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군의 일원, 일사(一死)로써 책무 완수”
“황군의 일원, 일사(一死)로써 책무 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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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의 4·3칼럼> (52) 국군 최초로 별을 단 친일군 출신 육군참모총장 이응준  

이응준, 친일에 앞장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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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응준.
‘광복 후 혼란기에 국군창설의 대임을 맡았던 秋硏 李應俊옹은 평생을 군인정신으로 살아간 대한민국의 최초의 武人이었다. 8일밤 李옹의 빈소를 지켰던 李亨根 劉栽興 白善燁 金貞烈씨 등 원로 퇴역장군들은 한결같이 “고인은 일생생활을 통해 몸소 군인의 길을 실천하신 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1890년 平南安州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李옹은 16세때 상경, 대한제국 육군참령(소령)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인 秋汀 李甲 선생집에 기식하며 보성중학 1기생으로 입학했다. 그 뒤 秋汀선생의 사위가 됐다. 李옹은 그 뒤 한말의 사관학교격인 무관학교에 들어가 1년간 다니던 중 무관학교가 강제해산 당하자 동기생들과 함께 일본육사(26기)에 들어가 1914년에 임관했다.

일본군 대좌(대령)까지 진급한 李옹은 광복후 미군정당국의 군사고문으로 초빙돼 국군의 모태인 국방경비대 창설의 산파역을 맡았다. 48년 11월 정부가 수립된 직후 李承晩 대통령에 의해 대령으로 임관된 동시에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열흘 뒤에는 국군최초로 별을 달아 장군이 됐다. 6·25때는 5사단장으로 공비토벌작전에 전념한 李옹은 잠시 군문을 떠났다가 52년 4월 현역에 복귀, 그해 가을에는 중장에 진급, 육대총장 육군참모차장 등을 거쳐 55년 9월 예편했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李옹은 평소 꼬박꼬박 적은 일기를 바탕으로 90세때에는 『回顧 90年』이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말년에는 매일 새벽 盤浦洞 뒷산에 올라 산책을 생활화했던 李옹은 병상에 눕게 된 작년말까지 16세때부터 써온 일기를 거르지 않았다는 것. 부인 李正熙 여사(88)는 장인 秋汀선생의 외동딸. 군인의 딸을 아내로 맞았던 李옹은 딸도 군인에게 시집을 보내 군번 1번 李亨根 대장이 사위. 장인 秋汀이 일본육사15기, 李옹이 26기, 사위 李 대장이 56기로 「군인의 길」을 3대가 이어진 셈이다. 李옹은 체신부장관(55~58) 반공연맹이사장(67~72) 국정자문위원(80년) 등을 역임했고 83년 3월에는 仁村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藏炳守 기자)’-東亞日報 1985.7.9    

