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글·말] 서명숙,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펴내…강길순 사진도 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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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오랫동안 해녀들을 주제로 사진 작업을 해온 작가 강길순이 찍은 해녀 할망.. ‘해녀의 노래’는 제주출신 소설가 현기영 선생이 가사를 쓰고 제주 출신 재일교포 뮤지션 양방언이 곡을 붙인 노래로 2013년 만들어졌다. / 북하우스 제공

길을 내는 여자, 서명숙이 책을 펴냈다. 바당올레길에서 만난 삶의 스승, ‘숨’으로 척박한 바다 밭을 일구고 거친 생을 해쳐 온 제주의 어멍이자 할망, 며느리, 누이인 ‘제주해녀’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냈다. 

숨을 쉬어야만 사는 세상에서 숨을 멈춰야만 살 수 있는 세상에 몸을 내던져 온 해녀들. 그녀들은 말한다. 물속에선 가슴으로 숨을 쉬면 된다고. 역설적이다. 어찌 가슴으로 숨쉰단 말인가. 돌이켜보면 벼랑에 내몰린 파업노동자들, 길거리의 세입자들, 바늘구멍 같은 입시지옥에 갇힌 수험생들. 모두 가슴으로 ‘숨’을 연명하는 건 아닐까. 

서명숙은 말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을’이 ‘갑’의 횡포 앞에서 숨을 멈출 수도. 소리를 내지를 수도 없는 순간에 가슴으로 숨을 쉬면서 견디어 왔을 거라고. 그렇다.  

숨으로 인생을 헤쳐 온 제주해녀들의 이야기인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북하우스·276쪽·1만5000원)은 저자 서명숙이 8년간 올레길을 내고 걸으며 밀착 취재한 아흔두 살 최고령 해녀에서 20대 풋풋한 예비 해녀까지, 수많은 해녀들의 사연을 실었다. 결코 구구한 이야기들이 아니. 되레 절절한 가슴 울림의 이야기들이다.  

올레길 모퉁이에서, 온평리 포구 길에서, 서귀포의 어느 산책길에서, 신산리의 녹차 밭에서 만난 수많은 해녀들의 당당하고 진실한 목소리를 그대로 실었다. 

저자는 제주의 해녀들을 ‘모순적이면서 불가사의한 바다의 여신들’이라고 정의한다. 누구보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면서도,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끊임없이 희생한다. 무학이거나 학교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이들이 많지만 마을에 학교를 세우는 데는 누구보다 앞장선 때문. 모순과 불가사의를 ‘공동체 의식’이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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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북하우스·276쪽·1만5000원)
1부 ‘살아서 전설이 되다’에선 서귀포 조폭 두목의 마음을 빼앗은 가파도 상군 해녀의 이야기에서부터, 2부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해녀의 삶’에 소개된 항일운동과 4.3항쟁의 진실을 증언하는 해녀들, 3부 ‘고수들의 신세계’에선 바다를 존중하며 그 안에서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는 해녀들의 공존과 상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예비해녀들이 모습을 통해 제주해녀의 미래를 들여다보게 하는 4부 ‘해녀학교를 아시나요’도 유쾌하다. 

『태백산맥』·『아리랑』의 저자 조정래 선생은 추천의 글에서 “참된 제주의 딸(서명숙)이 이번에는 제주사람들의 원형질이지 제주를 먹여살려온 제주해녀를 제대로 알리는 책을 써냈다”고 격려한다. 

서귀포시 색달리 ‘대장할망’ 고시오 할망, 올레길 ‘원조 할망민박’ 문을 연 시흥리 강태여 할망. 서명숙이 제주바당과 바당 올레길에서 만난 해녀들이다. 그녀들은 스스로를 일자무식이라 낮추지만 “먹구정 헐 때 먹고, 자구정 헐 때 자고(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란 소리도, “살암시민 살아진다(살고 있으면 다 살아가게 된다)”는 철학적 가르침을 주는 훌륭한 우리들의 스승이다.     

서명숙의 오랜 벗이자, 언론인 출신의 시인 허영선도 ‘해녀의 생’이라는 시를 책머리에 선물했다. “해녀들은 생의 마지막에 / 둥근 파도소리를 듣는다 / 묵은 생의 지붕을 달래주던 소리…(생략)”. 저자가 들려주는 해녀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게 한다. 

또한 제주에서 나고 자랐고 미술교사로 교단에 섰던 강길순 씨가 이번 책의 사진 작업을 맡았다. 서귀포 공천포에서 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있고, 오랜 세월 해녀의 숨결과 인생을 사진에 담아온 그녀의 짠하고 찡한 사진들에 눈과 뇌가 힐링된다.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당초 이 책은 올해 늦 봄 세상에 선보일 예정이었으나 출판 직전 저자는 문득, ‘물 소곱에서 물질도 못해 본 년이 해녀들 얘길 어떵 골아(물 속에도 해녀작업도 못해본 여자가 해녀들 얘기를 어떻게 말해)!’란 스스로의 채찍질로 ‘출산(?)’을 멈췄다. 올해 개교한 ‘2015 법환해녀학교’ 1기생 과정을 모두 마치고서야 책을 펴낸 서명숙의 근성과 특별한 노력이 이번 책에 담긴 글들의 울림을 더 크게 다가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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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서명숙은?

<시사저널> 열혈 정치부 기자, 취재1부장을 거쳐 <시사저널> 편집장,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지내며 23년을 기자로 살다가, 남들이 다 말리는 ‘미친 꿈’에 빠져 길 내는 여자가 되었다. 나이 쉰에 과감히 사료를 던지고 홀로 산티아고 길 800킬로미터를 36일간 밟으면서 순례에 나섰다가 그 길 위에서 문득 고향 제주를 떠올리게 된다. 제주의 구석구석을 느리게 걸어 여행하는 제주올레길은, 여행자들이 제주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역에 ‘올레 신드롬’을 일으키며 ‘걷기 여행’의 열풍을 불러왔다. 제주올레의 성공신화는 한국을 넘어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한국 최초로 사회적기업가의 최고 영예인 ‘아쇼카 펠오우’에 선정되기도 했다. 현 (사)제주올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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