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50) 좌우대립으로 희생을 강요당한 제주여성들    

부녀동맹의 조직과 활동   

‘전일에 이어 9일 상오 10시 고진희(高眞姬)씨에 대한 3․1사건 포고령 2호, 군정법령 19호 위반죄의 판결언도가 심리원 법정에서 있었는데 최(崔)주심으로부터 체형 5개월, 벌금 2000원(단, 3년 집행유예)형 언도가 있었다. 익(翌) 10일 오전 11시 방청 10여명의 한산한 심리원 법정에서 김영호 재판관 주심으로 진해생(秦亥生) 피고에 대해서 우선 사실심리로 들어가 주로 무허가 3회에 긍(亘)한 집회와 1회의 무허가 시위에 관한 청취서의 심리가 있었는데 피고는 일일이 그 내용을 시인하며 1회의 집회에 대해서 지서장 임석을 주장함과 간부 주모자 아님을 지적하고 “군정 반대나 공중의 안녕질서 문란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한다”라고 했고 사실심리가 이로 끝나자 양(梁)검찰관대리로부터 “포고령 2호, 군정법령 19호 4조, 형법 55조 적용으로 체형 6개월 벌금 5,000원에 처함이 상당하다”는 구형 논고가 있어 주심은 피고에게 “진술할 말 없는가” 함에 “없다” 하고 잠깐 생각하다가 주심은 피고에게 체형 6개월을 판결언도하고 11시경 폐정하였다.’-제주신보 1947년 5월 12일

▲ 부녀자들이 죽창을 들고 마을 보초를 서고 있다(1949.3).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9월 7일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곧 이어 인민위원회가 조직된다. 1946년 12월 남로당 전남도당부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고, 초대위원장에 안세훈(安世勳), 부위원장에 이신호(李辛祜) 조몽구(趙夢九) 김유환(金瑬煥)이 선출된다. 여기에 부녀부에 이정숙(李貞淑) 고진희(高珍姬) 김진선(金鎭善)의 이름이 보인다.   

제주도부녀동맹(婦女同盟)은 1947년 1월 25일 결성되어, 위원장 김이환(金二煥), 부위원장 고인선(高仁善)·강어영(康御英), 그리고 고덕순(高德順) 등 80여명이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부녀동맹 간부들은 일제 때부터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었다. 김이환은 개회사를 통해 "조선의 해방은 8할 이상을 점하고 있는 무산대중과 1천 5백만 여성의 해방 없이는 도저히 기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조직체를 가짐으로써 이를 위하여 투쟁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2월 21일 제주읍 부녀동맹이 결성되고, 위원장 고인식(高仁植), 부위원장 강청열(梁淸烈)·김금순(金錦順), 집행위원 강소희(姜膆熙) 등 30명이 선출되었다.

이어 전도적으로 ‘3‧1투쟁기념행사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선전동원부에 다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부녀부 이정숙의 이름을 울렸다. 부녀동맹 간부들이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47년 ‘3․1사건’ 부터였다. 그에 대한 검속은 3월 15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부녀동맹 회원을 중심으로 부르던 노래가사는 ‘날아가는 까마귀야/ 시체보고 웃지마라/ 몸은 비록 죽었어도/ 혁명정신 살아있다’는 내용이었다. 

부녀동맹 위원장 김이환은 경찰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전면에 나섰고, 결국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는 “성명서에 대해서는 그날의 진상을 아는 자는 누구나 성명서를 발표 아니 하지 못할 것이다.”고 강변, 눈길을 끌었다.  3·1사건 피고인 가운데  고진희는 5월 10일 공판에서 체형 5개월, 벌금 2000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고진희에 대한 삐라 살포, 성명서 첨부, 무허가 집회에 관한 사실심리도 있었다. 

제주4·3 무장봉기가 시작되기 전 면리(面里)에 자위대가 편성되었으며, 한라산 등 산악과 밀림지대 등 각 지구에 유격대(遊擊隊)가 편성되었다.

그 조직은 △‘도 당부’책임=안요검, 조몽구, 김유환, 강기찬, 김용관 △‘도당 군사부’책임=김달삼(본명 이승진), 김대진, 이덕구 △총무부=이좌구, 김두봉 △조직부=이종우, 고칠종, 김민생, 김양근 △농민부=김완배 △경리부=현복유 △선전부=김은한, 김석환 △보급부=김귀한 △정보부=김대진 △부인부=고진희 등이다. 