이응준(李應俊, 일본식 이름: 香山武俊, 1890년∼1985년)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이다.  1906년 서울 보성중학교와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1909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4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제26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직후 제1사단 제3연대에 배속받은 뒤, 1916년 치바(千葉)보병학교에서 3개월간 보병 전문교육을 받은 뒤 육군 중위로 진급했다. 1918년 8월 열강들이 러시아혁명에 간섭하기 위하여 일으킨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일본이 가담하자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었다. 주요 임무는 한국인들을 이용한 대민 정탐 활동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육사 제26기 동기생인 김광서· 지청천 등과 함께 일본군적을 버리고 중국으로 탈출할 것을 모의했다. 김광서와 지청천은 탈출했으나 이응준은 실행하지 않았다. 1920년 4월 조선군사령관인 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郞) 육군대장의 배려로 용산주둔 조선군 제20사단 제40여단 제79연대로 배속되었다. 1925년 대위로 진급하였으며 대대부관을 거쳐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5월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북벌군을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이 ‘제남(濟南)사건’을 일으켰을 때 펑텐에 파견되었다. 1933년 조선군 제20시단 제79연대 부관으로, 1934년 8월 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대대장으로 근무했다. 1935년 훈4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1936년 중일 전쟁 직전까지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약학전문학교에서 배속 장교로 근무했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사단사령부와 북지파견군 사령부 등에서 근무했다. 1938년 1월 중국 베이징(北京)에 주둔한 일본군 북지파견군(北支派遣軍)사령부에 근무하면서 베이징 부근에서 벌어진 남원(南苑)전투에 참전했다. 선무공작을 맡아 ‘대동아건설 정신’을 중국인들에게 계몽시키는 업무에 종사했다. 1939년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0년 8월부터 1942년까지 조선군 대구사령부에서 근무했으며, 1941년 육군대좌로 승진했다. 1943년 독립7여단 토벌부대의 지휘관을 맡아 팔로군 진압박전에 종사했다. 1944년 서울 용산정차장사령부 사령관에 전임되었고, 1945년 6월 원산항 수송부로 배속되어 군수물자 수송 업무를 관장하다가 일본의 패망을 맞이했다. 소련군이 진주하기 직전 탈출하여 서울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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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영어학교.
일본군 장교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한편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군인이 되어 전쟁터에 나가서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선동했다. 1943년 8월 3일자 『매일신보』에 생사를 「초월하라!」는 제목의 회견기에서 “금회 조선에 징병제 실시에 의하여 조선 청년에게도 국가 방위의 숭고한 병역의무가 부여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상(無上)의 광영이며 명예이다....... 이 비상시국에 있어서 국가 방위의 최고 책무를 분담하게 될 것은 진실로 감사· 감격에 이기지 못하는 터로 조선 청년인 자는 크게 감분(感奮)하여 흥기(興起)해야 하겠다. 그리고 촌각이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은 명예가 있는 곳에 반드시 책임이 가중하다는 것이다. 대원수 폐하의 수족으로서 황군의 일원으로 일사(一死)로써 그 책무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를 완수하는 길인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하는 것을 환영했다. 

1943년 11월 9일 경성 부민관에서 매일신보사 주최로 군인 선배 강연회가 열렸을 때는 ‘특별지원병제는 반도 민중의 활로, 학도의 중대 책임을 각오하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국민으로서 가장 중요하고 큰 의무인 혈세(血稅)를 바치라”면서 청년학생들에게 학도지원병으로 전쟁에 참전할 것을 독려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월남해 1945년 11월 전국조선인시국사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국방사령관 고문을 지내며 ‘건군(建軍)’ 사업에 핵심으로 종사하면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출신들이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는 일을 후원했다. 일본군 시절 자신을 측근에서 보좌하고 후에 사위가 된 이형근을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 Military Language School)에 입교시켜 남조선경비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임명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방경비대총사령부 감찰관과 국방경비대 제3여단장을 거쳐 정부 수립 후 초대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새 국방사령관 참페니(Arthur S. Champeny)대령은 국방사령부 고문인 이응준과 함께 뱀부계획(Bamboo Plan)을 수립, 군대의 창설안을 입안하였다. 뱀부계획에 따라 1946년 1월 11일 조선경비대총사령부가 설치되었으며, 1월 15일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다.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태릉 주둔 제1연대를 시작으로 8개 연대가 2월 말까지 창설되었고, 제주도가 전라남도와 분리되자 11월 16일 제주도에서 제9연대가 창설되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맡았고, 1950년 4월 22일 제5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수원지구방위사령관 등으로 참전하였다. 이후 전라남도편성관구사령관, 마산지구계엄사령관, 제주지구게엄사령관, 전라남도계엄민사부장 등을 지냈다. 

1952년 육군대학 총장으로 재임 중에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1985년에 사망했다. 향년 96세였다. 2008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군인 부문에도 들어 있다.

