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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우리 곁으로 온다. 매주 한편씩. 시보다 사람이 큰 시인 김수열. 제주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30여년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며 시를 담은 도시락(島詩樂)을 들고 매주 월요일 아침, 독자들과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살다가 시가 된 제주 시인과 그들의 시를 김수열 시인이 배달한다. 섬(島) 시인들이 토해 낸 시(詩)가 주는 소박한 즐거움(樂)이 쏠쏠할 테다. 시 낭송은 시를 쓴 시인이 직접 맡고, 김수열 시인은 시 속에 살아 숨 쉬는 소리를 끄집어내 우리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닮은 시인의 목소리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가슴을 든든히 채워줄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 산책’에 <제주의소리> 독자들도 함께 동행하길 기대한다. [편집자]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島詩樂) 산책](35) 평대, 당근잎처럼 / 김병심


사랑은 피고 지는 일이라 생각했다

터지는 사랑을 단단히 조인 글씨가 평대리 땅 속에서 지뢰처럼 

속절없이 등을 보이며 떠나는 철새에게도 

손 흔들어 주던 사랑이라는, 주홍

아기새의 재잘대는 소리를 연두로 가득 심는 꽃밭의 아가씨처럼

한철만 사랑하다 떠났어도 기다릴 것 만 같아

눈섞임, 눈섞임이 청춘인 죄 

분별없이 사랑을 묶어 날려보내는 철새의 한철연두의 세세한 눈주름이 주홍글씨 위로 자라나 평대로 날아가는 눈 먼 새

아가씨 때처럼 울고 있다


김병심 :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더 이상 처녀는 없다』『신, 탐라순력도』, 『울기 좋은 밤』 등이 있음.

오늘은 여러분을 평대리로 초대합니다.

거기 밭담 안을 둘러보면 겉으로는 여린 연두의 재잘거림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제 곧 등을 보이며 떠날 철새의 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땅 속의 주홍 지뢰처럼 사랑을 단단하게 조인 것들과 마주할게 될 것이니 연두처럼 부드러우면서 주홍의 그것처럼 단단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은 평대리 당근밭을 서성이기 바랍니다.

바닷바람을 타고 철새가 날아오릅니다.

여기서 한철을 보낸 철새는 더 따뜻한 사랑을 꿈꾸며 남쪽으로 떠날 것이고 때가 되면 떠난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돌아올 걸 믿습니다. 한 편의 사랑이 그렇게 피고 지듯 말입니다.

내 사랑만 눈 먼 사랑 아닙니다. 

사랑은 태생부터가 눈이 먼 까닭에 우리가 사랑이라고 이름 지은 모든 것들은 모두 다 눈이 먼, 허나 가슴만은 뜨거운 그런 것들이겠지요. / 김수열

김수열: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생각을 훔치다』, 『빙의』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 시·시낭송 / 김병심 시인
* 도시락(島詩樂) 배달 / 김수열 시인
* 영상 제작 / <제주의소리> 박재홍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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