4· 3이 발발하자 여성들 중 일부는 산으로 올라갔지만 대부분은 마을에 남아 무장대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식량이나 의복 등 생활 물자를 무장대에게 공급하는 일을 하게 된다.
 
1948년 11월 읍내 여성들도 헌병대에 줄줄이 끌려 들어갔다. 끌려간 여성은 △강어영(康御英, 道부녀동맹 부위원장) △강염숙(姜念淑) △고숙자 △고지영(高芝英, 의사 朴永勳의 아내) △고혜영(高蕙英, 조선소 사장 高昌基의 아내) △김보배(民戰조사부장인 鄭相朝의 아내) △양청열(梁淸烈, 邑부녀동맹 부위원장. 민족청년단 창설멤버인 文奉澤의 아내) △이순실(李順實, 도청 金王辰 과장의 아내) △이순손(李順孫) △최정숙(崔貞淑, 의사. 최원순 법원장의 딸. 제주도교육감 역임) △한여택 △홍종춘 등이다.  

강염숙이 맨 처음 끌려간 곳은 헌병대였다. 그곳에는 읍내 유지급 여성들이 가득했다. 김이환·고인식 등도 있었다. 헌병들은 ‘부녀회가 부녀동맹으로 바뀐 후 간부들의 명단과 활동상황을 밝히라’며 추궁했다. 부녀동맹 간부였던 양청열은 산에 쌀을 올린 혐의를 받았고, 홍종춘은 전기고문을 받았다. 김금순과 김영아는 결국 희생되었다.

강상유(姜相幽)는 4․3 당시엔 홀로 된 상태였다. 강상유는 얼굴이 고왔다. 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 대위가 강제로 그녀를 범한 후 함께 살았는데 어쩐 일인지 그녀를 죽여버렸다. 강상유는 당시 사회활동을 하던 여성들과 같은 그룹인데다가 그녀의 오빠 강상호(姜相鎬)는 일제시대 유명한 사회주의자였다. 

한편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가 1948년 8월 21일부터 6일간 북조선 해주에서 열렸다. 제주도 인민대표 안세훈·김달삼(金達三)·강규찬(姜圭讚)· 이정숙· 고진희· 문등용 등 6명이 참석하였다. 남한의 각 지역 대표 1080명 가운데 1002명이 참가하였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안세훈· 김달삼·강규찬· 이정숙·고진희가 대의원에 뽑혔다.

'1947년 7월 15일/제주여중 파업(정보요약 제18호) 제2부: 방첩대 정보보고/ 24군단 971방첩대

(중략)2. 전복행위  a. 급진주의자 (2) 학교파업: 47년 6월 2일 제주도의 제주여중학교 3학년 학생 약 180여명이 파업에 돌입하였다. 여학생들은 좀 더 질 높은 형태의 교과과정, 파시즘 교육 반대, 학교내의 파시즘 요소 제거, 교장의 행동에 대한 정정 등을 요구했다. 어떠한 정치적인 연계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파시즘에 반대하는 익숙한 주장이다. (후략)'-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민정정보국 정보요약(Civil Intelligence Section, Periodical Summary)

‘[제주] 현하 각 중등학교에서는 배속장교가 있어 학도의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으나 제주도에는 아직 배속장교가 배치되지 않고 있는데  군사훈련교육의 긴급성에 비추어 독립대대장 김용주(金龍周) 중령의 특별조치로 현역장교를 제주읍 각 남녀중등학교에 배치하였는데 제주여중과 제주중학에는 강성희(姜成熙)중위가 취임하였다.’-서울신문 1949년 9월 17일

▲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 .