‘계엄실시에 관한 포고(제10호) 1. 어업특허에 관하여 (1) 1950년 9월 20일 부로 어업에 관한 전 계엄사령관의 포고 제8호는 차(此)를 취소하고 출어구역 및 출어시간 등을 확대 완화하기로 한다. (2) 각 출어지원자는 소관 경찰서(지서)에 수속하여 차를 실시한다. (3) 출어에 관한 제반 규정은 차를 엄수할 것이며 위반자는 의법 처단할 것이다. 1950년 9월 20일/제주도지구계엄경비사령관 육군 소장 이응준’-제주신보 1950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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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조선 국방경비대.
친일군 장교가 토벌작전 감행

‘태평양의 물결 위/ 오르는 아침 해에 빛나/ 하늘 우뚝 솟는 후지 봉우리의/ 영구히 흔들리지 않는 日本國/ 귀관의 순과 선택/ 모여 배우는 몸의 실천이오’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가 

이승만 박사는 현 세기가 낳은 한국 최대의 정치가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제1급의 애국자이자 혁명자, 지도자인 것이다. -李應俊, '回顧 90年'(汕耘기념사업회, 1982) 중에서 

‘조선경비대의 비약적 발전의 일단으로 거반에 재남조선(在南朝鮮) 9개 연대의 통솔기관으로서 중앙에 여단이 편성되었다함은 세인이 주지하는바, 그와 동시에 초대 여단장에 취임한 이응준(李應俊․일본육사 출신)대령이 금반 군사상 요충인 본도의 지형, 민정, 풍습 등과 아울러 재(在)본도 제9연대의 현지시찰차 내도하게 되었다 하는데 동 여단장 일행은 래(來) 13일 오전에 해안경비대 경비선으로 입도하여 4일간에 긍(亘)하여 전기 제반실정을 시찰하고 17일 이도하리라는 바 동 여단장 내도에 제(際)하여 제9연대에서는 이를 계기로 군관민 일치협력으로 기탄없는 제휴의 원호를 바라며 환영에 유루(遺漏)없기를 일반에 요망하고 있다.’-제주신보 1948년 1월 12일

일제시대 이응준은 조선 청년들에게 일제의 간성이 되는 기쁨에 분기(奮起)하여 보국의 정성을 다할 것을 설득하였다. 초기 육군참모총장들도 일본 육사 출신이 많았다. 육군참모총장인 이응준(26기), 채병덕(49기), 신태영(26기), 정일권(55기 상당[2]), 이종찬(49기), 이형근(56기)이 일본 육사 출신이다. 백선엽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이다. 이응준은 일본 육군 대좌, 채병덕과 신태영, 이종찬은 중좌 출신이며 정일권은 만주군 대위 출신이다.  초대 공군참모총장인 김정렬이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 출신이다. 

‘【광주】제주도 시찰을 마치고 17일 광주 비행장에 내린 육군총참모장 이응준(李應俊) 소장은 제5사단장실에서 기자와 회견하고 대요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하였다. (문) 국군도 월북하는 적극적 행동을 취할 것인가? (답) 우리는 정당방위의 행동으로써 월남해 오면 이에 대항할 따름이다. 밀고 들어갈 생각은 없다. UN을 도와 평화리에 남북을 통일함이 우리의 염원이다. (문) 인민군은 앞으로도 자주 내습할 것으로 보는가? (답)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경전을 속행할 것은 사실이다. (문) 제주도 시찰 소감은 어떤가? (답) 아직도 무장폭도가 준동하고 있는데 오는 3월까지는 적극적인 토벌과 병행하여 선무공작을 전개할 것이다. (문) 전남사태 수습에 대한 방침은? (답) 장기적인 폭동사건은 호남지방의 불이 아닐 수 없다. 무식한 백성으로서 폭동에 가담한 자라도 전비를 뉘우치는 경우에는 포섭할 방침이다. 듣지 않는 무리들에게는 강력한 방침을 계속 발동하는 방침엔 변함이 없다. (같은 기사 독립신문 49. 2. 23)’- 대동신문 1949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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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영어학교 훈련모습.

