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23)] 제7대 도지사 길성운 ⑧

이즈음 송당(松堂)목장 건설계획이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한미재단 고문(前미8군사령관, 한미재단이사장에서 고문으로 옮김)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이미 제주지역에 대한 대규모 목장조성계획은 여러 해 전부터 농림부 조사반들에 의해 답사가 끝난 상태였다.

밴플리트와 외국인 수의사 스틴슨 두 사람이 목장개발예정지를 돌아보기 위해 제주에 온 것은 1957년 3월28일이었다. 李承晩 대통령의 탄신경축일을 하루 앞둔 그 해 3월25일 한국에 도착한 밴플리트는 이날 정재설(鄭在卨) 농림부장관, 이남신 축정국장, 육군본부 공병감실 표순구 중령 등을 대동하고 농림부가 답사한 안덕면 서광리와 한림면 금악리, 구좌면 송당리 등을 돌아봤다. 이들이 도착한 모슬포에는 제주도 산업국장과 경찰국장, 경찰의장대가 출영했다.

그것은 밴플리트와 이 대통령의 특별한 친분관계에도 이유가 있었으나 제주축산발전을 위해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밴플리트는 1951년 4월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의 의견충돌로 해임된 맥아더 원수의 후임으로 UN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리지웨이 장군의 뒤를 이어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 1953년 1월24일까지 1년9개월동안 재임했다. 그는 이 대통령과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밴플리트는 퇴역후에도 한미재단 이사장직을 맡아 자주 한국에 드나들었으며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조그만 목장을 경영하고 있어 축산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밴플리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혜의 광활한 토지를 가지고 있는 제주도에 대규모 목장을 건설하여 품종이 뛰어난 외국산 소를 도입해서 몸집이 작은 한우를 개량해야 한다고 이 대통령을 설득하곤 했다. 밴플리트 일행은 3일간 제주도내 일원을 돌아본 후 송당지역이 대규모 목장지대의 후보지로서 가장 적지임을 확인하고 후보지내에 있는 민간 소유토지에 대한 매입방안과 축사?급수시설에 대한 대략적인 구상을 마련했다.

밴플리트의 목장건설 의욕은 대단했다. 그를 3일간 안내했던 길성운 지사는 나중 직원조회에서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노(老)장군이지만 그 왕성한 정력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밴프리트 적극적인 의지로 농림부 송당목장 개발계획 발표

밴플리트는 서울로 간 뒤 3일만에 제2군 사령관 최영희(崔榮喜) 중장과 함께 다시 제주에 왔다. 이번에도 역시 미국인 수의사 스틴슨을 대동하고 길 지사의 안내를 받으며 송당지구를 돌아봤다. 밴플리트는 두 번째 방문에서 구체적인 목장조성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소반입항을 산지항으로 결정하기 까지 했다. 이어 4월4일에는 이형근(李亨根) 육군참모총장이 육군공병감과 함께 내도하고 목장건설에 필요한 지원사업을 살펴보고 돌아갔다.

그해 4월15일 농림부는 제주도 송당목장개발계획을 발표하고 송당목장을 국립제주도목장으로 하되 건설공사를 육군공병단에서 맡아 한다는 내용을 밝혔다. 건설공사는 그 해 7월12일까지 완공한다는 것이었다.

목장규모는 900만평으로서 목도(牧道) 15km와 목책 45km를 설치하고 축사 105동과 관사 8동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한 달뒤인 5월14일에는 농림부가 1차로 짓게 되는 축사와 관사 등 14동에 대한 공개입찰에 앞서 현장설명회가 개최됐다.

목장관사에는 대통령 전용 「특호관사」1동(43평)과 귀빈용 「갑호관사」2동(동당 20평), 「을호관사」1동(10평)이 포함돼 있었다.

1957년 23일 오전7시25분 李承晩 대통령이 83세의 노구를 이끌고 해군 군함편으로 제주에 왔다. 이날 산지항 외항에 정박한 구축함에서 세관 감시선으로 옮겨 탄 후 동부두에 내린 이 대통령은 진해에서 바로 제주로 온 것이었으며 그의 시찰에는 육군참모총장 백선엽(白善燁) 대장과 前육군참모총장 이형근, 해군참모총장 김일병(金一秉) 소장 등이 수행했다. 이 대통령은 길 지사의 안내로 경찰의장대의 사열을 받은 뒤 선발대로 와있던 정재설 농림부장관, 이남신 축정국장, 서정학 치안국장, 스틴슨 수의사 등의 영접을 받았다.

이 대통령은 도지사 관사에서 아침식사를 들고 곧바로 송당목장 조성지로 향했다. 이 대통령은 목장 한복판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한 시간동안 정 장관으로부터 목장의 규모와 운영방법 등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 "귀한 땅을 개발하면서 조금이라도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되 옛날의 축산방식으로 하지 말고 새로운 방식으로 현대식 목장운영을 해보라"고 지시했다.