제주4·3,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름

‘제주도 인민에 대한 살상을 곧 중지하라고 29일 민주여성동맹에서도 다음과 같이 강경히 요구하였다. “(1) 지난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망국 단선 등록을 강요하려는 위협, 폭압에 대항하여 궐기한 애국인민에 대한 살상을 자행하며, 폭압은 거익(去益) 대규모로 확대되어 계속되고 있다. (2) 제주도 인민의 영웅적 투쟁에 대하여 무한한 감격과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본 여맹은 전 여성과 함께 애국인민에 대한 살상을 곧 중지할 것을 강경히 요구하여 단호 항의하는 바이다.”’-독립신보 1948년 4월 30일

‘어제 25일 문맹(文盟) 미맹(美盟) 여맹(女盟) 음맹(音盟)에서는 각각 제주도 소요에 관하여 담화를 발표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부당하다” 지적하고 이를 “즉시 중지하라”고 주창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5월 26일

4·3당시 토벌대에 의한 여성의 수난은 집단강간과 반인륜적인 성폭력을 동반하였다. 임산부를 "빨갱이 종자이므로 없애야 한다"면서 총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연행자 중 남녀를 지목하여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하거나 성기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폭파시켰다. '빨갱이년' 혹은 '빨갱이 가족'이라 하여 남편이나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 대신 무고하게 학살당하고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 이를 대살(代殺)이라 하였다.

“나는 1949년 1월경 여러 사람과 경찰서와 헌병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경찰서에서는 손을 뒤로 묶은 채 천장에 매달아 놓고 때렸어요. 헌병대로 옮겨진 후에는 전깃줄을 엄지손가락이나 뺨에 대는 전기 고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2주일 정도 수감되어 나왔지만 산에서 심부름하던 처녀들은 희생이 컸습니다. 아무개 처녀는 순경이 자신과 결혼을 하면 살려주마고 했지만 끝내 거절하여 죽었습니다. 또 아무개 처녀는 '다라쿳' 목장 부근에서 토벌대에게 잡혀 산채로 유방이 도려졌어요.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해 땅바닥을 긁어 대 손톱이 다 빠졌고 그녀가 죽은 부근에는 잔디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이춘형(李春珩, 96년 채록, 채록당시 82세)

“토벌대는 큼직한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그러다가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홀랑 벗겼지. 나는 당시 마흔 살이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여지가 있나. 그냥 옷을 벗으라 하니 벗을 수밖에. 토벌대는 옷을 벗긴채 또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그러다가 싫증이 났는지 얼마 없어서 처녀 한명과 총각 한명을 지명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짓을 강요하는 거였어. 인간들이 아니었지. 두사람이 어쩔줄 몰라 머뭇거리자 또 매질이야. 그러다 날이 저물어 가자 주민 4명을 끌고가 총을 쏘아 버렸어.”-좌봉(左奉), 94년 채록, 채록당시 87세

“1948년 11월경 경찰서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나서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취조실로 가보니 한 여자가 나체인 상태로 거꾸로 매달려 고문당하고 있었어요. 내가 일본도를 들고 가서 화를 냈더니 취조하던 수사대원은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튿날 경찰청장에게 "최난수가 너무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제주 사람들은 점점 더 육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면 사태 진압이 어려워진다"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육지 출신의 특별수사대 경감 최난수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김호겸(金浩謙, 4·3당시 서귀포 경찰서장,  96년 채록, 채록당시 80세)

▲ 4.3 당시 진압군이 총살을 집행하는 장면.

서북청년단의 만행

이승만은 서북청년단 총회에 참석하여 "당신들이야말로 신원이 가장 확실한 사람들"이라고 격려하면서 “저기 남쪽 끝 외딴 섬에 빨갱이들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대통령의 격려를 받은 서청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빨갱이를 타도하러 가는 애국자들'이었다. 그들이 '빨갱이 여편네'를 고문, 강간, 살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법률적으로도 죄의식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었다. 이것은 동서냉전이 몰고 온 국가 폭력이고 인권유린이다.

“엿장수나 하던 서청들이 무장을 하게 되면서 희생자는 속출했습니다. 난 교사로서 주정 공장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창고 안에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어 구타하면서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하였습니다. 밤에는 썩는 냄새로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살아나게 된 것은 정 아무개 선생 때문입니다. 정선생은 나의 약혼녀였는데 그 선생이 차 아무개란 서청 간부와 결혼해서 나를 살려준 겁니다. 날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자신을 겁탈하려던 서청원과 결혼한 것입니다.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홍경토(洪敬土), 97년 채록, 채록당시 70세

