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세상 넓은 줄만 알고 자신이 딛고선 ‘땅의 깊이’를 모르는 것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

지난 번 제 ‘변변치 못한 글’(2015.08.11. “‘좁은 우물 안’에서도 삶의 여백 만들 수 있다면…”)에서 “비록 좁은 우물 안이지만 거기서 삶의 여백을 만들 수 있다면 세상 넓음을 부러워 할 바 아니다”라는 말을 했더니, 지인이 한 마디 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어디까지나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야”
 “무슨 말이야”
 “우물 안 개구리가 어리석은 것은 좁은 우물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지. 그런 좁은 시각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
 “그렇지”
 “좁은 우물 안에서 삶의 여백을 만들려면 우선 밖을 제대로 보는 시각부터 갖출 필요가 있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환상 없이 바라보는 통찰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한번쯤 우물을 벗어나는 모험도 감행해야 되지”

극히 사적인 대화 내용을 말머리로 잡는 게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한 마디 말에 담긴 의미를 풀어 놓기 위해섭니다.

‘우물 안 개구리’의 메시지

역시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자기 수준만큼 세상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앎에 한계가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건 편견을 부릅니다. 막무가내, 그런 편견 앞에선 논리적 정합성이나 합리적 계산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그리하여 현실은 늘 표피적이고 즉물적인 차원을 장악한 사람들에 의해 좌우됩니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이나 자기 집단의 이해가 그럴 듯한 명분으로 포장되고, 그것을 변명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논리와 언변을 동원하여 쇳소리를 내는 현장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불건전한 편견에 의해 추동되는 그 어떤 행동도 부작용 없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에 의한 탐욕과 공격성, 그리고 무지로 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이처럼 거칠어지고 있는 게 아닌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어쨌거나, 습속이나 이념장치를 뛰어넘어,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모든 관념의 사슬로부터의 자유와 해방!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익숙했던 그 ‘울타리’를 과감히 허물어야 하는…. 그게 『장자』의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르침임을, 제 비록 아둔하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긴, 때로는 원래의 맥락과 의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옛글을 읽는 재미도 있지만….

‘땅의 깊이’를 모르는 어리석음

그러나 ‘좁은 우물 안에서의 삶의 여백’은 그런 따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시선을 안으로 돌리려는, 제 딴에는 극히 소박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세상 넓은 줄만 알고, 자신이 딛고선 ‘땅의 깊이’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하찮다고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늘 밖을 쫓고, 그리하여 안으로는 조급하고…. 역설적이게도 그게 권력이 되어 지역사회를 흐트러놓습니다. ‘제주의 정체성’은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지역사회에 내재해 있는 자생력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의 편견보다 더 심한 편견이 이렇듯, 우리 지역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세상의 넓음을 떠든다고 해도, ‘우물 안 개구리’가 장소에 잡혀 있듯,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그게 항상 어깃장을 놓습니다. 스스로 잘못해 놓고, 안에 있는 지역주민들에게 책임이나 전가하고…. 어디 그 뿐입니까.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가 지배적 담론의 울안에서 다루어질 때, 공공연히 지역주민을 능멸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합니다. 세상은 저만치 가고 있는데, 자기주장을 하는 지역주민들이 그렇게 못마땅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막말이 될지 모르지만, 우물 밖을 모르는 개구리가 어리석다고 하여, 바다를 아는 자라가 현명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밖에 세상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개구리나 자라나 마찬가집니다. 요컨대 이 말이 하고 싶습니다. “세상 넓은 줄만 알고 자신이 딛고선 ‘땅의 깊이’를 모르는 것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라는 것!!”

공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

제가 새삼스럽게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를 들어 자신이 딛고선 ‘땅의 깊이’를 다시금 확인하는 의미는 자명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제주 땅’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과 함께, 자연의 유기적인 체계 내에서 우리가 딛고 설 자리를 재확인하기 위해섭니다. 더러는 이야기가 뜬구름 잡는 것 같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가 비록 뒤죽박죽일지라도 그 줄기는 하나로 이어집니다. 바로 ‘공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 그리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그리고 우리의 미래세대가 살아갈 이 ‘제주의 땅’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함부로 하면, 지역생태계의 지속력은 사라지고 맙니다. 생태계가 파괴되면, 그만큼 현재의 삶이 거칠어지고, 미래도 없습니다. 현재의 개발전략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비전도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세대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큰일입니다. 여기저기 육중한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대규모 개발로 중산간이 마구 파헤쳐지고…. 땅위의 하중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자연이 날로 수척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쩌면 우리의 미래세대는 지금 우리가 쓰다버린 개발의 파편을 줍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게 될지 모릅니다.

장소에 대한 감수성

지금 논의되고 있는 우리의 미래비전이 ‘청정’이든, ‘공존’이든, 그것은 ‘사람과 공간이 하나가 되는 지역사회’이어야 합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고 있든, 제주가 좋아 밖에서 들어왔든, 이 제주에 정착하여 생활하면서, 나와 생태계 사이의 보편적 관계성을 자각하고, ‘제주사람’의 일원이 되어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땅에 책임을 지는 것! 그리하여 미래의 가치를 공유하고자 하는…. 그래 그렇습니다. 그걸 위해서는 자신이 딛고선 ‘땅의 깊이’를 올바르게 자각하는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서양의 한 생태시인은 그걸 ‘장소의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넓은 줄만 알고, 눈을 밖으로만 돌리는 ‘떠돌이 심성’을 버리고, 땅에 제대로 정착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건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건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늘 여기 있으면서도,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 저 제주의 하늘과 바람, 그리고 우리의 생명의 원천 지하수, 거기 있어서 힘과 위로가 되는 저 빛나는 한라산과, 저 노루와 꿩 등, 심지어 재선충병에 시달리고 있는 소나무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있으면서 우리를 존재케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천둥 속에 먹구름이 울던 모든 사건’들을 잊지 않고, 그것이 ‘지금 여기’에 던지는 의미를 올바르게 자각하는 것도 모두가 그것에 포함됩니다.

자연과 이웃에 대한 책임

혹 이야기를 괜스레 에두른다는 핀잔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현재의 개발전략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논의도 자연과, 그곳에 터 잡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성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물론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다시 짜는 어려운 일입니다. 개발의 템보를 조절하고, ‘대규모 개발’에 저항하고, 지역의 자생력을 키워 미래세대에 희망을 주는 것…. 그리하여 비록 좁은 땅덩어리지만, 이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터전으로 하여 ‘스스로 결정하는 힘을 가진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게 어설프지만,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좁은 우물 안의 삶의 여백’의 줄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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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가치 있는 것이 꼭 바깥에, 저쪽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를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의 힘과 가치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땅의 깊이’를 다시금 확인하고, 우리를 존재케 하는 모든 것들에 감사할 때, 그리하여 빚을 갚는 심정으로 ‘이 아름다운 제주’를 지키는 자세를 새롭게 할 때, 비로소 세상은 달라집니다. 이게 바로 ‘지인의 한 마디’에 대한 저의 초라한 응답입니다.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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