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10주년, 그리고 귀천 32주기. 제주 근현대 문화예술계의 큰 산 ‘청탄 김광추(聽灘 金光秋, 1905~1983)’ 선생이 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서귀포시 소암기념관이 10월3일부터 11월29일까지 ‘청탄 김광추 - 탄향유구(灘響悠久)’ 기획전을 마련했다. 제주 예술사에 있어서 ‘산북의 청탄, 산남의 소암’으로 회자될 만큼 청탄 김광추 선생은 소암 현중화 선생과 함께 근현대 제주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어른’이다. 이번 기획전 도록에 실린 청탄 선생의 소평전을 소암기념관(명예관장 현영모)과 필자인 언론인 김종민 씨의 동의를 얻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2차례 씩 연재한다. 빛나는 가을 이 계절에, 삶을 예술처럼 살다간 어른 ‘청탄’ 선생의 깊은 울림과 청아한 향기를 느껴 보시기 바란다. ※표시된 각주 내용은 원고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달았다. [편집자] 

①탄생에서 서울유학까지

②일본유학~베일에 가린 일본 체류

③해방과 시련…제주도의원 당선

⑤삶을 예술처럼, 예술을 삶처럼

⑥어진이, “그믐달 지듯 깨끗이 살고파”

<3편에 이어> 청탄 김광추는 1963년 현중화, 양중해, 이완규, 문기선 등과 함께 제주도 최초의 서예 모임인 담담회(淡淡會)를 결성했다. 뭔가 모임의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딱히 생각나지 않자 그냥 ‘담담하다’하여 담담회라 명명했다 한다. 

담담회를 계승해 1965년 창립된 영주연묵회(瀛洲硏墨會)에서는 초대회장 홍정표에 이어 제2대 회장이 되었는데, 10여 년간 회장 직을 맡으며 제주 서예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17  1970년대 초, 청탄은 소암 현중화에게 후학 지도를 권하여 1973년 그 유명한 소묵회(素墨會. 초대회장 장용직)가 탄생하는데 일조하였다. 청탄은 또한 소묵회의 유일한 고문으로 추대됐다. 

소묵회가 탄생하던 날, 청탄은 고문 수락 인사말에서 “이 나라의 서법정도(書法正道)의 개척을 위해서 독보적인 지성을 다 하시려는 소암 선생이 이 자리에 계시니, 여러분들은 그 훌륭하신 지도를 옳게 받들어 열심히 배워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18 두 분의 우정과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부럽기만 하다.

청탄이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음에도 1977년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하게 됐다. 청탄은 문화상 공적을 조사하러 찾아간 공무원에게 “난 아무 것도 문화 활동 한 게 없어. 난 그런 상 받을 자격이 없으니 딴 데 알아보고 활동 많이 한 분에게 줘.”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제주도문화상은 본인이 직접 작성하지 않더라도 수상을 원하는 측에서 공적서를 만들어야만 했다. 문학평론가 송상일은 “아마도 공적서 없이 심사위원들이 결정해 문화상을 수상한 것은 청탄이 처음일 것”이라고 회상했다. 청탄은 하는 수없이 상을 받았지만 상금을 모두 제주도미술전람회 수상기금으로 기탁했다. 이로써 ‘청탄상’이 제정·운영되기도 했다.

청탄은 집 마당에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흰 꽃이 겹으로 피는 데다가 가지가 꼬불꼬불하게 자라는 것이 그 자태가 범상치 않았다. 이 나무는 꽃도 일찍 피워서 청탄의 집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매화가 피는 곳’으로 유명했다. 

제주의 언론은 물론, 경향신문이나 동아일보 등 중앙언론사에서도 청탄의 집을 찾아 매화 사진을 찍어 전국에 봄소식을 전했다. 중요한 정보나 사건 기사가 아니라면 다른 언론사가 이미 다뤘던 소재는 기피하는 게 언론의 속성인데, 여러 언론사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해에 걸쳐 청탄의 매화로써 꽃소식을 전한 것은 특이한 일이다. 

[濟州=기동취재반] 입춘을 20여 일 앞둔 제주에는 벌써 매화꽃이 방싯방싯 피었다. 제주시 교외인 화북동 4302 김광추씨(70) 집 양지바른 남쪽 뜰악에는 20년 가까이 된 매화나무 한 그루가 100여 송이 꽃망울을 터뜨려 그윽한 봄향기를 풍겨주고 있다.  …제주에 단 한 그루밖에 없다는 이 매화나무는 키가 1m50 정도밖에 안 되나 가지가 폭넓게 퍼져 뛰어난 매화의 자태가 겨울 속의 화신을 자랑하고 있다.※19

20년 가까이 된 매화나무라고 하니, 청탄이 일본에서의 피신생활을 마치고 1957년 고향으로 돌아온 후 1960년대 중반에 심은 나무로 보인다. 청탄이 그동안의 혼란기를 벗어나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예술 활동을 할 무렵이다. 