서북청년단원들이 자신들이 제주도에 온 이유를 묘사한 말, "제주도는 붉게 물들었다"에서 볼 수 있듯이 '제주도'는 하나의 빨갱이 집단으로 그리고 붉게 물들은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되었다. '제주도 주민의 몸은' 다름 아닌 '빨갱이의 몸'이었다.  "죽창을 휘두르며 투우사처럼 용감하게 좌익 아지트를 까부스는" 서청의 행위에서는 폭력 자체의 쾌락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양아무개가 있다. 그도 결국 죽을 건데 서청단장 김재능이 그의 누나를 빼앗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게 결정적으로 그를 살린 요인이다. 그보다 못한 사람도 다 죽였으니까. 또 나중에 영화감독이 된 서청 출신 김 아무개도 성산포에서 맘에 드는 여자를 빼앗아 살았다.”-최길두(崔吉斗, 96년채록, 채록당시 80세)

“난 해방 직후 음악동지회 시절부터 노래를 잘 부르기로 성내에 소문이 났었기 때문에 차출되었다. 이때 노래를 부르면서 토벌대 핵심부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그런데 서청단장 김재능이 나를 노렸다. 김재능이란 놈은 나이든 여자든 젊은 여자든 어떻게 하면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해 볼까 궁리하는 놈이었다. 김재능에게 얼렁뚱땅 '다음에 보자'고 하여 도망쳐 나온 적도 있다. 또 2연대장이 날 노렸다. 한 번은 자신의 부하에게 날 몰래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 부하들은 우리집 담을 넘다가 실수해서 우물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결국, 날 도와주었던 2연대 헌병 대장과 결혼했다.” -金아무개(96년 채록, 채록당시 76세)

서청이 강제결혼을 감행하는 원인 하나는 성적 대상물로 맘에 드는 여자를 골라 강제 결혼하는 사례와 또 하나는 제주에 안착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적인 확보를 위하여 재력가의 딸과 강제결혼 하는 사례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육지에 본처를 두고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또한, 당시 서북청년단 서귀포 단장은 임 아무개였는데 한 재력가의 사위가 됐다. 경찰 사찰계에서 근무하던 서청출신 김 아무개도 역시 재력가의 사위가 되었다.

‘지난 16일 하오 1시경 허 경감이 지휘하는 경찰전투대 유격대는 제주서 관내 ‘성널오름’ 부근에서 잔비 수십 명을 포착 격전 끝에 생포 2명 사살 1명의 전과를 올렸는데 생포 중 1명은 재산 잔비의 병원책임자 고신종(高申宗․당 22년․조천면 와흘리 출신)과 병원 간호사 김순자(金順子․당 17년․제주읍 이호리 출신)이며 사살된 폭도는 고광추(高光秋․조천면 와흘리 출신)로 판명되고 있다.’-제주신보 1952년 4월 19일

우파 여성조직의 확장

‘[서귀지국 발] 애국부녀연맹 남제주군지부 결성식은 거(去) 8월 2일 오후 1시부터 군청 회의실에서 각 면리(面里) 대의원, 방청인 다수 참석 하에 탁명숙(卓明淑)씨 사회로 개막되었다. 개회 벽두에 긴급동의로써 명예의장에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김규식 박사의 3씨를 추대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사회로부터 경과보고와 취지설명이 있은 다음 박기덕(朴基德)씨의 이북 정세보고에 이어서 임시의장에 강형순(姜亨順)씨를 선거한 다음 집행부 선거에 들어가 위원장 강지전(姜知田)씨, 부위원장 현애옥(玄愛玉)씨 홍애영(洪愛永)씨를 선거하여 오후 5시에 종막하였다.’-제주신보 1947년 8월 6일

‘[제주에서 이병훈 특파원 발] 신(申)국방장관은 지난 11일 당지 제2연대 민사처 주최 제주재건 부녀궐기대회에 임석하여 2,000여 군중을 앞에 놓고 제주도 재건은 제주 인민에 의한 것이며 특히 관리의 부패상을 지적한 후 금후 이 같은 일이 있을 때는 주저 없이 고발하여 줄 것과 제주신보사를 제주도민에게 이양할 것을 강조하고 제주치안의 자치제를 역설한 바 있어 다대한 감명을 주었다. 장관의 훈시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는 오늘날 굶주림과 헐벗고 잘 곳이 없는 여러분을 볼 때 눈물만이 있으며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이제는 폭도도 거의 진압되었고 앞으로는 재건만이 남아 있다. 따라서 재건은 여러분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믿으며 일층 분발을 빈다. 특히 과거에 우리 부녀자에게는 여러 가지 공포가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공포는 제거될 것이며 국군이고 경찰이고 부정이 있으면 즉시 고발하기를 바란다. 현재 제주신문은 외부사람이 운영하고 있는데 즉시 본 도민에게 이양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장관은 선편으로 작(昨) 12일 제주항을 출발하였다.’-국도신문 1949년 4월 14일

