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교장이자 조카…남편 유지받든 장학재단 '취소' 위기

 

▲ 재일교포 노부부가 평생을 모은 재단으로 설립한 좌수단 문화재단이 재단이사장의 장학금 횡령으로 설립 12년만에 취소될 위기에 처해 있다.
재일교포 할머니 부부가 일본에서 평생 모은 재산으로 고향의 후학들을 위해 만든 장학재단이 이사장의 ‘횡령’으로 한순간에 산산조각 날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돈 없는 청소년들을 위한 종자돈인 장학기금 10억원을 횡령한 이사장은 다름 아닌 할머니 남편의 조카이자, 도내 두 군데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원로 교육자로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셈이 되고 말아 할머니와 가족들이 망연자실해 있다. 

지난 1994년 설립된 좌수반 문화재단. 좌수반문화재단은 재일교포 故 좌수반씨의 부인 김순자(90·일본 도쿄) 할머니가 10억원을 내놓으며 만들어졌다. 

▲ 좌수반문화재단 이사장은 설립자의 조카이이며, 도내 교육계 원로로 알려져 있다. 굳게 잠진 재단사무실.
이제는 고인이 돼 버린 좌수반씨는 고향인 애월(금성리)에서 국민학교를 마쳤으나 찌든 가난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독학으로 의사검정고시에 합격해 서울에서 활동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한국전쟁 무렵에 일본으로 건너가 근검절약하는 정신으로 재산을 모아왔다. 또 조천읍 신흥리가 고향인 할머니는 일본 동경대 사학부를 졸업했고 남편이 의사라는 직업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민족차별 속에서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차곡차곡 억척스럽게 돈을 저축해 왔다.

돈이 없어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남편의 한을 풀고, 가난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마련해 주기 위해 고향에 학교를 설립하는 게 이들 재일교포 부부의 소박한 꿈이었다.

남편인 故 좌수반씨가 머나먼 고향 일본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고향 제주에 있는 후진들을 양성하는 데 이바지 하고 싶다"는 유지를 받들어 김 할머니가 평생 모아온 10억원을 선뜻 내놓아 만든 게 지금의 '좌수반 문화재단'이다.

좌수반문화재단은 1994년부터 매해마다 40~60명 가량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전달, 그들이 가난 때문에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학업에 전념하기를 당부해 왔다. 지금까지 좌수반문화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공부해 온 학생만도 줄잡아 700여명에 6억여원이 지급됐다.  

김 할머니는 재단설립 당시에는 직접 이사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으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활동이 힘들어지자 지난 2000년에 평생 교육에 몸 받쳐 온 남편 조카에게 "재단을 잘 이끌어 달라"며 이사장직을 믿고 맡겼다.  

할머니의 뜻을 받든 새로운 이사장은 그러나 2002년 농협에 예치된 장학기금을 담보로 자신의 이름으로 4억원을 대출받아 개인적으로 사용해 버렸으며 1억2000만원은 자신의 빚을 갚는데 써버렸다. 

재단이사장의 파렴치한 범행이 확인된 것은 지난 1월초. 장학금 수여식 때마다 학생들의 숫자가 자꾸만 줄어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김 할머니와 할머니의 손자 좌모씨가 재단 통장을 확인하면서부터.

▲ 김순자 할머니는 남은 유산을 다 바쳐서라도 남편의 유지가 깃든 문화재단 취소만은 막으려고 해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한국로터리에 장학재단 1억원을 출연할 당시 모습.
할머니와 손자는 텅 빈 통장을 확인하고는 말할 수 없는 놀라움 속에 재단 이사장을 횡령혐의로 고소했고 경찰은 2개월간 수사를 벌여 그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업무상 배임, 사문서 위조)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법원은 그러나 이사장의 나이가 70세 이상되는 고령에다 구속되면 횡령한 돈을 갚기가 어렵다는 점을 들어 구속영장을 기각, 결국 불구속 입건됐다.

하지만 5억2000만원을 이사장이 횡령해 버린 후 통장에 남아 있어야 할 4억8000만원도 이미 사라져버린 상태로 좌수반문화재단은 이제 ‘설립 취소’라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공익법인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16조는 공익법인의 ‘목적달성이 불가능하게 된 때’를 설립취소 사유로 명시하고 있다. 장학기금이 없어져 버린 장학재단은 활동이 더 이상 불가능한 만큼 취소 사유가 된다는 게 도교육청의 입장이다. 현재 좌수반문화재단 사무실은 굳게 잠겨 있는 상태다.

▲ 좌수반문화재단은 횡령한 장학기금이 반환되지 않을 경우 도교육청으로부터 설립취소되게 된다.
교육청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이사장 자격을 조만간 취소할 것"이라며 " 좌수반문화재단은 이사장이 횡령한 금액을 변제할 경우 계속 유지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법인 취소까지 갈 수 있다"고 밝혔다.

좌씨의 범행이 알려지자 재단을 설립한 김 할머니는 "내가 남편과 평생을 걸려 모은 돈 10억원을 어떻게 교육계에서 수 십 년간 일했던 사람이, 그것도 어려운 학생들에게 돌아갈 장학금을 횡령할 수 있느냐"며 조카에 대한 극도의 배신감과 함께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할머니의 가족들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전 재산을 모은 돈을 횡령한 이사장의 만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며 "결국 피해는 모든 것을 믿고 이사장을 맡긴 할머니와 이제는 고인이 돼 버린 할아버지, 그리고 장학금을 받아야할 어려운 학생들만 받게 됐다"며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다.

또 “5억2000만원만을 횡령했다면 나머지 4억8000만원은 통장에 남아 있어야 하나 돈은 없고 이사장은 그 사용처를 밝히지 않고 있다”며 “구속영장은 기각됐지만 검찰에 추가 수사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좌씨의 횡령사건은 이를 확인한 교육계에도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재단 설립자의 조카 여부를 떠나 어떻게 교육계에서 한 평생 몸 받쳐 온 교육계의 원로를 자처하는 이사장이 장학재단의 기금을 횡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교육계 모 인사는 "수 십 년동안 교육계에서 일해 왔었고, 재단 이사장을 맡은 신분의 사람이 그와 같은 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돈이란 유혹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른 것 같아 교육계에 몸담아 있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한심하다"고 개탄했다.

김 할머니는 현재 동경에 있는 나머지 유산을 정리해서라도 좌수반 문화재단만은 다시 살리려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할머니의 손자인 좌씨는 “할머니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할아버지의 유지가 담긴 재단의 설립취소만은 막아보려 하고 있다”면서 “할머니께서 지난해 12월 제주에 오셨을 때 한국로타리재단에 ‘좌수반문화재단 관명장학금’이라는 이름으로 1억원을 기부하셨던 것도 결국은 할머니 사후에라도 할아버지의 유지가 계속되기를 염원하셨기 때문이었다”며 할머니의 심정을 대변했다.

김 할머니는 지금까지 고향 복지회관 건립기금으로 2억3000만원을 출연했고 도내 양로원과 불우이웃에게도 성금을 내놓은 등 근면과 박애정신을 보여와 지난 2001년에는 '만덕 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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