‘제주도와 호남지방의 폭도 토벌작전 강행에 관하여 국방부 육군본부 총참모장 이응준 소장은 14일 국방부 보도과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제주도와 호남지방의 패잔 폭도들은 아직도 각처에 출몰하여 살인 방화 약탈 등의 만행을 하고 있으므로 이 지방민들은 도탄에 빠져 있다. 이에 대하여 대통령 각하의 우려는 물론이거니와 군 당국으로서는 크게 근심하는 바 있어 최근 이 지방에 간부진영을 강화하여 일대 소탕작전을 개시하고 있다. 금일까지 아직 전멸시키지 못한 것은 소수의 폭도는 소위 게릴라 전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적진아퇴 적퇴아진(敵進我退 敵退我進), 적주아교 적피아타(敵駐我攪 敵避我打)’의 16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국군부대가 나아가면 적은 삼삼오오 흩어져 무기를 감추고 양민으로 가장하여 우리가 소부대로 분산하면 적은 한곳에 집중하여 군대를 피하며 경찰과 촌락을 습격하는 집산이합(集散離合)의 비상전법을 쓰고 있다. 폭도 소탕에 있어 첫째는 일반이 절대로 협력하여 폭도의 행동을 빨리 군경에 보고하는 동시에 군의 행동을 절대로 폭도에게 알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폭도에게 식량의 보급 등 편의를 주지 말 것이고 군 장병의 비행을 엄금할 것은 물론이며 일반 행정관청과 민족진영의 민중조직과 계몽운동을 비롯하여 선무공작, 이재민 구호사업과 후생대책 등이 긴급하니 이 작전지구의 관공리는 이상 요건에 절대 협력하여 주기 바란다.”‘-경향신문 1949년 3월 15일

‘육군본부 총참모장 이응준(李應俊)소장은 폭도진압 상태 등에 관하여 18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주도는 거의 완전 소탕되었다. 그 외는 지리산지구 뿐만 아니라 남한 일대에 산재한 폭도는 신록이 무성하기 전을 앞두고 완전 섬멸될 것이다. 거제도 지구에 약 40명의 무장폭도와 일반폭도가 출몰하였으나 완전 격멸하였으며 미연에 긴급사태를 방지하였다. 그리고 군인의 비행에 관하여서는 엄중 처단하겠으며 일반도 구체적 사실을 알면 구체적인 서면으로 군당국에 보고하기를 바란다.”’-경향신문 1949년 4월 19일

이응준은 언론이 통제된 고립무원의 섬이라는 점도 거리낌 없이 무차별 학살을 하는 데 한몫 했다. 이승만은 초토화작전을 감행했다. 이응준은 그의 자서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제주도 공비토벌이 시일을 끌게 되어 대통령 이 박사의 독촉을 받은 일도 있었다. 공비토벌작전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보고는 관두고 공비가 없어졌다는 보고가 듣고 싶다는 것이다’- 李應俊, '回顧 90年'(汕耘기념사업회, 1982), 270쪽

‘작 4일 이응준 소장 및 장두권(張斗權) 대령이 공로로 내도하여 작 6일 제5훈련소장, 청방(靑防)단장과 같이 도 일주 시찰차 출발하였는데 김병휘(金炳徽) 중령은 동행에 앞서 본도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응준 소장은 제주도경비사령관 겸 계엄사령관으로 부임하였으며 동 부사령관은 장두권 대령이다. 나는 계엄사령관 대행직을 벗어나 제5훈련소장의 임무만을 담당할 것이다. 이응준 각하는 내가 경비대 시대부터 제1여단장으로 모시고 있었던 사이며 사건 후에도 계속하여 그 휘하로서 근무하였다. 동 사령관을 맞이함에 충심으로 환영하는 바이며 도민의 많은 협조가 있기를 희망한다. 각하는 양병제일주의이며 민폐를 일소하며 국민을 위한 군대와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군 방침을 가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그것은 동 각하가 총참모장 시대의 사병훈으로 미루어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접촉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품이 온화하고 부하를 지극히 사랑하며 도민의 기대에 충분할 것이다. (이응준 소장 약력 생략)’-제주신보 1950년 9월 7일