‘[한림] 천정 모르게 오르는 쌀값에 도민의 식생활은 큰 위협을 받고 있는데 그 중에는 이미 굶고 있는 농가도 적지 않은 바 있다. 즉 절량에 직면하고 있는 한림의 농가는 약 9백여 세대인 바 특히 이재부락인 동면 고림동은 214세대 중 205세대가 절량으로 끼니를 굶고 있어 면에서는 우선 긴급조치로 유상배급미를 내주고 있으나 헐벗은 그들에게는 그를 사들일 돈도 없어 식자의 동정을 사고 있는데 이에 동면 대한부인회에서는 그들을 구호하기 위해 부유층의 희사와 끼니를 참아 식량을 보태어 모으기로 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한다.’-제주신보 1952년 3월 16일

▲ 돌아가신 부친에게 보내는 편지(제주4.3평화 기념관에서).

마지막 여자 무장대 한순애 

‘지난 2일 경찰토벌대에 의하여 생포되기까지 만 9년 동안 제주도 한라산을 중심으로 하여 암약하던 최후의 재산 공비 오원권(吳元權․39)은 9일 하오 현지 경찰에 의하여 치안국으로 압송되어왔다. 그런데 이에 앞서 지난 3월 21일 식량을 구하려 제주 시내로 내려왔다가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제주도에 남아 있던 공비 4명을 모두 소탕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해준 여자 공비 한순애(韓順愛․23)도 이날 전기 오(吳)와 동도 압송되었는데 산에서 수년 동안이나 토굴생활을 하였다는 과거를 깨끗이 잊은 듯 파마머리에 날씬한 몸차림으로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한편 오(吳)는 지난 27일 자수하려고 산에서 내려왔던 일도 있었다고 하며 오의 가족들의 지성 어린 공작으로 종시에는 자수할 기회를 얻게된 것이라고 한다. (사진은 치안국에 도착한 두 공비)’-조선일보 1957년 4월 10일

1957년 3월 21일, 제주경찰서 사찰유격대가 월평동 견월악 지경에서 식량확보차 하산한 무장대를 포착하고 도주하는 이들을 추격하다가 대열에서 뒤떨어진 여장무장대 한순애를 생포하였다. 이어 3월 27일 사찰유격대가 한라산 평안악 밀림지대에서 무장대 3명과 교전 끝에 총책 김성규 등 2명을 사살하였고, 마지막 무장대 오원권도 4월 2일에 성산포 유격대가 구좌면 송당리에서 생포하였다. 이로써 한라산에서 총성이 멈추었다.

한순애는 조천면 와산리 출신이다. 어머니를 잃고 서모를 맞아 아버지, 오빠 , 동생과 살고 있었다. 농사일을 거들고 겨울밤에는 야학에 다니며 한글도 배워 글자로 충분히 표시할 수 있게 되었다. 1951년 봄 17세가 되었을 때 산에 붙잡혀 들어가 무장대원이 되었다. 동네 할머니들을 따라 동네에서 약 40리가량 떨어진 제주읍에 장을 보러가다가 산 고개길에서 무정대에 붙잡혔다. 함께 장보러가던 할머니들을 놔두고 무장대는 그 하나만을 붙들어 산으로 끌고 갔다. 막 발버둥을 치며 항거해봤으나 그들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산에서 무장대원들의 식사와 의복가지를 공급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민가에서 약탈해온 의복들을 꿰매어 주고 뚫어진 곳을 기워주는 일, 밥을 지어먹고 식기를 간수하는 일, 그러한 것들이 그의 책임이었다. 소녀의 몸으로서 남자들과 기거를 같이하고 그들의 생활에 동화되어가야만 하는 그로서는 자신의 의견을 가져본다거나 스스로의 순수한 감정에 몸을 맡겨본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한순애는 완전히 그들의 봉사자요 고용인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잘 때까진 헤어날 구멍이라고는 없고 잠이 들면 고꾸라떨어져서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버리기가 일쑤였다. 여성의 생리에 대해서 애틋한 정서라든가 따사로운 여성의 감정을 누릴 줄 아는 시절에 그는 경찰토벌대의 총부리로부터 도망쳐 다녀야 했고, 그날그날 여성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고된 역할을 군소리 없이 치러야 하는 처지였다. 