이승만 "앞으로 하와이라고 말해도 제주도라고 생각해야 합네다"

이어 이 대통령은 오후에 관덕정 광장에서 있은 도민환영대회에 참석하고 "제주는…"으로 시작해야 할 말을 "하와이…"로 실언해버렸다. 오랜 미국 망명생활과 제주를 하와이와 같은 섬으로 개발하고 싶은 마음에서 순간적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였다. 이 대통령 자신도 실언을 알아채고 "아까는 잘못 말했군. 앞으로 하와이라고 말해도 그것이 제주도라고 생각해야 합네다"라고 말해 군중들의 웃음을 이끌었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송당목장 건설계획을 언급하고 "우리 국민도 이제는 쇠고기를 먹어야 합네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송당목장 건설은 이 대통령의 시찰을 계기로 활발히 추진되기 시작했다. 자유당 정부는 송당목장 조성비로서 그해 1억5000만환을 계상했다. 공사는 서울소재 동명토건(대표 宋鳳觀)에 낙찰됐다. 건설규모와 형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적용되는 대단위 육우(肉牛) 목장이어서 외국의 사례를 많이 참고하였으며 외국 자재들이 직접 미국에서 직접 도입됐다.

그러나 공사 실무자들은 제주의 풍토에 생소한데다 교통이 불편해 큰 곤란을 겪었다. 더구나 제주측후소가 가지고 있는 기상자료는 해발 400m 지역에 적용할 수 없었다. 경무대에서는 대통령의 관심사항인 점을 들어 제주도청에 공사를 재촉하는 명령이 계속 떨어졌다.

8월9일에는 미국산 육우 브라만 166두가 처음으로 성산포항으로 도입됐다. 밴플리트의 고향인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직접 수송돼온 이들 소는 35일만에 부산항에 도착한 뒤 LST 2척에 나눠 제주에 도착했다.

목장개설공사는 야간공사를 강행한 끝에 착공 5개월만인 1957년 10월31일 1차 공사를 완공할 수 있었다. 공사비 3540만환이 투입된 공사에는 하루평균 150명, 연인원 8000여명이 동원돼 축사 7동, 창고 1동, 특호 관사 1동, 을호 관사 3동 등이 건설됐고 60kw짜리 자가발전시설과 35km의 철조망, 구내전화 등이 시설됐다. 또 물이 고이는 지역인 「진수내」를 막아 댐을 만들었고, 이 물을 가축급수장과 식수로 공급하기 위한 풍차가 설치됐다. 매설된 수도관만 해도 30리에 이르렀는데 당시로서는 대단한 시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당초 송당목장의 규모에 대해서 상당히 혼선을 빚다가 1000정보(300만평)으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1000정보(300만평)에서 3000정보(900만평)까지 얘기가 나오다가 나중에는 녹산장(鹿山場. 지금의 제동목장 일대) 지역을 포함하여 5000정보까지 확장하자는 얘기까지 거론됐었다.

송당목장 일대는 옛날부터 마을공동목장으로 사용돼 오던 곳이었으며 공유지는 오름 하나 뿐이었고 대부분이 개인소유지였다. 정부는 목장내에 있는 개인소유지를 무상임대조건으로 확보하도록 제주도에 지시했다. 길성은 지사는 「정책사업」과 「지역발전」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지주들을 설득했다. 일부 지주 가운데는 무상임대에 반발, 토지임대를 거부했다.

길 지사는 공무원과 지역유지들을 동원, 거의 반강제적으로 부지를 확보했다. 조건은 무상임대했다가 임대기간이 지나면 계약을 갱신하여 임대료를 지불한다는 것이었으나 훗날 이 문제가 국회까지 비화되면서 2년 뒤부터 소액의 임대료가 지불됐다.
이 대통령 세 번째 방문, 간단히 얘기하겠다고 밝힌 후 40분 연설

1957년 11월9일 송당목장은 당초 계획했던 「국립제주도송당목장」에서 「국립제주목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목장 모습이 완연해지면서 소들이 속속 도입됐다. 그해 9월에는 면양과 산양 148마리가 들어왔고 12월3일에는 소 200마리가 도입됐다. 도입소들은 내병성(耐病性)이 강한 방목용이면서 체구가 큰 브라만이 대부분이었고 일부만이 개량사업용으로서 해리포드, 산타, 쇼터혼, 앵거스, 브라운스위스 등이었다. 송당목장의 사업비 1억5000만환 가운데 3000여만환이 목장시설비로 쓰여졌고 나머지는 소 구입에 들어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송당목장을 다시 찾은 것은 그해가 거의 저물어갈 무렵인 12월6일이었다. 이 대통령은 1956년 5월 목장개발후보지 답사차 밴플리트와 내도한 이후 목장관련한 순시로서는 세 번째였다. 이 대통령은 모슬포 비행장에 내린 뒤 송당목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 대통령은 특호 관사에 머물면서 목장일대를 샅샅이 살펴봤다. 이 대통령은 다음날 제주시로 옮긴 후 관덕정에 마련된 제주시민환영대회에서 모처럼 긴 말을 했다.

이 대통령은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싶으나 간단히 마음 속에 있는 얘기만 하고 끝내겠다"고 했다가 장장 40분간 연설을 했다.

"내가 처음 제주에 왔을 때 바로 이 자리에서 제주도의 모든 동포들이 도청과 시청과 합심해서 나를 환영해줄 적에 제주를 반드시 개발하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제주도를 잘 사는 지역으로 만들려는 것은 산과 바다에 많은 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많은 예산을 들여 미국의 기술과 원조를 받고 송당목장을 훌륭한 목장으로 만들기 위해 소와 염소 600마리를 들여오고 있다. 송당목장은 한국사람들에게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한미재단 밴플리트 고문이 이번 크리스마스 때에 와보겠다고 하니 그때도 성대히 환영해주길 바란다. 또 제주도에 금수강산을 만들어 세계 사람들이 구경 오도록 하자"

송당목장에 대한 李承晩 대통령의 관심은 각별했다. 송당목장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떠오를 정도로 애착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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