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편지(19)]아부오름 피뿌리풀
남국의 봄소식은 해안가를 노랗게 물들이는 유채꽃으로 시작된다.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샛노란 유채꽃의 물결은 봄 소풍 나온 병아리 떼의 재잘거림 마냥 제주의 온 섬을 뒤덮으며 제주도를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여기에다 연분홍의 벚꽃들이 일시에 피어나며 봄바람에 꽃비를 뿌리면 바야흐로 제주 섬은 온통 꽃물결 출렁이는 꽃의 정원으로 변한다.
화사하게 차려 입은 관광객들은 꽃바다의 향연에 취하여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해풍에 실려 오는 비바리 연가에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이렇게 제주의 봄 정취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제주도는 오름의 섬이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섬 전역에 삼백육십팔개나 퍼져 있다. 비온 뒤 솟아나는 죽순처럼 오름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울쑥불쑥 솟아나 있는데, 능선의 이어짐은 대지에 흐르는 너울과도 같다. 제주 동쪽 중산간의 송당리는 그런 오름에 둘러싸인 산촌이다. 제주 전통 신앙의 뿌리인 본향당(本鄕堂)이 거처를 삼은 신화의 고향이기도 하다. 삼백육십팔개의 오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양새를 지닌 다랑쉬오름을 중심으로 돝오름, 높은오름, 아부오름, 백약이오름, 당오름들이 이 신화의 마을 송당리를 감싸고 있다.
제주의 오름을 집대성한 제주의 산악인이자 ‘오름나그네’ 김종철님은 이 일대를 ‘오름의 왕국’이라 불렀다. ‘나그네’는 그 왕국의 들머리인 대천동 사거리에 이르러 버스에서 내려 그 들판을 걸어가며 이랬다.
'이 부근에 들어설 때면 언제나 야릇한 설렘이 한구석에 흐른다. 그것은 버스에서 내려 들판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부터 가벼운 긴장감과 함께 일어 온다. 오름 왕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드넓은 벌판에 오름 또 오름, 기생화산의 군집지대이다.<오름나그네 제1권 16쪽>'
그랬을 것이다. 황량한 바람만이 부는 들판에 오순도순 살아가는 오름의 마을로 들어서는 나그네의 야릇한 설레임. 신화의 마을을 감싸고 도는 오름의 왕국에 입성하는 나그네는 그래야 마땅하리라. 아부오름은 그 오름 왕국의 동네에서 가장 낮으면서 독특한 오름이다. 오름의 높이(비고)보다 더 깊게 패인 분화구 때문이다. 타원형으로 길게 늘어선 분화구는 고대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을 연상케 한다.
‘아부’는 앞(前)에서 유래된 말이다. 곧 송당리 앞쪽에 있는 오름이란 뜻이다. 제주에서 앞은 남(南)쪽이다. 그러니 아부오름은 송당 마을 남쪽에 있는 오름이란 말이다. 오름이 다정한 아버지처럼 정좌한 뜻으로도 여기는데, 억지 풀이처럼 어색하다.
황량하던 오름 둔덕이 초록의 기운으로 일렁일 때, 봄의 야생화들은 두터운 대지를 뚫고 하나 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봄꽃들의 축제에서 피뿌리풀은 단연 돋보인다. 이름에서 느껴지듯 피뿌리풀은 뿌리가 사람의 피처럼 붉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록 융단을 뚫고 연둣빛으로 솟아난 피뿌리풀의 줄기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다. 키는 40센티미터 가량까지 자라는데 원줄기를 빙 둘러가며 초록의 잎들이 팽팽히 돋는다.
영그는 오월의 햇살 아래에서 피뿌리풀은 줄기 끝에 선홍빛의 꽃대를 세우고 꽃잎을 열어젖힌다. 갓 피어난 꽃잎은 하얀 무명천에 연분홍 물감을 살짝 풀어놓은 듯 탐스럽다. 피어난 피뿌리풀의 꽃잎은 나날이 핏빛을 띠어간다. 봄의 들판에 흐르는 싱그러운 바람과 감미로운 햇살에 그을리면서 꽃잎들은 연분홍에서 주홍을 거쳐 선명한 핏빛으로 변해간다. 옐로우(Yellow)에서 마젠타(Magenta)를 지나 레드(Red)에 이르기까지 붉은 색의 스펙트럼을 관통하는 동안 피뿌리풀의 꽃잎들은 땅 속 깊은 곳에 스미어든 제 뿌리의 주홍 빛깔에 닿는다.
오름위에 부는 싱그러운 바람이 피뿌리풀의 꽃대를 지날 때, 피뿌리풀의 가녀린 몸뚱이는 물살에 휩쓸리는 해초처럼 흔들리면서 꽃잎들은 비릿한 향기를 허공 속으로 흘린다. 십여 년 전 아부오름 분화구가 그 향기로 가득한 적 있었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피뿌리꽃이 아우성 치듯 피어난 아부오름의 융단 능선을 걸으며 한라산 너머로 스러지는 핏빛 노을 속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돌려놓지 못했다. 노을이 사위어 갈때 차라리 그저 한 송이 피뿌리꽃으로 그 능선에 눕고 싶었다.
바람의 섬 제주를 떠도는 들판의 정령(精靈)들이여, 바라노니 초록의 융단을 선연(鮮姸)히 물들이는 피뿌리풀을 되살리지 못하고서는 감히 말하지 말라. 화산섬 제주의 봄을 온전히 품었노라고.