겨울바람이 사납게 부는 밤, 몇 자씩 쌓인 눈을 헤치고 광목으로 만든 천막으로 바람이나 겨우 피할 정도로 자리를 잡고 얼어서 터진 손을 호호 불어가며 남자들의 찢어진 옷가지를 꿰매었다. 사실 처음에는 한곳에서 마구 뒹구니까 무섭기도 했지만 차차 날이 갈수록 남자들이라고 별반 다르게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여자들은 약 20명가량 되었다. 여자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해주는 것은 없었다. 여자기 때문에 더 고통을 받을 때가 많았다. 23세의 처녀는 절규하고 싶었다.

긴 세월을 산중 밀림 속에서 전전, 식량 의류 등을 약탈하여 생명을 이어오다가 생포된 한순애. 그의 근거지는 일정한 곳이 없으며 깊은 밀림 속에 나무기둥을 세워 모포로 사방을 가리워 기거와 식사를 한다. 식량은 수확기인 가을철을 중심으로 밭과 민가에 침입, 곡식을 약탈, 곳곳에 은닉 비축해 두며 때때로 하산 방목하는 우마 등 가축을 포살, 반찬과 육식을 하며 산열매도 따먹는다. 이번 자신이 붙들릴 때에도 체마(逮馬)차 하산하였다. 거처는 1개 장소에 장기간 있지 않고 약 10일 전후로 옮긴다.

간혹 교육도 받곤 하나 조직력은 완전 파괴되어 식량보급을 위한 부락 습격과 그밖에 일체의 행동은 각자 합의 하에 움직인다. 일반인과 경찰관을 막론하고 발견되었을 때에도 대항하지 않는 방침으로 연명책에 급급할 따름이었다. 과거 인원이 많을 때에는 사령관이 모든 것을 지휘하여 왔고 명령계통이 있었는데 인원이 줄어들면서부터 단지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모든 일을 하였다. 밀림생활에서도 가끔 사령관으로부터 공산주의 교육과 한글공부를 받으며 일기도 적었다.

피해여성의 상징 ‘무명천 할머니’

‘한 여자가 울담 아래 쪼그려 있네/ 손바닥 선인장처럼 앉아 있네/ 희디 흰 무명천 턱을 싸맨 채/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 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를/ 날카로운 한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그녀 몸의 소리를/ 모든 말은 부호처럼 날아가 비명횡사하고/ 모든 꿈은 먼 바다로 가 꽂히고/ 어둠이 깊을수록 통증은 깊어지네/ 홀로 헛것들과 싸우면 새벽을 기다리던/ 그래 본 적 없는 나는/ 그 깊은 고통을 진정 알 길 없네/ 그녀 딛는 곳마다 헛딛는 말들을 알 수 있다고/ 바다 새가 꾸륵대고 있네/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벗기는/ 배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 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오늘도 희디흰 무명천 받치고/ 울담 아래 앉아 있네/ 한 여자가' -시인 허영선의 ’무명천 할머니‘ 

‘무명천 할머니’로 알려져 있는 고(故) 진아영(1914~2004) 할머니. 제주4.3의 광풍으로 후유 장애의 삶을 살다 2004년 9월 8일 세상을 떠나면서 '제주4.3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된 인물. 그의 생가는 26.4평방미터, 텃밭까지 하면 부지는 99평방미터. 

무명천 할머니는 4.3사건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9년 1월, 35살의 나이에 한경면 판포리 집 앞에서 경찰이 발사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랫턱을 완전히 잃어, 죽기보다 힘든 삶을 살았다.  

총을 맞고 아랫턱을 잃을 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는 것도 어려워 평생 죽만 입안으로 그대로 넘겨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무명천으로 턱을 감싸고 평생을 살아 '무명천 할머니'로 더 알려졌다. 식사를 할 때에도 뒤돌아 아무에게도 턱을 보이려 하지 않았던 무명천 할머니. 사고 후 언니의 집이던 한림읍 월령리에 위치한 8평 남짓한 집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결혼도 못하고, 자식도 갖지 못하여 55년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오다 건강이 악화돼 2003년에 월령리 집을 나와, 이시돌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90세가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 김관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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