이때부터 그는 홀로 예술을 하지 않고 서예 모임 등을 결성해 후학들을 지도함으로써 제주의 서예 수준을 한순간에 높이 올려놓았다. 뜰 안의 매화 향기로 전국에 봄소식을 전한 것처럼 제주에 문화의 향기를 널리 퍼뜨렸던 것이다(잘 자라던 이 매화나무는 안타깝게도 청탄이 작고한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청탄과 교유했던 지인들은 청탄의 예술을 특징짓는 열쇳말로 우선 ‘겸손’을 손꼽는다. 청탄이 입버릇처럼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다만 서예나, 그림·전각·사진을 좋아할 뿐이다.”라고 말한 것은 ‘겸손함의 증거’로 제시된다. 몇 가지 덧붙인다면, 청탄은 ‘풍류 없는 일급 풍류객’이며, ‘대표 예술 없는 종합예술인’이었다. 형용모순이다.

우선 ‘겸손’에 대해 살펴보자. 문학평론가 김병택은 “김광추의 예술작품은 실제로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지만, 그 스스로는 한 번도 예술가임을 내세운 적이 없다. 그의 이런 결벽주의는 그의 겸손한 인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했다.※20 

청탄은 자신의 예술에 대해 누군가 칭송을 하면 그때마다 “취미 삼아 해보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겸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이다. 생전에 한  번도 전시회를 열지 않았고 남 앞에 자신의 예술을 과시하지 않았으니 청탄이 겸손한 사람이라는 데 이론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술을 대하는 청탄의 태도는 ‘겸손’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듯하다. 

작고한 소설가 오성찬이 처음 청탄의 집을 찾아가 만났을 때, 청탄은 오성찬이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오 선생, 책 끝에 판권 도장은 어떤 걸 쓰고 이서?”라고 물었다. 오성찬이 막도장을 찍고 있다고 하자 청탄은 “내, 도장 하나 파주주…”라며 그 자리에서 사각도장을 파주었다.※21 

소암 현중화는 “청탄 선생은 전각도 했기 때문에 우리 소묵회원의 낙관도 거의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왕 전각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도 그의 낙관 하나를 오래도록 써 왔지요.”라고 말했다.※22 

이처럼 청탄은 여러 사람에게 서화 작품에 찍을 낙관을 파주었다. 또한 누군가 글을 달라고 하면 기꺼이 써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대가 없이 주는 전각과 서예 작품이라지만, 자신의 작품이 진정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여겼다면 절대 남에게 선물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각이나 서예 작품만이 아니다. 마을에 초상이 나서 비문을 써달라고 하면 비문을 써주었고, 새로 집을 짓는 사람이 상량식을 앞두고 부탁을 하면 기꺼이 상량문을 써주었다. 아직 바닥에 누워있는 대들보 위에 엎드려 상량문을 써주는 모습의 사진을 보면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하천 다리의 이름도 여럿 써주었다. 성산읍 신천리와 표선면 하천리를 잇는 다리를 두고 서로 자존심 싸움을 하며 다리 이름을 결정짓지 못하고 있을 때, 청탄은 이를 ‘평화교(平和橋)’라고 명명해 주기도 했다.※23

제주시에 화교학교가 들어설 때 청탄은 중화요리집인 아주반점 사장의 부탁을 받아 학교 정문 기둥에 붙여놓는 학교 이름을 써주었다. 오래전 그 화교학교 건물 벽면에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글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학교는 물론 제주도내 모든 건물을 통틀어 이보다 더 좋은 글이 붙어있는 곳이 있을까 감탄했었다. 

‘예의염치’는 대개의 화교학교에 통상적으로 써넣는 글이라지만, 그것을 청탄이 썼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더욱 반가워 최근 그곳을 지나다 지금도 남아있는 그 글씨를 오래도록 바라다보았다.

비문과 상량문, 그리고 교량의 이름과 학교 이름을 쓰는 것은 우리사회의 통념상 ‘서예의 대가’ 모습보다는 그저 글씨 잘 쓰는 촌로의 모습에 더 가깝다. 이처럼 청탄은 겸손하기도 했거니와 예술에서 ‘엄숙주의’를 거둬냈다. 한마디로 예술가연하지 않았다.

청탄은 누구나 쉽게 다가가 부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고, 청탄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글씨를 써 주었다. 이는 사람들이 청탄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청탄은 또한 ‘풍류(風流) 없는 풍류객’이었다. ‘술’이 없는 ‘풍류’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조합이다. 그러나 청탄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음에도 풍류객이라 불렸다. 언젠가 소암 현중화는 청탄의 아들에게 “자네 부친은 시(詩)가 없어!”라고 말했다 한다.※24  청탄이 쓴 글씨 중에는 한시(漢詩)도 많은데 왜 시가 없다고 했던 것일까? 

