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10주년, 그리고 귀천 32주기. 제주 근현대 문화예술계의 큰 산 ‘청탄 김광추(聽灘 金光秋, 1905~1983)’ 선생이 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서귀포시 소암기념관이 10월3일부터 11월29일까지 ‘청탄 김광추 - 탄향유구(灘響悠久)’ 기획전을 마련했다. 제주 예술사에 있어서 ‘산북의 청탄, 산남의 소암’으로 회자될 만큼 청탄 김광추 선생은 소암 현중화 선생과 함께 근현대 제주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어른’이다. 이번 기획전 도록에 실린 청탄 선생의 소평전을 소암기념관(명예관장 현영모)과 필자인 언론인 김종민 씨의 동의를 얻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2차례 씩 연재한다. 빛나는 가을 이 계절에, 삶을 예술처럼 살다간 어른 ‘청탄’ 선생의 깊은 울림과 청아한 향기를 느껴 보시기 바란다. ※표시된 각주 내용은 원고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달았다. [편집자] 

▶ 글 싣는 순서 

①탄생에서 서울유학까지

②일본유학~베일에 가린 일본 체류

④대표 예술 없는 종합예술인

⑤삶을 예술처럼, 예술을 삶처럼

⑥어진이, “그믐달 지듯 깨끗이 살고파”

[청탄 김광추 소평전]③해방과 시련…제주도의원 당선 / 김종민 언론인

<2편에 이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갑자기 찾아온 해방은 우리민족의 큰 기쁨이었지만,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과 북이 각각 분할 점령됨에 따라 남북이 타의에 의해 강제로 분단되었다.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했는데,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관리와 경찰을 그대로 등용했다. 해방 직후 납작 엎드려 기회를 살피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미·소간 냉전이 본격화되자 ‘반공’을 부르짖으며 부활을 꾀했다. 일제 고등계 형사가 독립운동가를 잡아다 고문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해방 후 혼란스런 시절이었지만, 여러 동생을 둔 김광추는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비록 분단이 되었어도 6·25전쟁 전에는 남과 북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하던 시절이 있었다. 작은 상선을 갖고 있던 김광추의 집안에서는 제주와 이북 청진항을 잇는 바닷길을 오가며 상업을 하고 있었다. 해방 전부터 쭉 해오던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김광추의 동생이 화북마을 주민들을 포함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상선에 짐을 싣고 청진항으로 향했는데 갑자기 배가 실종됐다. 풍랑으로 배가 침몰한 건지, 해적을 만난 건지, 이북에서 배를 빼앗긴 채 몰살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젠간 돌아오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배를 타고 떠난 동생과 화북마을 주민들은 지금까지도 소식이 없다. 이 사건으로 김광추의 부친이 얼마나 노심초사 했으며, 장남인 김광추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는 미루어 짐작된다. 

그러나 동생의 실종 사건은 시련의 시작에 불과했다. 미군정 시절인 1948년 4월 3일, 이른바 ‘제주4·3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제주도민의 1/9~1/10가량의 목숨을 앗아간 4·3의 광풍은 김광추의 집안도 피해가지 않았다.

가뜩이나 김광추는 일제 때 김문준의 유해 봉환에 앞장섰던 일 등과 관련해 군·경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군·경에 끌려가 죽을 위기에 놓였던 김광추가 광주로 피신하게 된 경위에 대해 그의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4·3사건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김문준 선생 유해 봉환과 관련된 일 때문에 아주 심한 곤경에 처하셨죠. 이때 할아버지가 나서고 신두방 선생의 도움으로 광주로 피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배경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의 하나는 아버지가, 앞에서 말했듯이, 사회주의자인 김문준 선생의 유해를 고향에 모시고 와서 장례를 지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화북독서회사건에 깊이 연루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어머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화북집 마루 아래에는 아버지가 보던 사상서가 있다고요. 그런데 아직까지 난 그걸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그걸 꺼내 보면 뭘 합니까. 4·3사건 때에는 경찰이 우리집에 들이닥쳐 아버지가 보던 책들을 압수해 갔던 기억도 납니다. 

아무튼 둘 다 사회주의 사상과 관련이 있는 일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버지는 광주에 계시다가 6·25가 발발한 1950년 가을에 다시 도일하십니다.”※16

김광추는 광주에 있는 동안 허백련, 허건, 천경자 등 문화예술인들과 교유하면서 세상이 진정되기만을 기다렸다.

1948년 11월 이른바 ‘초토화작전’으로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불타고, 남녀노소 가림 없이 무참하게 희생되던 광풍이 한 차례 스치고 지나간 후, 김광추는 피신지 광주에서 천자문(千字文)을 쓰고 있었다. 훗날 김광추는 주로 흘려 쓴 글씨, 즉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썼지 또박또박 정서한 해서(楷書)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런데 김광추의 유품 ｢천자문｣은 해서체로 정성스레 쓰여 있다. 천자문 책자 끝에는  ‘기축년 4월’이라고 적혀 있다. ‘기축년’은 1949년이다.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려 천자문을 썼던 것이라 여겨진다.

김광추는 1948년 급히 광주로 피신한 덕에 목숨을 구했지만, 동생 김광필은 4·3사건으로 인해 희생됐다. 김광필은 몸을 피했다가 1949년 군·경 토벌대에게 붙잡혔다. 그때 최소한의 법적 절차도 밟지 않은 불법적인 군법회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형무소로 끌려갔는데, 김광필은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형무소 환경이 열악해 수감자들이 전염병 등으로 사망하자 형무소 측에서는 사망 직전에 이른 사람들의 가족에게 연락해 수감자들을 데려가도록 했다. 

광주에 있던 김광추는 연락을 받고 마포형무소를 찾았다. 김광추는 동생 김광필을 데리고 나와 제주 출신으로서 당시 서울 마포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던 홍순옥을 찾아갔다. 그러나 병세가 심각해 김광필은 곧 숨을 거두었다. 김광추는 동생의 시신을 홍제동 납골당에 맡겼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김광추는 다시 걸어서 광주까지 내려왔다.

제주에 연락하니 “위험하니까 절대 제주에 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김광추는 그 길로 일본으로 건너가 목숨을 부지했다. 김광추는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부친의 간곡한 권유를 받자 1957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1960년대 초 제주에 와 살면서 김광추와 교유했던 시인 고은은 “어떻게 4·3 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는데 아무 말씀도 안 했어요. 내가 폭탄처럼 물었는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어찌 그 아픈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침묵이 유일한 답변이었을 것이다. 

구사일생 목숨을 구했던 김광추가 1957년 일본에서 귀국한 지 3년만인 1960년 ‘4·19’가 벌어졌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세상이 바뀌고 정권이 교체된 것이었다. 김광추는 그해 12월 열린 제3대 제주도의회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나이 55세였다. 도의회는 1960년 12월 22일 개원했지만, 이듬해 5월 ‘5·16’이 발생하는 바람에 제3대 도의회는 개원한 지 불과 5개월 만에 강제 해산됐다.

김광추의 지인들은 왜 그때 그가 도의원 선거의 출마했는지 지금까지도 의아해 하고 있다. 평생 한 번도 권력이나 이익, 또는 명예를 탐하지 않았던 그가 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김광추가 생전에 말한 바가 없으니 그 속마음을 알 수 없다. 아마도 이승만 정권이 어지럽혀 놓은 불의한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 했던 것이 아닐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