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선흘 목시물굴 현장 위령제 열려...4.3 역사기행 인파로 '북적'

▲ 조천읍 선을리 곶자왈 지대 '목시물굴'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팻말.
조천면 중산간 동쪽 끝에 자리잡은 선흘리.
4.3 당시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자 주민들은 수십만평의 동백나무 숲으로 우거진 선흘곶으로 피신했다. 흔히 '선흘 곶자왈'이라고 불리는 이 곳은 자연동굴이 곳곳에 많아 은신처로서도 안성마춤이었던 곳.

하지만 그 굴이 발각되면서 불과 며칠사이에 희생과 학살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58년이 지난 8일 오전 10시. 반세기가 지난 후 40여명의 원혼들이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잠들지 못한 이 곳 목시물굴에서 4.3 원혼들의 넋을 위로하는 '해원상생굿'이 열렸다.

도내 전역에서 산재한 학살터를 돌며 치르고 있는 현장위령제는 지난 2002년 다랑쉬굴, 2003년 북촌 학살터, 2004년 잃어버린 말을 화북 곤을동, 2005년 표선 한모살 학살터에 이어 다섯번째다.

해원 상생굿은 제주민예총 4.3문화예술사업단이 지난 2002년부터 4.3학살의 원이 서린 곳을 찾아 '예기(藝氣)로서 풀어내는 한바탕의 굿판.
 
비극적 죽임을 당한 '학살의 터’를 찾아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장소 즉 땅인 자연까지도 함께 치유하자는 '상생의 굿판'이다.

▲ 칠머리당굿보존회가 집전하고 있는 위령굿.

집 -선흘리 목시물굴에서-

▲ '집'을 낭독하고 있는 김경훈 시인.
시인 김경훈

여긴 내 집이 아니라네
내가 거처할 곳이 아니라네 잠시
살러온 것 뿐이라네
저기,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두 참 남짓
멀지 않은 곳이라네
굴에서의 삶은 입에 곡기가 없었다네
굴 속에서 끌려나온 나의 몸이 총탄을 실컷 먹었다네
그건 나의 집의 밥이 아니었다네
그 위에다 휘발유,
내 몸 위에 불이 얹어졌다네
그건 나의 집의 온돌이 아니었다네
그 위에 나의 시신 위에
살아남은 자들이 흙을 덧씌워줬다네
그건 나의 집의 이불이 아니었다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잔디 입혀 이장한 이 무덤이 아니라네
여긴 내 집이 아니라네
나의 집은, 저기
두 참 바로 못미처
내가 살던 바로 그 집
마저도
불에
타버렸지만

'목시물굴 현장...12 저승문을 지나야 갈 수 있어'

▲ 저승문을 들고 나가고 있는 참배객들.

58년전의 기억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저승길로 가기위해 지나햐 한다는 12문을 지나야 다다를 수 있다.

그리고 동백나무 숲 지대를 따라가니 불과 입구가 60~80cm도 채 되지 않은 동굴이 나타났다.

▲ 신위게 올린 종이술잔 사이로 놓인 동백꽃이 유난히 붉다.
이름하여 목시물굴.

두 개의 입구로 된 이 굴은 총 길이 100여m로 굴 한 쪽은 한 사람이 누어서 들어갈 정도로 좁고, 한쪽은 비교적 크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머물기엔 너무나 불편해 보이는 이 곳에 수십명의 주민들이 엉키며 살았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몰래 숨어든 곳. 토벌대가 연기를 피워 학살을 자행한 이곳엔 40여명의 원혼이잠들어 있다.

이 곳에 자식과 부모, 형제를 묻은 유족들은 한송이 동백꽃과 함께 술잔을 올리며 영면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한 유족은 "작은 굴이었는데, 채 돌도 지나지 않은 여자아이는 자꾸 울어서, 울음소리 때문에 들킬까 염려한 아이의 아빠가 입을 틀어막았다"며 "결국 그 아이는 숨이 막혀 버려 죽더라"며 속울음을 삼켰다.

당시 목시물굴에서 총살된 희생자는 고경환, 고달옥, 고영백, 고일생, 고임형, 고태휴, 김기환, 기병규, 김삼준, 김성천, 김성홍, 임원준, 김정봉, 김태진, 김홍인, 김봉수, 부사인, 부원화, 부좌룡, 부희룡, 부춘하, 안도훈, 안두용, 안창성, 안창윤, 안태규, 안태인, 양중근, 윤구성, 윤한생, 정창호, 조영순, 조홍배, 한정선, 한재준, 한재준의 딸, 부서남, 고백선, 안창하 등 4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참고=4.3은 말한다).