‘강병대(强兵台) 제10대 소장 오덕준(吳德俊)소장 후임으로 이응준(李應俊) 중장이 6월 15일부로 임명되었다. 이(李)중장은 본도 지구 계엄사령관으로서 다대한 공적이 있으며 본도와 인연이 깊은 장군으로서 육군대학 총장으로 재임하다 지난 5월 도미(渡美), 6월 13일에 귀국하였는데 근일내 부임하리라 한다.’-제주신보 1953년 6월 22일

‘육군 제1훈련소장 이응준(李應俊) 중장은 14일 동소 미수석고문관 ‘이스터 부르크’ 대령 및 차석고문 등과 동도(同途) 내읍(來邑) 매일시장의 화재현장을 시찰하는 한편 수용소의 이재민들을 위문하고 이재민구호본부에 천막 30매를 기증하였다.’-제주신보 1954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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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모슬포 육군제1훈련소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8호

‘1949년 4월 18일자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8호>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육군본부 총참모장 이응준 소장의 명의로 발령된 이 문건은 숙군 때 군사재판에서 1심 판결을 받은 사람 가운데 이른바 '지휘관 확인', 즉 재심을 거쳐 형량이 재조정된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정희도 이 가운데 포함돼 있다.’-오마이뉴스<정운현기자> 2004.8.10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8호>는 이응준 소장의 명의로 발령되었다. 박정희는 1948년 11월 11일경 수사당국에 체포되었다. 1949년 2월 8일 용산 육군본부 법정에서 박정희 등 69명이 재판을 받았다. 죄과는 국방경비법 16조 위반, 즉 '반란기도죄'였다. 범죄사실로는 '전 피고인은 단기 4279년(1946년) 7월경부터 4281년(1948년) 11월경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 서울 기타 등지에서 각각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반대하는 반란을 기도'하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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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제1중대장 시절의 박정희 대위.
박정희는 유일하게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으나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당시 '확인장관'은 이응준 총참모장이다. 박정희는 이후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의 배려로 육본 정보국에서 무급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6.25 발발 5일 뒤인 6월 30일자로 현역에 복귀했다. 박정희는 이로써 '좌익 악령'을 공식적으로는 떨치게 되었다. 박정희는  확인과정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고 동시에 형의 집행을 면제받은 것이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육사에 편입하였다. 일본육사 생활은 모범적이었고, 육사 교장은 "다가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고 까지 말하였다.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중국의 열하성 흥륭현 삼도하의 만주군 제5관구 보병 제8단에서 근무하였다.  일제가 항일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든 특수부대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고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로 다시 군문에 들어섰다. 1947년 9월 27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이었고, 10월 23일에 입교한 육사 5기생들을 가르쳤다. 육사 5기는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모집하였고, 이들 중 2/3가 이북 출신들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 파병에 반대한 여수 제14연대의 저항이 일어났다. 여순반란사건이다. 군은 경찰을 대신하여 제주도와 여순사건의 토벌작전과 부역자 색출작업, 빨치산 토벌에 투입되었다. 군은 해당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권한을 행사하며 작전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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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는 '확인장관' 등의 선처 끝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박정희 등 69명에게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를 명한 육군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8호) 사본. 붉은선 부분이 박정희 관련내용임.

