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10주년, 그리고 귀천 32주기. 제주 근현대 문화예술계의 큰 산 ‘청탄 김광추(聽灘 金光秋, 1905~1983)’ 선생이 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서귀포시 소암기념관이 10월3일부터 11월29일까지 ‘청탄 김광추 - 탄향유구(灘響悠久)’ 기획전을 마련했다. 제주 예술사에 있어서 ‘산북의 청탄, 산남의 소암’으로 회자될 만큼 청탄 김광추 선생은 소암 현중화 선생과 함께 근현대 제주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어른’이다. 이번 기획전 도록에 실린 청탄 선생의 소평전을 소암기념관(명예관장 현영모)과 필자인 언론인 김종민 씨의 동의를 얻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2차례 씩 연재한다. 빛나는 가을 이 계절에, 삶을 예술처럼 살다간 어른 ‘청탄’ 선생의 깊은 울림과 청아한 향기를 느껴 보시기 바란다. ※표시된 각주 내용은 원고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달았다. [편집자] 

▶ 글 싣는 순서 
①탄생에서 서울유학까지
②일본유학~베일에 가린 일본 체류
③해방과 시련…제주도의원 당선
④대표 예술 없는 종합예술인
⑤삶을 예술처럼, 예술을 삶처럼
⑥어진이, “그믐달 지듯 깨끗이 살고파”

[청탄 김광추 소평전]⑥어진이, “그믐달 지듯 깨끗이 살고파” / 김종민 언론인

▲ 청탄 김광추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를 '어진이'라 입을 모은다. 청탄(聽灘), 사람들은 그의 호처럼 청탄을 거친 회오리바람 소리에도 잔잔한 물처럼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 자료제공=소암기념관 ⓒ제주의소리

어진이, “그믐달 지듯 깨끗이 살고파”

<5편에 이어 마지막 연재> 예술을 대하는 청탄의 마음과 태도는 오랫동안 청탄과 교유했던 여러 지인들의 말과 글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가령 제자들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한 번도 전시회를 열지 않았다든가, 서예나 전각 작품을 남에게 줄 때 절대 돈을 받지 않았으며 돈 받고 예술 작품 파는 사람을 면전에서 꾸짖었다는 일화는 청탄을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을 대하는 청탄의 태도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은 몹시 조심스럽다. 청탄의 미덕과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 자칫 다른 예술가를 폄훼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열거나 작품을 파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또한 청탄과 달리 대개 한 가지 예술 분야에 매진하는 게 보편적인 예술가들의 모습이다. 

따라서 ‘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팔거나 하나의 예술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말이냐?’라는 반론에 부딪힐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이니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청탄의 속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제주에 거주했던 시기가 엇갈려 서로 만나진 못했지만, 청탄은 6·25전쟁기에 제주에 피난 와 살던 화가 이중섭이 극심한 가난과 병고에 시달렸던 사실을 훗날 들었을 것이다. 만약 청탄이 제주에 있을 때 이중섭을 만났다면, 청탄은 분명 이중섭을 돕고자 그의 그림을 팔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했을 것이다. 이는 청탄을 미화하기 위한 근거 없는 추측이 아니다. 

청탄은 제주 출신의 사상가이자 서예가인 고순흠(高順欽. 1893~1977)이 말년에 제주에서 서예 전시회를 열고자 했을 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전시회가 개최될 수 있도록 애썼다. 청탄은 고순흠을 경제적으로 돕고자 당시 제주에서 사업 등을 하는 부유한 사람들을 전시회에 초대해 서예 작품을 사도록 권했다. 서예에 안목이 부족한 사람들은 ‘청탄이 권한 것이라면 믿고 살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라는 생각에 앞을 다퉈가며 작품을 구입했고, 결국 전시회에 걸린 모든 작품이 팔렸다.