김형조씨는 "목시물 굴에서 들어가지 않은 네 명은 덕천리 지경의 높은 오름에 앉아 정황을 살피고 있는데, 낮 시간이 돼서 막 연기가 나고 총쏘는 소리, 사람죽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라"며 "그야 말로 당시엔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고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현재 큰 입구는 동굴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보기에도 흉한 철재 파이프로 막아놓았다. 한 참배객은 "4.3원혼들이 얼마나 갑갑해 할까 걱정이 된다"며 "58년 동안 갖힌 것도 부족해서 다시 철골로 막아놓은 것이 과연 원혼들을 생각한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안타까워했다.

▲ 목시물굴 입구. 한 사람이 누워서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다.

▲ 동굴입구를 막아놓은 철골 구조물 앞에서 참배하는 유족.

▲ 선흘 주민의 희생자 명단이 빼곡하다.

'3시간 동안 내내 현장 위령굿...원혼 하나씩 불러내며 '넋' 달래'

사실 희생터는 이 곳만이 아니다. 인근 동백동산 근처에 '반못굴'과 '밴뱅듸굴'에서도 이유없는 죽임을 당했다.

8일 오전 10시부터 무려 6시간 넘게 선흘 목시물굴 현장에서 진행된 찾아가는 현장위령제, '해원 상생굿'은 그렇게 많은 유족들의 고통과 아픔을 어루만지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진행됐다.

현장에는 열두문 저승질, 위령만장, 배향 신위, 열두 돌까마귀 솟대 등의 설치 조형물들이 세워져 죽은 넋을 달래고 영혼들의 한을 풀어내는 '역사의 징검다리'가 됐다.

먼저 제주작가회의 김경훈 시인이 '집-선흘리 목시물굴에서-'를 낭독한데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칠머리당굿보존회가 집전하는 위령굿이 3시간 넘게 이어졌다.

이날 심방은 굴에서 숨진 40여명의 넋을 불러내며 하나 하나 맺힌 원을 풀어주고 당시 학살된 선을 주민 수백명의 넋을 달랬다. 풍물굿패 신나락이 연물놀이로 풀어내는 '소리굿'이 죽은 넋을 달랬고, 놀이패 한라산과 최상돈이 어우러지는 '몸굿' 등도 죽은 영혼을 어루만졌다. 

현재의 문화예술과 전통적인 굿을 통해 죽은 자와 죽은 땅에 보시하고 맺힌 죽음과 맺힌 땅을 풀어주는 '풀어줌의 미학'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흘러갔다.

목시물굴 현장에는 연극인 홍신자씨를 비롯해 코리아헤럴드 저널리스트 등이 일찍 찾아 동영상으로 꼼꼼히 담아갔다.

이날 4.3 주간에 맞춰 4.3역사기행을 떠났던 (사)제주도4.3유족회 청년회(회장 오승학)와 4.3도민연대(공동대표 양동윤 외)를 비롯한 한경면도서관(관장 문순영) 등 많은 단체가 현장 위령제를 지켜봤다.

이들 단체들은  현기영 소설가의 단편소설 ‘순이 삼촌’의 무대를 중심으로 조천읍 북촌마을의 당팟, 엉물, 너분숭이 애기무덤, 북촌초등학교 학살터와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등 곳곳에 널려있는 4.3 유적들을 둘러봤다.

▲ 위령굿에 몰입한 선흘 유족들.

▲ 목시물굴을 찾은 어린학생들의 추모.

▲ 4.3원혼들께 바친 술잔들.

▲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유족 김형조씨.

▲ 해원상생굿을 여는 풍물패 '신나락'.

▲ 4.3원혼들께 바친 술잔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 이날 현장위령제에는 초.중.고.대학생을 포함한 4.3기행 참가자들의 방문이 잇따랐다.
▲ 400여명의 신위를 뒤로 한 채 심방이 위혼굿을 내보이고 있다.
▲ 지난 2월 2일 '예기'(www.yegie.com)라는 예명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평화를 싹을 틔우는 작업을 하고 있는 예술인 신영철씨(53)가 세운 4.3이정표(팻말)가 보인다.
▲ 목시물굴로 가기 위해 저승문을 지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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