소암은 진짜 시를 말한 게 아니라 ‘풍류’를 빗대어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면 술도 마시고 이따금 망가진 모습도 보여야 하는데, 청탄은 늘 모범생처럼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는 말인 것이다.

시인 고은이 제주에 왔던 1960년대 초, 그는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난 유명 인사였다. 오죽하면 그동안 제주에서 ‘가짜 고은’ 노릇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제주에 오자 신문에 “이번에는 진짜가…”라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고은은 ‘죽으려는 심정으로 제주에 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가뜩이나 술을 좋아하는데다가 죽으려는 심정이었으니 제주에서 사귄 벗들과 매일 술을 마셨다 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술도 안 마시는 청탄은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었을 텐데, 그는 청탄을 자주 찾았고 청탄이 자신을 정화시켜 주었다고 말했다.※25

20여 년 전, 고은은 한 신문사에 ｢나의 산하 나의 삶｣이라는 장기연재 글을 썼는데, 그 글에서 청탄을 ‘탐라 일급의 풍류객’이라 표현하며 아래와 같이 청탄을 소개했다.

(전략) 이런 적막한 나날의 무위를 벗 삼고 살아가는 탐라 일급의 풍류객 김광추 옹이 화북마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해조음이 검푸른 수평선에서 몰려오는 그이 집안에 온실까지 마련해서 거기에 열대식물이나 희귀식물을 기르고 있었다. 

시를 좋아하다가 그림과 사진을 좋아해서 나이와 상관없이 한 마을에 하나도 없는 사진기를 두 개나 가지고 있으면서 이따금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대개는 지극히 아름다운 붓글씨를 쓰는 날이 늘어났다. 

그가 그런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찐 것이 식어버린 지 오래되는 찬 고구마를 오물오물 먹고 있다가 방문자 앞에서 당황하기도 한다. 

그는 젊은 시절 일본에 건너가서 예술을 몸에 익히고 돌아와서 주로 호남지방의 예술가들과 사귀는 격조로 여생을 누리고 있었다. 

제주도의 산부처라고 할 만큼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우정의 발광체였다. 이를테면 그에게는 제주사람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배타성 따위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 옹이 그의 온실에 소장된 희귀한 식물들을 선사받은 뒤 이것보다 이것을 준 인물을 보아야 한다는 예찬을 받기까지 했다.※26

말과 글은 한계가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위 글은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다. ‘지극히 아름다운 붓글씨’, ‘탐라 일급의 풍류객’, ‘제주도의 산부처’, ‘평화로운 우정의 발광체’라는 표현으로써 청탄을 상찬하려 했음은 분명해 보이나 청탄을 소개하기에는 미흡한 글이다. 

사람의 특징을 어쩌면 그렇게 잘 표현할까 라고 감탄케 하는 ｢만인보(萬人譜)｣를 쓴 고은이 저러한데, 필자가 어찌 청탄의 세계를 넘볼 수 있을까? 

청탄은 또한 ‘대표 예술 없는 종합 예술인’이었다. 청탄이 작고한 지 3년이 되던 해 소암 현중화는 “청탄 선생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업적이 많고, 그러면서도 한 가지에 매달려 이루어놓지 않았는데, 너무 겸손해서 자기 자랑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안했기 때문에 무어라 한 마디로 얘기하기가 어렵습니다.”라면서 “어느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해 나갔으면 더 커다란 업적을 남겼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아무튼 나는 이 선각자를 존경합니다.”라고 말했다.※27 

시인 고은도 “청탄 선생은 여러 방면에 조예가 깊은데 전문적으로 한 것이 없어요. 애석해요. 뭘 되겠다는 욕심이 있어야 하는데 욕심이 없어. 일가를 이뤄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분입니다.”라고 말했다.※28

생각해 보면, 청탄은 어느 분야에서도 제주를 대표할 만한 예술을 이루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림에선 김인지(1907~1967)가 있었다. 김인지는 1935년 열린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제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입선했고, 1936년과 1938년 선전에서도 입선함으로써 ‘제주도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칭호를 얻었고, 1955년 창립된 제주도미술협회 초대회장을 역임하면서 제주도의 미술계에 초석을 다지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9  제주도미술협회가 창립될 때 청탄은 일본에 피신 중이어서 참여하지 못했다. 

김인지 이후엔 변시지(1926~2013)가 제주를 대표하는 화가로 입지를 굳혔다. 

청탄보다 두 살 어린 소암 현중화(1907~2001)는 서예 분야에서 제주는 물론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래선지 중앙의 한 언론사는 전국의 예술인들을 다룬 특집기사 제주 편에서 소암 현중화는 ‘서예가’로, 청탄 김광추는 ‘전각가(篆刻家)’로 각각 나누어 소개하기도 했다.※30 

전각은 독보적이었으나 미술과 서예 분야에 관한 한 청탄은 제주도 ‘최고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탄은 최고가 되려는 마음조차 품지 않은 채 온갖 예술을 삶처럼 즐기며 살다 간 ‘종합 예술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