예술가가 작품 파는 것을 나무랐던 청탄이 왜 고순흠을 위해서는 전시회가 개최될 수 있도록 도왔고 또한 작품이 팔릴 수 있도록 적극 나섰던 것일까? 얼핏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 왜 청탄은 두 개의 잣대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 청탄 선생의 유품./ 자료제공=소암기념관 ⓒ제주의소리
▲ 1980년 당시 제주신문은 새봄을 맞아 '신춘...나의 구상'이라는 연재를 시작하면서 첫 주인공으로 청탄 김광추 선생을 소개했다. "그믐달처럼 사위어드는 목숨 다할때까지 깨끗이 살고 싶다"는 청탄의 말을 기사 첫머리에 소개하고 있다. / 자료제공=소암기념관 ⓒ제주의소리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청탄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게 좋겠다. 경신년(1980) 새봄을 맞아 당시 제주의 유일한 언론사였던 제주신문은 「신춘…나의 구상(構想)」이라는 연재물을 싣기 시작했다. ‘이 고장 예술인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연재의 첫 번째 주인공은 ‘서예가 김광추씨’였다. 청탄이 작고하기 3년 전의 인터뷰 기사이니 평생의 지론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뷰를 한 기자는 ‘문충성 문화부장’이었다. 문충성은 “그믐달처럼 사위어드는 목숨 다할 때까지 깨끗이 살고 싶다.”는 청탄의 말을 기사의 첫 머리에 소개하면서 “‘새봄의 구상’을 물었는데 (청탄이) 외딴 얘기부터 꺼냈다.”라고 썼다. 기사의 내용 중 ‘예술과 돈의 관계’에 관한 청탄의 생각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예인이 돈을 앞세우면 예술을 망치게 되어 장사꾼이 되는 법이지요” 그림을 그리면서 이 그림은 얼마짜리란 생각을 하며 그림을 그린 화가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미 그 사람은 예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돈을 앞세우면 예술을 망친다.’는 청탄의 생각은 현대 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던 화가 이중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그림이 팔리지 않아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화가의 길을 포기해야 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탄의 말을 잘 뜯어보면, 청탄은 예술과 인간 위에 군림하는 ‘물신주의’를 경계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는 작품 파는 것을 꾸짖었던 것이고, 반면에 고순흠의 전시회는 적극 도와 작품이 팔리도록 애썼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청탄은 자신이 좋아하던 것도 다른 사람이 달라면 선뜻 내주던 성품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줄 수 있어도 유일하게 나눠줄 수 없는 애장품은 선친의 호패 뿐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청탄 부친 김시병 호패 / 자료제공=소암기념관 ⓒ제주의소리
▲ 청탄 김광추 선생의 문패 / 자료제공=소암기념관 ⓒ제주의소리

한편,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청탄은 물욕이 전혀 없는 분’이라고 말한다. 청탄은 명사들의 ‘애장품’을 소개하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좋아하고 다듬던 것도 다른 사람이 정말 좋아서 달라고 하면 선뜻 줘버리는 게 내 성미야. 좋은 것은 모든 사람이 돌아가며 감상해야지 않겠나?”라고 반문하면서 “값이 어떻고 희귀성이 어떻든 자기 소유물들은 자기의 것만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다 내줄 수 있지만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애장품은 당신의 아버지가 조선시대 때 차고 다니던 호패(號牌) 뿐이라고 말했다. 선친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 호패만은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청탄은 물욕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공명심도 없었다. 물욕과 공명심은 필부들의 인지상정인데 청탄은 어찌하여 남에게 베풀기만 하고 또한 생전에 전시회 한 번 안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일까? 

▲ 남농 허건의 난(蘭). 청탄은 남농과도 교유가 깊었다. / 자료제공=소암기념관 ⓒ제주의소리
▲ 미당 서정주 시 '학(鶴)' 부분. 1965년. 미당이 청탄에게 보낸 글 / 자료제공=소암기념관 ⓒ제주의소리

시인 고은은 “청탄은 큰 사람인데 자기가 크다는 걸 과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배타적이지 않고 울타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청탄은 아주 맑은 사람이어서 만날 때마다 내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불심이 깊어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제일 많이 터득한 사람 같았다.”※38 라고 회상했다.

오성찬은 청탄에게서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종장을 쓴 글씨를 선물 받았는데, 같은 글씨가 다른 여러 사람의 집에도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그 내용이 바로 청탄의 마음과 철학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오성찬은 청탄이 한 자 한 자 해석해 주었다며 적벽부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옮겼다.※39

강물이 이같이 흘러가 버린다고 하여 강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달이 저와 같이 찼다가 이지러졌다 하여 달이 종당에 아주 없어지거나 아주 커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오. …천지 간의 모든 물건은 각기 주인이 있어 나의 소유가 아니면 한 가닥 털끝만한 것이라도 가질 수 없으나,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가 그것을 들어 소리를 짓고 눈이 그것을 보아 아름다움을 이루니, 그것들은 가져도 막는 사람이 없고 써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것은 조물주가 만든 무진장한 보배라.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라오.

김광추의 성품은 ‘청탄(聽灘)’이라는 그의 아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아호는 제주여중 교장을 역임했던 강삼정이 지어주었다고 한다.※40 강삼정은 김광추와 같은 마을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김광추의 성품을 잘 이해하며 ‘청탄’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을 터인데, ‘물결소리를 듣는다.’라고 직역되는 그 아호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또한 언제 아호를 지었는지도 알 수 없다. 

이와 관련, 화북마을 이웃인 신수용은 임자년(1972년)에 아래와 같은 칠언절구 한시를 지어 김광추에게 아호가 생긴 것을 축하했다.※41

聽灘 祝金光秋兄雅號 ‘청탄’ 김광추 형의 아호를 축하함

江村十角飄風聽 바닷가마을 여기저기서 회오리바람 소리 들리고
威勢激浪盡夜灘 밤이 다 새도록 거센 물결 일렁이는데
安得水平天下事 어찌하면 세상사를 잔잔한 물처럼 대할 수 있을까
無心處世是明觀 무심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 환히 꿰뚫어 보는 것이지

아호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 아호를 축하하는 사람의 시이긴 하지만 같은 화북마을 이웃이므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시를 지었을 거라 추정된다. 그리고 아호를 지은 때는 1972년인 듯하다. 