박진경 암살사건 공판  

‘제주도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범에 대한 군법회의는 9일 오전에 이어 오후 1시 30분부터 속개되었다. 이지형 검사로부터 사건 총지휘자 김달삼과 두 번이나 만난 문상길(23) 중위와 저격범 손선호(23) 하사와 이를 도와준 배경용(19) 외 4명에 관한 청취서류의 낭독으로 이날의 공판을 끝마쳤다. 그리고 제2일인 10일에는 오전 9시 30분부터 이응준(李應俊) 대령 재판장으로부터 사실심리가 있었는데 이날 변호인측은 전일 검사가 낭독한 조서는 고문에 의한 진술이라는 반박 변론이 있은 후 증인심문으로 들어가 당시 제주도 군기대장 이풍우(李豊雨) 중위와 5명에 대한 증인심문이 있었으나 고문에 관한 증언을 거부하였으므로 변호인측은 이번 재판은 법정중심이 아니라 검사중심이었다는 이의를 제출하고 오전 11시 30분 휴정하였다.’-경향신문 1948년 8월 11일

‘박(朴)대령 암살사건 제6회 공판은 14일 오전 10시부터 속개되었는데 이날 전 피고 8인 중 황주복(黃柱福․24)과 김정도(金正道․25)에 대하여는 사실심문에 있어서 증거 불충분과 기소이유 불명확으로 재판장 이응준 대령으로부터 무죄석방의 언도가 있었고, 잠시 휴정하여 심판관 전원의 판정평의(判定評議)와 판결평의(判決評議)가 있은 다음 11시 20분 문상길(23) 중위 및 신상우(20), 손선호(23․저격범), 배경용(19) 등에 대하여 총살형에, 양회천(梁會千․25)은 일체의 급료 몰수와 무기징역, 강승규(姜承珪․22)에 대하여는 급료 몰수와 5년 징역에 처한다는 판결을 각각 내리고 11시 30분 박대령 암살사건 고등군법회의는 끝마쳤다.’-경향신문 1948년 8월 15일

‘제주도 폭동진압 총지휘관인 경비대 육군대령 박진경씨를 살해한 육군중위 문길 등의 군법재판은 지난 8월 13일 검찰관 이지형 중령 입회 아래 육군고등법정에서 재판장 이응준 대령으로부터 전기 문중위 등 4명에게 사형언도가 있었는데 드디어 그들 4명의 총살형은 23일 하오 3시 시외 수색(水色) 모 산록에서 집행하기로 되었다는데 총살형에 처할 범인들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문상길(육군중위), 신상우(11연대 군기대장), 손선호(하사), 배경용(하사)’-국제신문 1948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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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모슬포 육군제1훈련소 면회실을 찾아 몰려든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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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 대령 암살사건에 대한 군법회의는 1948년 8월 8일부터 경비대 군기대사령부(지금의 남산도서관 자리)에서 열렸다. 재판장은 이응준(李應俊) 대령이 맡았고 법무사 김완룡(金完龍) 소령, 검찰관 이지형(李智衡) 중령이 입회했다. 관선 변호사로는 김흥수(金興洙) 소령이, 민선 변호사로는 김양(金養) 변호사가 출정했다. 이 군법회의는 연일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 재판정에는 참고인 자격으로 김익렬 중령과 문상길 중위의 애인인 고양숙도 출석, 눈길을 끌었다. 검찰관이 밝힌 기소이유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문상길 중위는 4월 20일경 동 연대 근무 고승옥(高承玉)의 연락으로 제주도 폭도대대장 김달삼과 만나 경비대원 40명을 도주케 하고, 5월 중순에는 제2차로 박 대령을 살해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6월 17일 밤 박 대령이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한 것을 축하하고자 제주 읍내 옥성정이라는 요릿집에서 잔치를 벌였을 때 죽이려다가, 술이 취하여 잠든 그를 동 18일 새벽에 같은 대원 손선호는 사수가 되고 배경용은 전지를 켜 들고 신상우·강자규·양회천 등은 현장 주위를 지키는 가운데 거침없이 박 대령을 향하여 M-1 라이플 총알을 발사하여, 그는 마침내 28세를 일기로 하여 대령으로 승진한 지 몇 날 안되어 젊은 아내를 서울에 두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하수한 문 중위 이하는 법의 심리를 받게 된 것이다.......’ / 김관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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