보면 ‘우리의 입장’도 하나의 ‘해석의 틀’ 내에서 동의한 사항에 불과합니다.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구태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지역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실체들과 관련된 ‘그 무엇’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은 실질적인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바로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특수한 관점’에 열광하도록 밀어대는 것은, 누구의 말마따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정신적 혈통’일지 모릅니다. 

문제는 그런 사회일수록 ‘확신에 대한 반대자’를 철저히 배제시킨다는 점에 있습니다. 비판의 목소리를 지역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인양 윽박지르고…. 생존을 위한 투쟁을 이념의 문제로 재단하면서까지…. 이제는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지겹습니다. ‘특정한 관점’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그리하여 애매모호한 관점에의 자발적 예속을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사회! 바로 그런 ‘끔찍한 사회’가 지금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이 아닌지, 매우 두렵습니다.

‘나와 다른 입장과 생각’을 용인하지 않고서는 서로 다른 개성과 조건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지역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눈앞의 다양한 현실을 가로막는 ‘굳어진 신념’은 지금 우리가 확인하듯, 참으로 위험합니다. 그렇습니다. 툭하면 ‘논쟁과 갈등이 있어서는 안 되고’ 억지로 화합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런 유위적 방편을 개발해야 한다는 논리 역시 옳지 못하기는 마찬가집니다. 갈등 또한 그것 자체로 인정돼야 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지역사회에는 ‘확신에 대한 반대자’도 있어야 합니다.

이른바 ‘지식인’의 역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허위의식의 장막을 걷어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당연하고 확신에 찬 그것의 근거를 다시 살피는 일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각종 개발정책의 추상적 구호의 틈을 헤집고 들어가 그 견고한 ‘해석의 틀’을 읽어내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안타깝습니다. 필연적으로 ‘중국자본’의 무지막지한 이윤추구가 지역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지역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감지하면서도 그 위기의 진정한 의미가 숙고되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동안 많은 말을 해왔지만, 너무 많은 말 때문인지, 우리의 시선은 아직도 ‘위기의 근원’에 닿지 못한 느낌입니다. 어디 우리의 당면한 문제가 ‘중국자본’뿐이겠습니까?

겉으로 보였던 것과, 실제로 판명된 사실 간에 현저한 차이점이 느껴짐으로써 드디어 ‘자각’이 생기게 됩니다. 지역사회의 문화적 짜임의 건강성을 따지는 문제의식이 요구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물론 지역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역사회의 주인이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지역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제넘게도 우리 고장의 이른바 ‘지식인’의 역할에 주목합니다. 제가 여기까지 장황하게 이야기를 이끌어온 것도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함입니다.

지식인의 유일한 대안은 거부이다

‘정치지식인’이 활개 짓는 마당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남루합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밤늦은 시간에도 연구실에 불을 밝혀 있을 대다수의 교수들과, 혹 다른 견해가 있음직하지만, 열악한 언론환경 속에서도 현장을 지키는 대다수 언론인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역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시민운동가 등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지식인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물을 흐리는 한두 마리 미꾸라지 때문에 전체가 물을 흐리고 있다는 혐의를 받는 게 못내 아쉽지만…. 그러나 제가 오늘 주제로 삼는 것은 이른바 ‘지식인의 범위’가 아니라, 그 역할과 기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모든 때,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 대하여 모름지기 반대하는 일이 지식인의 임무이고, 혹시 그가 다소라도 그 반대의 소명에 유보의 자세를 취할 때는 즉시 지식인의 자격이 상실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식인의 책무는 무엇보다도 부수는데 있으며, 그것을 다시 세우는 일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됩니다.…오해 없기 바랍니다. 나는 현존질서의 극복 다음에 제시될 모든 대안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어떤 대안이건 일단 수락하려거든 지식인의 기능을 반납하여야 한다고 충고하려는 것입니다. 새로운 질서의 수립과 집행이 그 ‘새로운 질서’ 자체를 다시 투쟁의 대상으로 설정해야 할 지식인에 의해 추진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이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식인의 유일한 대안은 거부이다."

1990년대 초 제민일보에도 칼럼을 썼던 경제평론가 고(故) 정운영 교수의 결론입니다. 치열할 정도로 철저한 거부의식! 마땅히 지식인이 본받아야 할 교훈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 당시도 그랬지만, 이미 늙어 글 솜씨가 한참 무뎌진 지금에도 저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의 또 다른 말처럼 ‘합명제’를 전제하지 않을 경우에만 ‘반명제’가 진실로 자유롭다는 ‘부정의 변증법’에 저 역시 대단한 매력을 느낍니다. 모두에게 저항하는 행위가 결국 아나키에 불과하다고 거세게 비난하더라도, 그것이 어느 한 쪽에 편승하여 분별없이 자행하는 독선보다 훨씬 덜 위험하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주제넘은 고집이 혹 누구에게나 미움을 사는 원인이 될 수 있을 듯하지만….

차이의 인정과 부분의 확대

논의를 불필요하게 확대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반성론의 아포리아에 부득이하게 직면하게 되는 ‘넘기 어려운 벽’을 만날 때마다 저는 비겁하게도 그저 가정법(假定法)으로 흘리고 맙니다. 우리 고장의 이른바 ‘지식인’들에게 만일, 창조적 회의와 철저한 비판을 추구하기를 요구한다면…. 만일, 지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허위의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에 치열하게 대면하기를 요구한다면…. 그리하여 만일, 통찰력의 수준을 평소 목소리의 크기로 맞춰달라고 요구한다면…. 그들의 반응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면, 지역사회의 ‘확신에 대한 반대자’이어야 합니다. 변함없이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을 자신이 서 있는 사회적 위치에 맞춰야 합니다.

지역사회가 어렵습니다. 지역사회의 통합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합의 요구가 강할수록 하나의 목표에 매달리게 되고, 그럴 경우 자칫 지역사회의 합의나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민주주의 가치가 외면될 위험이 있습니다. 최근 각종 개발계획의 잡음도 그것 때문입니다. 지역사회의 일체의 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정신의 구축이 자기 이해관계를 떠나서는 좀처럼 구축하기 어려운 현실이야말로 또 다른 우리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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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 언론인
‘특정한 관점’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획일적 가치’는 지배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공존의 논리입니다. 그게 바로 부분을 확대하는 일입니다. ‘원희룡도정’이 1년을 보내면서 반성할 일이 있다면, 그에 대한 성찰이어야 합니다.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협치’라는 게 과연 어떤 것인지, 저는 그 내용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것도 ‘차이를 인정하고 부분을 확대하는 일’에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강정홍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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