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하지 않는 게 ‘최상의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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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그 어느 때보다 개발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사고(思考)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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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한라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라산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알토 레오폴드의 말을 빌리면 “산은 모든 존재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아온 존재의 덕성”입니다. 그렇습니다. 한라산은 아득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존재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라산과 우리는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한라산 그 자체뿐만 아니라, 한라산이 거느리고 있는 자연과 우리를 분리시키려는 그 어떤 시도도 도저히 용납되지 않습니다. <한라생태숲 전망대에서> ⓒ 강정홍

우리는 ‘자연의 거울이자 상(像)’

우리들에게 저 ‘빛나는 한라산’과 ‘아름다운 자연’이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하늘이 내린 축복입니다. 그 자체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장구한 세월동안 우리들을 지켜보면서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현존적 가치는 제 둔한 필설로서는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대자연의 숭고함과, ‘마음의 고향’이라는 영적인 풍요로움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거울이자 상(像)입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저 한라산도, 재선충병에 시달리고 있는 저 소나무도, 인기척에 놀라 덤불 속으로 숨는 저 노루도 모두 다 그렇습니다. 주위의 모든 것과 관련돼 있어 어떤 식으로든 모두를 반영합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그 자체라기보다는, 서로에게 비춘 상(像)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뚤어지면, 자연도 비뚤어지고, 자연이 비뚤어지면, 우리도 비뚤어집니다. 자연은 무궁한 시공으로 열려 있는 질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존재의 실존적 완전성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자연을 해석하면서 우리 자신들만을 그 안에 넣고, ‘인간화된 자연’을 인식하는 건 좀 편협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생태 중심적 자연관마저 다소 인위적인 색채가 짙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그 말에 공감하든, 아니든, 저는 그걸 제대로 설명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 말에 결점과 모순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가 한 말의 진실성에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대지의 윤리’는 ‘자연의 건강을 위한 의무’를 깨닫는 것

그러나 너무 감상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의 자연생태적인 문제는 이미 그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게 하나 있습니다. 자연생태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외적 자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결국 이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우리들의 내부에 있는 자연의 본성을 지켜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가 다 같이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희망의 표현입니다.

대지는 단순한 땅이 아닙니다. 그것은 흙, 식물, 동물이라는 순환을 통해 흘러가는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필연적으로 생태의 윤리를 반영합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레오폴드의 ‘대지의 윤리’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대지의 윤리는 우리를 대지 공동체의 정복자로부터 그 구성원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료나 전체 공동체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대지의 윤리’는 개개인 모두가 대지의 건강을 위한 자신의 의무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의 주장은 이외로 단순합니다. “…대지의 사용을 경제적인 관점에만 국한 시켜서는 안 된다. 모든 문제를 생각할 때, 경제적 타산과 함께, 윤리적인, 그리고 미학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물론 ‘경제적 논리’도 사회의 한 축(軸)인 이상,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돼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들의 대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경제적 관점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경제적 타산이 모든 땅의 사용을 결정하는 규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레오폴드의 말에 공감하든, 아니면 그의 전체론적 사고(思考)에 반대하든, 분명한 것은 이 땅은 변함없이 우리들의 삶의 원천이라는 사실입니다.

개발에 의한 ‘영혼의 상품화’

그렇습니다. 저 빛나는 한라산과, 한라산이 거느리고 있는 이 아름다운 자연은 영겁의 시간에 걸쳐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보듬어온 삶의 터전입니다. 범망경 말씀처럼 “모든 흙과 물은 나의 옛 몸”입니다. “바람은 모두 나의 진실한 본체”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초월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기엔 비유적 의미 이상의 본질적 의미가 있습니다. 본질적 의미를 지닌다는 건,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 어떤 개발시책도 오로지 자연을 본받는 정도만큼만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 시대의 개발이 진정 지역사회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지금 이 시점에서는 ‘개발하지 않는 게 최상의 개발’입니다. 아! 지독한 역설입니다. 그러나 그게 절실한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최소한 개발의 규모와 템포를 줄여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의 자연은 ‘난개발’로 날로 수척해지고 있습니다. 자연을 더 많은 성장의 도구로 여기는 개발은, 이렇듯 필연적으로 파괴적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것은 급기야 우리의 영혼까지 상품화합니다. 제주도가 ‘중국도박꾼들의 천당이 되었다’는 보도(제주의소리 2014년 12월4일, 2015년 10월13일)는 참으로 참담합니다.

