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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우리 곁으로 온다. 매주 한편씩. 시보다 사람이 큰 시인 김수열. 제주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30여년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며 시를 담은 도시락(島詩樂)을 들고 매주 월요일 아침, 독자들과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살다가 시가 된 제주 시인과 그들의 시를 김수열 시인이 배달한다. 섬(島) 시인들이 토해 낸 시(詩)가 주는 소박한 즐거움(樂)이 쏠쏠할 테다. 시 낭송은 시를 쓴 시인이 직접 맡고, 김수열 시인은 시 속에 살아 숨 쉬는 소리를 끄집어내 우리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닮은 시인의 목소리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가슴을 든든히 채워줄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 산책’에 <제주의소리> 독자들도 함께 동행하길 기대한다. [편집자]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島詩樂) 산책](36) 국화를 따다 / 양민숙

너 아니?

이 향긋한 향을 피우기 위해

수많은 목이 비틀렸다는 걸

입안에서 오래 감도는

이 쌉싸름하면서도 감미로운 맛을 지키기 위해

살이 익는 고통을 지켜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해도

늦가을 바람이 물어다주는 고향의 소식을

채반 속에 누워서 들어야 하는 기구한

팔자라는 것까지는 몰랐을 거야

그래 그랬어

외면하고 싶겠지만

여태 외면해 왔겠지만

많은 수고로움을 제쳐놓고서라도

가을을 향기로 저며 놓고 통째로

이 작은 찻잔 속에 가둬버리려는

그 야무진 양육본능에 갈채를 보낸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

언젠가 가을은

국화 향만 여전히 남겨 놓고

목이 비틀렸던 자리에 흉터만 선명히 남겨놓고

비명소리 신음으로만 남겨놓고

그렇게 투명한 네 눈을 여과시키며

통과할 것이라는 것을


양민숙 : 『시사문단』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문을 지우다』, 『간혹 가슴을 연다』가 있음.

국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국화차를 마시지 말아야할 것 같습니다.
높고 깊은 가을 하늘 가득 안간힘을 다해 국화향 그윽하게 피워주었더니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가 봅니다.
그 여린 것들의 목을 비틀고 꽃살을 불가마에 올려 무자비하게 익힙니다.
잠시 잠깐 채반에 누워 건듯 불어오는 갈바람에 고향 소식을 듣지만
결국은 작은 찻잔 속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아름다운 보시라고 하기엔 참 고약한 인간 본능입니다.

국화꽃 진 자리로 가만히 다가섭니다.
목 잘린 흉터가 선명하고 고통의 신음소리 아직 선연합니다.
그렇게 한 계절이 가고 때가 되면 다시 꽃대 위에 송송송 노란 꽃망울 열리겠지요. / 김수열

김수열: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생각을 훔치다』, 『빙의』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 시·시낭송 / 양민숙 시인
* 도시락(島詩樂) 배달 / 김수열 시인
* 영상 제작 / <제주의소리> 박재홍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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