김광추는 거친 회오리바람 소리 들리고[聽] 거센 물결[灘] 일렁여도 잔잔한 물처럼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이웃들은 본 것이다.
지금까지 지인들의 말과 글을 쭉 살펴보니, 왜 사람들이 청탄을 사랑하고 존경했는지, 청탄의 어떤 점이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 주고 누군가의 마음을 정화시켜 준 것인지 어렴풋이 알 듯하다. 

대개의 갈등과 대립은 권력이나 이익, 또는 명예를 다투는 데서 비롯된다. 지나친 경쟁심은 시기와 질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청탄은 권력과 이익을 탐하지 않았고, 공명심이 없었으며, 어떤 예술 분야든 자신이 최고가 되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위아래 가리지 않고 다른 이를 대하는 마음이 따뜻하고 다정다감했으며, 또한 권위적이지 않아 젊은이들도 많이 따랐다.

▲ 1983년 7월1일 청탄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7월5일 영결식장으로 가는 상여행렬 모습 / 자료제공=소암기념관 ⓒ제주의소리
▲ 1983년 7월5일 청탄 선생 영결식장 모습. 옛 화북초등학교 교정에서 엄수된 영결식에 오현고 교악대가 조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 자료제공=소암기념관 ⓒ제주의소리

그래선지 1983년 7월 1일 청탄이 세상과 이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그의 부고란에 실린 친구[友人]대표는 현중화(玄中和)와 박태훈(朴泰勳)이었고, 호상은 김태준(金泰俊)과 양중해(梁重海)였다.※42  7월 5일에는 영결식이 열려 가족묘지에 안장됐다. 당시 신문은 유족, 향리인사, 각계인사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옛 화북국민학교 교정에서 영결식이 엄수되었는데, 오현고등학교 교악대의 조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약력소개, 김태준씨의 조사와 조시 낭송, 분향 순으로 거행됐다고 보도했다.※43 

청탄이 8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면서 분노할 만한 일 또는 억울한 일이 어찌 없었을까? 그러나 청탄은 속으로만 삭히고 참으며 누구에게도 해코지 하지 않았다. 청탄 성품을 칭송하는 여러 미사여구가 지인들의 말과 글을 통해 알려져 있는데, 감히 한 가지 덧붙이자면 ‘어질다’[仁]라는 형용사이다.

어떤 시대든 의제나 명제로 떠오르던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첫째, 당대에 그 가치가 구현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정의 사회 구현’이 나라의 표어로 등장하고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것은 그 시대가 정의롭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만약 그 가치가 이미 구현된 사회라면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둘째, 비록 그 가치가 현재 구현되지 못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그 가치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의 옛 어른들 중엔 갓난아기에게 “부자 되어라” 또는 “성공해라”라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어진아! 어진아!”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실제 이름이 ‘○어진’이라고 정해진 사람도 있다. 4·3사건과 같은 ‘모진’ 세월을 겪었기 때문일까? 어른들은 세상의 수많은 가치 중에 ‘어질다’라는 가치를 중요시했다.

청탄 김광추는 ‘어진이’였다. 그래서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살았고, 작고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닮고 싶은 부러운 삶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청탄의 삶이야말로 위로가 필요한 이 결핍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가 읽고 배워야 하는 이유가 아닐는지. 

▶ 각 주
※38 고은의 증언(2015. 2. 26)
※39 오성찬, 「영원한 素人의 분위기」, 『월간 관광제주』 제23호, 1986. 
※40 김석윤의 증언.
※41 김병택, 앞의 책, 107~108쪽.
※42 『제주신문』, 1983년 7월 4일.
※43 『제주신문』, 1983년 7월 5일.

 ◆ 필자 김종민은? 

언론인 김종민(55)은 4.3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일간지 기자 13년, 국무총리 소속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13년, 도합 26년을 오로지 4.3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매달렸다. 제민일보 ‘4.3은 말한다’ 취재보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희생자·유족 인정, 일부 희생자를 제외시키라고 주장하는 극우보수단체와의 숱한 송사를 맡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은 낮엔 농사를 짓고 밤엔 글을 쓰고 있다. 일간지 기자시절 무려 7000여명의 4.3유족들로부터 증언을 채록한 역사학도(고려대 사학과 졸업)로서의 집요한 기질, 음지의 역사를 양지로 끌어내려는 사명감이 이번에는 잔잔함에 묻혀 채 드러나지 않았던 청탄 선생의 깊고 청아한 예술적 삶을 좇는데 발동했다. 최근엔 조선시대 제주사를 공부하면서 임진왜란기 나라에 많은 말을 바쳐 국난국복에 기여했던 『헌마공신 김만일 평전』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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