‘국제자유도시’라는 슬로건도 ‘제주 땅’을 국제시장에 내놓는, 듣기 거북하겠지만, 정말 ‘복덕방’ 수준에 그치고 만다면, 재검토돼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들의 개발이 자연 파괴로 그 내용을 채우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자본의 자기 이익추구가 지역주민들의 생활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소리는 한마디로 잠꼬대입니다. ‘경험의 함정’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들이 이미 실험을 마친 경험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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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사라봉과 별도봉이 보입니다. 가을바람에 억새꽃이 일렁입니다. 아침햇살을 받고 빛을 발합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거기서 감각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자연과의 깊은 일치를 경험합니다. 마음과 외부세계와의 구별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들과 나무들이 제공하는 최상의 즐거움은 “인간과 식물사이의 신비스런 관계에 대한 암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엔 벅찬 감정이 있습니다. ‘경이감이 섞인 환희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이 억새밭이 언제 파헤쳐질지, 오히려 그게 두렵습니다. <첨단과학단지 첨단로8길 위에서> ⓒ 강정홍

사망이 선고된 ‘낙수효과’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러나 개발이익은 결코 아래로 새어나오지 않습니다. 그동안 제주개발을 지탱해온 이론의 한 축(軸)인 ‘낙수효과’는, 그것도 신자유주의 본산인 국제통화기금(IMF)에 의해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진 바 있습니다. 자본이 들어와 자연을 개발하면, 그들의 부(富)가 늘어나고, 부가 늘어나면 더 많은 투자와 소비가 이뤄져 경기가 부양되고, 그 혜택이 지역주민들에게 돌아간다는 논리는 그래서 거짓입니다. 완전히 틀린 논리입니다. IMF가 아니더라도, 그건 지금 우리고장에서 확인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자연환경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넘겨받은 자연환경에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땅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만큼 자연에 대해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고장을 세계의 자연유산으로 자랑스러워 하지만, 그것도 우리 자연을 온전히 지키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좋은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하여 그것을 함부로 쓰면, 집안이 망하고 더불어 몸을 망치는 것처럼, 우리들의 자연유산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막말이 될지 모르지만, 그 유산을 지키는데 필요하다면, ‘철조망’을 치는 것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의 득과 실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자연유산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은 분명 자랑거리지만, 그 의미는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체득돼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명합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온전히 지키고, 그리하여 그것을 후손들에게 온전히 넘겨주는 일, 그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최선의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땅을 잃게 되면 그게 바로 ‘지옥’

역시 여기는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나무가 자신의 뿌리에 대해 느끼는 감각이 남다르듯이” 우리들은 이 땅의 거주자로서, 그리고 이 땅의 ‘꽃과 과실’로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영겁의 세월을 관통하는 자연의 일부로 존재합니다. 그건 필시 자신의 실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복감입니다. 게리 스나이더의 ‘대지의 시’처럼 “보기에 족할 만큼 넓고/……/강인하기 족할 만큼 가시투성이/살아가기 족할 만큼 푸르고/꿈을 꾸기에 족할 만큼 오랜/”

그 어느 때보다 개발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사고(思考)가 필요합니다. 그건 말로만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식체계, 영적인 풍요로움, 제주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연이 우리들을 돌보고 있다는 확신과 같은 부분들에 내적변화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그건 불가능합니다. 냉소주의는 실천적 전망이 없을 때 생깁니다. 개발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좀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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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지역사회의 크고 작은 갈등은 양심과 지혜가 살아 있으면, 얼마든지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땅을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건 양심과 지혜로서도 풀 수 없습니다.  그건 절망입니다. 자연이 황폐해지고, 아름다운 경관이 사라지고, 인문환경이 거칠어지면… 정말로 그렇게 되면, 바로 우리고장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헬탐라’가 될지도 모릅니다. 섬뜩합니다. 그건 두려움입니다. 그 이상의 말은 군더더기일 뿐입니다.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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