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찾아 가을의 절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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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쉼] 가을, 나를 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 더 살찔까봐 종종거리는 말띠 아줌마가 나다.
가을 낙엽 굴러가는 소리만 봐도 깔깔 거리던 시절(내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관용적 표현이라 보면 된다)을 거쳐 치열하게 우울하고 치열하게 열정적이었던 젊은 날을 지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나이 언저리를 살아가는 중년의 여인.

공부로 시를 접하던 시절, 시험 출제 빈도수가 높아 반드시 암기해야 하고 모든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시중의 하나가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였다. 서정주는 가을 국화꽃을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노래했다. 왜 ‘먼 젊음’이라 하지 않고 ‘머언먼 젊음’이라고 썼는 가등을 밑줄 긋고 외우던 시절에는 몰랐던 이 서늘한 느낌!

(머언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이제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시를 보니, 이 가을에 정말 국화 향 맡으며 거울 건너편의 나를 보고 싶다. 그래서 거창하게 시적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거울 속의 진짜 나를 바라본다.

지난여름 끝자락, 친구들에게 호언장담했다.
“이젠 외모도 좀 신경 써야 되크라(되겠다). 얼굴 점도 없애고 살도 빼야지. 이제까지 안 해본 것들을 해봐도 좋을 것 닮아.”
내 말을 귀담아 들었던 한 친구가 얼른 피부 미용 예약을 해버렸고(나의 호언장담이 속빈 강정임을 파악한 무서운 친구다) 난 얼떨결에 아름다워지는 길에 한 발 내딛게 됐다. 일정 진행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진행됐다.

피부가 이지경이 되도록 뭐했냐는 피부 관리 선생님의 엄중한 질문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로 답을 회피하며 얼굴의 점과 잡티를 제거하는 것이 속전속결되었다. 문제는 그 후였다. 아, 비교적 상식이 풍부하다고 자부하던 내가 정말 몰랐었던 것은 ‘지속적인 피부 관리의 중요성’ 이었다. 점과 잡티가 사라진 피부를 관리하기 위해 당분간은 매일 매일 여러 종류의 화장품을 순서대로 얼굴에 발라주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난 요즘 매일 거울 앞에서 날로 경쾌해지는 손놀림으로 토닥토닥 얼굴에 ‘수분과 영양’을 공급해주고 있다.

보다 효율적인 수분 영양 공급을 위해 난 요 한 달간 손거울을 끼고 살고 있다. 조금 과장하면 최근 한 달 거울을 본 횟수가 지난날 거울을 본 횟수보다 많을 것 같기도 하다. 얼떨결에 이렇게 자주 보게 된 거울 건너편의 내 모습은 미치도록 낯설고 어색했다. 자세히 들여다본 내 얼굴의 눈 코 입. 아 저게 내 얼굴이구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나이가 되어 거울을 보니, 지난 시절의 모습들이 흐르듯 스쳐 지나간다. 우리 엄마의 증언에 의하면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학교 가면 말 한마디 못하던 수줍고 조용한 아이였다. 그러다 여차 저차한 일로 난 조금씩 내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가 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야무지다’는 말도 듣게 됐다. 대학 졸업 후 고향에 내려와 가진 첫 직장에서 나는 강인하고 일 잘하는 여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때까지 나는 ‘나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바라고 많은 사람들이 정답이라고 정해놓은 ‘멋진 삶’을 그저 따라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것은 옳고 그른 문제도 아니고 좋고 나쁜 문제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를 넘어설 즈음 난 ‘멋진 삶’을 따라가기 위한 노력을 그만 두었다. 조금씩 삶의 지혜를 얻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삶’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 세월이 흐르니 ‘멋진 삶’을 갈구했던 시절이나 ‘나의 삶’을 찾던 시절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냥 오늘의 내가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 동동거리며 먼 길을 걸었으나 결국 도착한 것은 출발점인 것 같은 느낌. 출발했던 자리와 돌아온 자리는 같으나 거기 서있는 나는 결코 같지 않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진짜 같은 가짜를 찾아내는 일도 조금 수월해졌다. 그러면서 오랜 세월 밑에 깔려있어 미처 몰랐거나, 혹은 모른 척 했던 나의 낯선 모습들을 낯설지 않게 바라보게 되었다. 좋은 일이다.

어찌되었든 가을이다. 어제 오늘 내린 비는 뜨거운 여름에 대한 기억을 싹 씻어버렸다. 이 비 그치면 정말 선선한 가을 날씨가 우리를 맞을 것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바람의 맛은 달고, 예쁜 가을꽃들이  여기저기서 자태를 뽐내는 가을의 절정을 좀 즐겨야겠다.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다시 거울을 본다. 처음 미치도록 낯설고 어색했던 거울 속의 내 모습 보기도 이젠 많이 편안해졌다. 이제 그 편안한 마음과 함께 가을의 절정으로 걸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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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섬(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제주의소리
뱀의 발: 피부 관리 후 가족들에게 각자 의견을 제시하라 했다.
요즘 부쩍 ‘뷰티’에 눈을 뜬 중2 딸은 “많이 좋아젼. 관리 잘해”라고 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한 것이 분명한 남편은 “예뻐져신게”라고 했다.
가장 얼굴 보기 힘든 고2 아들은 “뭐 핸? 잘 모르커라”하고 그냥 제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날 아침 아들은 평소의 두 배가 넘는 나의 잔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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